허저(許褚)는 후한 ~ 위나라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중강(仲康)이며 예주 초국(譙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호치(虎癡)란 별명이 있다. 우월한 완력(腕力)과 우직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信任)을 받아 그 경호(警護)를 맡았으며 용맹을 떨쳤다.
생애
괴력의 사내 : 후한 말 수천 명으로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도적을 방비(防備)했다. 여남군(汝南郡) 갈피(葛陂)의 도적 1만여 명이 쳐들어오니 비록 수는 적었지만 극한(極限)에 다다를 때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다. 화살이 떨어졌어도 돌을 던지며 저항(抵抗)하니 도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식량마저 동나자 일단 강화(强化)하고 소를 주는 대신 먹을 것을 받기로 했다.
도적(盜賊)이 와서 소를 몰고 가려 했는데 자꾸 도망치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이에 허저(許褚)가 한 손으로 소꼬리를 잡고는 약 100보를 끌고 갔다. 도적들이 놀라서는 소도 취하지 않고 줄행랑쳤다. 회(淮), 여(汝), 진(陳), 양(梁) 일대에 소문이 퍼져 모두 두려워했다.
조조를 경호
197년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歸順)하였다. 자신은 도위(都尉)가 자신을 따르는 협객들은 호사(虎士)가 되어 조조의 호위를 맡았다. 장수(張繡) 정벌전에 선봉으로 활약하여 교위(校尉)가 됐다. 199년 관도 대전에 종군(從軍)하였다. 당시 조조를 곁에서 모시던 서타(徐他) 등의 무리가 조조 암살을 모의(謀議)했는데 허저가 항상 좌우에서 호위(護衛)했으므로 두려워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허저(許褚)가 쉴 때만을 노리다가 마침내 칼을 품고 조조의 장막에 난입(亂入)하였으나 밖에 있던 허저가 수상함을 느끼고 즉시 돌아왔다. 서타 등은 허저를 보고는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경악(驚愕)했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조조(曹操)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고 언제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업성 전투에서도 힘껏 싸워 공을 세웠으므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동관 전투
211년 조조가 동관(潼關)에서 한수와 마초를 토벌(討伐)하려 했다. 군대를 이끌고 강의 북쪽으로 도하하던 중 조조와 허저(許褚)의 호사 100여 명이 미처 건너지 못했는데 마초(馬超)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으로 습격(襲擊)하여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가 급히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올랐지만 마초군도 달라붙었고 이들과 격렬(激烈)하게 싸우며 왼손으로 말안장을 들어 조조를 보호(保護)하였다.
난전 속에 뱃사공까지 유시(流矢)에 맞아 죽자 오른손으로 배를 저어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후 조조가 한수, 마초와 말을 탄 채 회담(會談)할 때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달랑 허저만 데려갔다. 마초는 허저(許褚)의 용명을 익히 알았기에 조조에게 그에 대해서 물었다.
조조가 고개로 허저(許褚)를 가리키자 허저는 눈을 부릅뜨고 마초를 노려보았다. 마초는 헛된 행동을 하지 않고 각자의 진영(陣營)으로 돌아갔다. 며칠 후 서로 교전하여 마초군을 크게 무찌르고 무위중랑장(武衛中郞將)으로 승진했다.
양평관 전투
215년 조조가 장로를 정벌(征伐)할 때 그 동생 장위가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평관(陽平關)에서 항전하였다. 조조가 산 위의 여러 진지를 공격(攻擊)했지만 공략하지 못하고 사상자(死傷者)만 늘어났다. 군량마저 떨어져서 퇴각(退却)을 결심하고 하후돈과 허저(許褚)로 하여금 산 위에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고조(高祚)가 지휘하던 최전선의 부대가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밤에 그만 장위군의 진영(陣營)으로 잘못 들어갔다. 때마침 사슴 수천 마리가 돌입(突入)하고 잘못 들어간 고조도 북과 피리를 울리니 장위가 크게 놀라 도망쳤다. 하후돈과 허저(許褚)는 같이 후군에 있던 신비와 유엽이 이 사실을 말한 후에야 알아차렸다.
조조 사후
조조가 죽었을 때 허저는 피를 토하며 통곡(痛哭)했다.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지고 무위장군(武衛將軍)에 임명되어 여전히 근위병을 맡았다. 허저(許褚)를 따랐던 자들도 공이 높아 제후에 오른 자가 수십 명이요 도위나 교위(校尉)가 된 자는 100여 명이었다.
조예는 즉위(卽位)하며 허저를 모향후(牟鄕侯)에 봉하고 식읍 700호를 주었으며 그 아들에게는 관내후의 작위(爵位)를 내렸다. 허저(許褚)가 죽자 시호는 장후(壯侯)라 하였다.
용모와 성품
키가 8척(尺) 정도에 허리가 10위(圍)인 거구였다. 씩씩하고 굳셌으며 용맹(勇猛)함과 힘이 남보다 아주 뛰어났다. 몸가짐이나 언행(言行)을 항상 조심하여 말수가 적었고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고지식하게 법규(法規)를 준수하며 수수했다. 그래서 미련한 호랑이라는 호치(虎癡)라고 불렸다.
한번은 조조(曹操)의 종실이자 조정의 중신인 정남장군(征南―) 조인이 형주에서 조조를 보러 왔다. 조조가 아직 전각(殿閣)에서 나오지 않아 일단 허저(許褚)와 만나 대화하려했다. 그러나 허저는 조인이 예를 갖추었음에도 조조가 곧 나온다는 말만 남기고 들어가 버렸다.
이에 조인이 불쾌히 여겼다. 어떤 사람이 허저(許褚)를 질책하자 “그는 아무리 충신이라 해도 외번(外蕃)입니다. 왕을 바로 가까이서 모시는 자가 어찌 사사로이 얘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조조(曹操)가 이를 듣고는 허저를 더욱 아끼고 의지했으며 중견장군(中堅―)으로 승진시켰다.
평가
조조는 자신의 번쾌(樊噲)라고 평했고 진수(陳壽) 역시 이에 동의했다. 배송지(裴松之)는 동관의 위기는 허저(許褚)가 아니면 구하지 못 했을 것이며 전위보다도 그 공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삼국지연의
원소(袁紹)에게서 망명한 허유가 관도 대전 종료 후 조조(曹操)를 업신여기며 매우 오만하게 굴자 죽였다. 동관 전투에서 마초(馬超)와 일기토(一騎討)를 벌여 웃통을 벗고 몇 백 합을 겨룰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장로(張魯)가 항복했는데도 장위(張衛)는 끝까지 저항하자 결국 죽였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주군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인정을 받아서인지 조조 진영(陣營)임에도 불구하고 일기토 장면이 여럿 추가되는 등 상당한 푸쉬를 받는다. 물론 연의에서 허저(許褚)가 벌이는 일기토는 모두 허구이다.
조조군이 황건적(黃巾賊)의 잔당과 싸웠을 때 하의라고 하는 황건적의 총대장이 나와 조조(曹操)에게 단판 승부를 도전해오는 장면이 있다. 조조는 전위에게 명령하여 하의를 붙잡는 것을 행하도록 하였다. 그때 허저(許褚)가 나타나 하의를 붙잡아 데리고 가려고 했다. 전위(典韋)는 허저를 뒤쫓아 하의를 내놓으라면서 맞대결을 벌였지만 박빙으로 싸우게 되었다.
이 허저의 용맹(勇猛)을 들은 조조는 "그 정도의 사내를 죽이는 것은 아깝다."라고 생각하여 부하들에게 올가미를 놓게 하고 붙들어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그 뒤 전위가 허저와 싸우고 있는 곳에서 신호를 받아 전위는 일부러 달아났다. 허저(許褚)는 전위를 쫓아갔지만 도중에 허저는 덫에 걸려 조조의 아래로 끌려갔다.
조조는 다른 적장과 같은 취급(取扱)을 받는 허저를 보면서 "누가 이런 대접(待接)을 하라고 했나."라고 말하며 곧 줄을 풀어주어 허저에게 사과(謝過)를 하고 부하가 되는 것을 권유(勸誘)하였다. 허저는 자신을 부하로 삼아준다면 기꺼이 맡아 모신다고 하였다. 연의에서의 조화 때문인지 흔히 전위와 허저가 같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正史)에서 그들이 서로 만난 적은 없다.
조조군이 여포와 싸울 때 여포(呂布)와 일기토를 벌여 20합을 겨루기도 하였다. 밀렸다는 묘사(描寫)는 없지만 여포의 실력을 잘 아는 조조(曹操)는 혼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서 휘하 맹장(猛將)들을 죄다 출격 시킨다. 그 유명한 논영회(論咏會) 장면에서도 잠깐 등장(登場)하는데 유비에게 조조의 초청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 역할로 등장한다.
정작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는 관우(關羽)를 띄워주기 위해 활약 장면이 없다. 여남에서는 조운(趙雲)과 50여 합을 싸운다. 서황(徐晃), 방덕(龐德)과도 50합을 싸웠다. 이외에 하후연(夏侯淵)이 정공법으로 잡지 못한 양임을 양앙과 함께 위험한 상황에서 털어버렸다. 또한 한당(韓當)과 주태(周泰)를 한꺼번에 상대하면서도 안 밀리고 30합을 버티는 등 여러 번 용맹을 떨쳤다.
마초(馬超)와 조조의 회담 중 조조를 호위하던 허저(許褚)는 마초를 노려보는 것도 모자라 "내가 바로 초군의 허저다! 무슨 일로 날 찾느냐!"라고 외쳤다. 거기에 눌린 마초가 진영(陣營)으로 돌아갔으며 양군 모두 "마초도 허저만은 두려워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마초(許褚)와의 일기토에서는 2라운드까지 하다가 땀을 많이 흘려서 갑옷을 벗어버리고 웃통으로 마초와 싸우고 그 와중에 창을 너무 크게 휘둘러 마초의 창에 찔릴 위기에 처하자 얼른 자기 창을 버리고 마초의 창을 뺏으려 하다가 기합(氣合)과 함께 창을 분질러버리는 장면도 나온다. 그야말로 남자의 로망(愿望)이다. 연의 한정으로 한중 공방전(攻防戰)에서 수송 임무를 맡았다가 부하들이 건네준 술에 취해서 장비에게 부상당하고 후퇴한 적이 있다.
조조 사후 조비의 명으로 조식과 그의 부하를 사로잡은 이후 어째서인지 언급되는 일이 없다. 사실 연의에서 허저(許褚)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부분 무렵은 여러 실력자들이 사망(死亡)하는 전개가 계속 나오다보니 따로 챙겨줄 여유가 없기도 하고 실제로도 조조(曹操) 사후 기록은 종군 내용이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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