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제갈량(諸葛亮)의 북벌은 삼국시기 촉한승상(蜀漢丞相)으로 광부한실(匡扶漢室)로 천하통일을 위하여 228년 봄부터 234년 겨울까지 전후로 한중(漢中)을 출발하여 조위(曹魏)에 일으킨 5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北伐)에 대하여 결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피로가 누적(累積)되어 병이 되었고 촉 건흥12년(234년) 오장원(五丈原; 지금의 섬서성 보계 기산경내)에서 병사한다. 향년 54세이다. ‘삼국지(三國志)’ 등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제갈량은 유언(遺言)으로 부하에게 자신을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묻으라고 했다고 한다. 거기에 산사에 의존하여 분묘(墳墓)를 만들고 묘혈(墓穴)은 단지 관을 넣을 정도로만 만들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나온다. 제갈량의 가족은 모두 촉한의 수도인 성도(成都)에 있었다. 왜 제갈량은 사후에 정군산에 묻어달라고 했을까? 그것도 가족이 있는 촉한의 도성(都城)인 성도가 아니라 한산(寒山)한 정군산에 말이다.
먼저 ‘삼국지·촉지·제갈량전’의 기록을 보자. 제갈량(諸葛亮)이 유언으로 "한중 정군산에 묻으라(葬漢中定軍山)"고 했고 그래서 정군산에 무후묘(武侯墓)를 만들었다고 한다. 제갈량에 있어서 서주(徐州) 낭야(琅邪)의 양도(陽都; 지금의 산동성 임기시 기남현) 사람이다. 다만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서주 냥야 양도는 이미 조위(曹魏)의 강역이다. 제갈량이 자신의 고향에 묻힐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족이 있는 성도가 제갈량의 안장지(安葬地)로 선택될 만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한중지역(漢中地域)의 정군산(定軍山)에 묻어달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역사가(歷史家)의 논증(論證)으로 제갈량이 이렇게 한 것은 기실 이유(理由)가 간단하다.
한편으로 제갈량이 정군산(定軍山)에 묻어달라고 한 것은 정군산이 한중(漢中)에 있기 때문이다. 촉한이 조위(曹魏)를 북벌하는 최전선(最前線)이다. 이 기초 위에서 제갈량이 사후에 이곳에 안장(安葬)되기를 원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생전에 시종 중원북벌(中原北伐)을 명심하고 있었고 한실을 부흥(復興)시키고자 하였으며 심지어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다는 것을 즉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제갈량의 이런 조치(措置)는 후인들에게 알리고 격려(激勵)하려는 의도도 있다. 예를 들어 촉한의 후주 유선(劉禪)과 강유(姜維), 비위(費偉), 장완蔣琬 등 문신무장들에게 한실을 광복(光復)하고 조위(曹魏)를 북벌해야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더더욱 제갈량의 필생(畢生)의 바램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것은 제갈량이 만일 사후에 성도 혹은 촉한의 다른 지방에 안장되었다면 확실히 그런 효과(效果)는 발생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군산(定軍山)은 대파산맥(大巴山脈)에 속한다. 그 맥은 고묘자(高廟子)에서 평지로 들어가며 빼어난 봉우리가 12봉이 있다. 석산자(石山子)에서 원산자(元山子)까지 "십이연봉(十二連峰)"이라고 불린다. 다시 동쪽으로 가면 당구사고봉(當口寺孤峰)이 있다. 서에서 동으로 10여 킬로미터가 이어진다. 즉 정군산(定軍山)은 병가(兵家)의 필쟁지지(必爭之地)일뿐 아니라 여러 산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主張)하는 사람도 있다. 제갈량이 사망하기 전에 후주(後主) 유선에게 유언을 남겨서 4명에게 그의 관을 매고 계속 남으로 가다가 밧줄이 끊어지면 그곳에 자신을 묻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4명이 밧줄에 관을 매고 가다가 밧줄이 끊어지기도 전에 이미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 정군산의 아무 곳이나 한 곳을 선택하여 묻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분명하다. 정군산의 복잡한 지형(地形)에 제갈량의 유언까지 더해져서 제갈량이 묻힌 구체적(具體的)인 장소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에 상응(相應)하는 것은 만일 제갈량(諸葛亮)이 사후에 촉한의 도성 성도에 안장(安葬)되었더라면 그의 묘는 쉽게 찾아질 것이다. 촉한의 실력이 조위(曹魏)보다 명백히 약한 상황 하에서 언제 조위의 대군이 촉한의 도성 성도를 함락(陷落)시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여러 번 조위를 북벌(北伐)하였으므로 자신의 묘가 도굴(盜掘)당하고 파괴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사후에 정군산(定軍山)에 안장되기를 원했고 정군산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하여 그리고 비교적 은밀(隱密)한 매장방법으로 도굴의 위험을 피한 것이다. 이것은 제갈량의 또 다른 총명한 점이다. 이에 대하여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은 ‘수경주(水經注)’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 산에 묻었으나, 지세를 따라서 묻었고, 분묘를 만들지 않았다." 분묘(墳墓)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면 제갈량은 확실히 남들이 자신이 묻힌 곳을 알기 원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제갈량의 가족들
자고이래로 모만세(謀萬世)하지 않으면 모일시(謀一時)할 수 없고 모전국(謀全局)하지 않으면 모일성(謀一城)할 수 없다. 강태공은 낚시를 하다가 주문왕을 낚아서 주왕조(周王朝) 800년 강산을 도모(圖謀)했고 귀곡자(鬼谷子)는 도리만천하(桃李滿天下)로 칠국(七國)이 칭웅(稱雄)하게 돕고 최종적으로 진시황(秦始皇)이 육국을 통일하게 만든다.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계책으로 진을 멸하고 항우(項羽)를 멸하여 400년 한왕조를 연다. 이들은 모두 모만세, 모전국의 인걸들이다. 후한 때 삼국이 나타나서 군웅(群雄)이 축록(逐鹿)하여 조조(曹操), 손권(孫權), 유비(劉備)가 삼분천하했는데 마지막에는 숨어있던 '총호(冢虎)' 사마의(司馬懿)의 후손이 천하를 통일한다. '총호'는 사마의를 말하고, '와룡(臥龍)'은 제갈량을 말한다. 조조, 손권, 유비도 일세의 영웅이지만 '와룡', '총호'의 두 가족이야말로 '모만세', '모전국'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최종의 승리자(勝利者)가 된다.
사마가족(司馬家族)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삼국이 진으로 통일되고 진왕조(秦王朝) 150년의 강산을 연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제갈 가족(諸葛家族)은 제갈량이 죽은 후 영광이 끝났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갈 가족은 제갈량(諸葛亮)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 제갈 가족은 후한 삼국에 뿌리 깊게 퍼져 있었고 널리 퍼져 있었다.
제갈 가족의 용호구(龍虎狗)
전 삼국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제갈량(諸葛亮)이다. 공명은 모옥(茅屋)에서 나오기도 전에 삼분천하(三分天下)를 정했고 산을 내려오기 전에는 농사짓는 농부였지만 하산 후에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와룡(臥龍)'이라는 별명에 부끄럽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는 '화공'의 비조라고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이다. 화소박망파(火燒博望坡), 화소신야(火燒新野), 화소적벽(火燒赤壁) 조조에게 세 번의 '화공'을 날렸다; 칠종칠금 때는 '화소등갑군(火燒藤甲軍)', 사마의와 싸울 때는 '화소상방곡(火燒上方谷), 각각 맹획과 사마의에게 화공을 한방씩 날린다.
정치, 경제적으로 제갈량(諸葛亮)은 더욱 뛰어났다. 촉한이 건립된 후 제갈량은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가 되어 백성을 다독이고 의궤(儀軌)를 보이며 관직(官職)을 다잡으며 권력(權力)과 제도를 만들고 진심을 보여주며 정의(正義)를 널리 펼친다. 촉한을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잘 다스렸다. 그의 지위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었다. 유방(劉邦)은 그를 가리켜 "물 만난 고기 같다'고 했고 유선은 그를 '상부(相父)'로 모신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삼국지)’에서 그를 "치지양재(治之良才), 관소지아필(管蕭之亞匹)"이라고 했다. 관소(管蕭)는 관중(管仲)과 소하(蕭何)를 가리킨다. 시성 두보(杜甫)도 ‘촉상(蜀相)’이라는 시를 지어 제갈량(諸葛亮)을 추도(追悼)한다.
승상사당하처심(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외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영계벽초자춘색(映階碧草自春色), 격엽황리공호음(隔葉黃鸝空好音)
삼고빈번천하계(三顧頻煩天下計), 양조개제노신심(兩朝開濟老臣心)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 장사영웅누만금(長使英雄淚萬襟)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은 동오(東吳)에서의 정치적 지위가 아주 높았다. 손권(孫權)이 칭제한 후 관직이 대장군, 영예주목에 이른다. 제갈량형제들은 비록 '형제(兄弟)'이지만 공사를 분명히 해서 각각 서로 다른 주군을 모신다. 유비(劉備)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제갈근(諸葛瑾)은 유비에게 서신을 보내어 유비가 관우(關羽)의 복수를 하려는 것은 "소인의 마음으로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질책(叱責)한다.
제갈근(諸葛瑾)과 손권(孫權)의 관계는 제갈량(諸葛亮)과 유비(劉備)의 관계보다 못하지 않았다. 손권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유(子瑜, 제갈근)와 고(孤, 본인)는 같이 일한지 오래 되어서 골육(骨肉)과도 같아 서로를 깊이 잘 알고 있다. 그의 사람됨은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고 의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고와 자유는 신교(神交)라 할 수 있다. 바깥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고와 자유는 생사로도 가를 수 없는 맹세(盟誓)가 있다. 자유도 고를 배신하지 않고, 고도 자유를 배신(背信)하지 않는다." 제왕이 신하와의 관계를 '골육과 같다', '생사로도 가를 수 없다'라고 표현하였으니 지음지교(知音之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근(諸葛瑾)이 사망한 후 아들 제갈각(諸葛恪)은 손권에게 수석탁고대신(首席託孤大臣)으로 임명되고 전후로 오주 손량(孫梁)이 집권한 시기에 대장군(大將軍), 승상, 태부의 직위를 받고 양도 후에 봉해진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동흥대첩(東興大捷)을 거둔다. 그의 지위는 하늘에 뜬 해와 같았고 제갈량(諸葛亮)의 촉에서의 지위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제갈량의 동생 제갈탄(諸葛誕)은 자가 공휴(公休)이고 조위(曹魏)에서 잘 나갔다. 위나라에서의 관직이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평후에 이른다. 일찌기 사마사(司馬師)와 함께 관구검(毌丘儉), 문흠(文欽)의 반란을 토벌하여 혁혁한 공헌을 세운다. 제갈량(諸葛亮), 제갈근(諸葛瑾)과 마찬가지로 제갈탄은 위나라에 충성(忠誠)하는 장군이다. 각각 다른 주군(主君)을 모셨으므로 제갈탄은 일찌기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사의 지휘하여 병력(兵力)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한다. 동오(東吳)에서 권력의 중추(中樞)에 있던 조카 제갈각과 격전을 벌인다. 역사에서 '동흥전투(東興戰鬪)'라고 부르는 전투이다. 제갈각(諸葛恪)은 친히 4만의 오나라병력을 이끌고 숙부인 제갈탄과 대진(對陣)한다. 대장 정봉(丁奉)이 눈 오는 밤에 습격하여 위나라에 대승(大勝)을 거둔다. 위나라의 전부독 한종(韓綜) 낙안태수 환가(桓嘉)는 익사하고 위나라 대장 관구검, 왕창(王昶)은 군영을 불태우고 도망친다. 제갈숙질의 교전(交戰)에서는 조카가 대승을 거둔다. 전투 전에 제갈탄은 사마사에게 정확한 전법을 제시했지만 사마사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동흥전투 후에 사마사는 스스로 나서서 모든 책임을 부담(負擔)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공휴(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여러 장수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삼국무대에서 제갈 가족(諸葛家族)은 빛나는 별이 많았다. 당시에는 제갈근(諸葛瑾), 제갈량(諸葛亮), 제갈탄(諸葛誕)이 모두 이름을 떨치고 각각 다른 나라에 있었다. 그래서 "촉에서는 용(龍)을 얻고 오에서는 호랑이(虎)를 얻고 위에서는 개(狗)를 얻었다."라는 말이 있었다.
평생의 적에서 자손의 혼인(婚姻)까지 어떠했는가? 제갈량(諸葛亮), 제갈근(諸葛瑾), 제갈탄(諸葛誕)의 세 명이 죽은 후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에 제갈 가족은 어떠했는가?
촉한에서 등애(鄧艾)가 음평(陰平)을 기습하여 성공한 후, 병력이 밀려오자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 손자 제갈상(諸葛尙)은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한다. 동오에서 손준(孫峻)이 제갈각과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어 손준은 제갈각을 죽이고 삼족(三族)을 멸한다. 조위(曹魏)에서 제갈탄은 위나라에 충성하여 사마씨형제가 권력을 농단(隴斷)하는데 불만을 품고 위나라를 버리고 동오로 간다. 그 결과 사마소(司馬昭)와의 수춘혈전(壽春血戰)에서 패배하여 피살된다. 사마소는 제갈탄의 삼족을 멸한다. 제갈탄의 휘하에 있던 수백 명은 포로로 잡혀서 아무도 항복(降伏)하지 않고 참살(斬殺)된다. 이때부터 제갈가족은 삼국무대에서 막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제갈 가족의 또 다른 영웅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제갈서(諸葛緖)이다.
제갈서(諸葛緖)는 자가 우명(佑明)이고 제갈탄(諸葛誕)과 같이 위나라에서 관직을 지낸다. 관직은 태산군태수, 옹주자사(雍州刺史)에 이른다. 비록 동족인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처럼 높지는 않지만 그대로 동한 때의 태수, 자사는 한 지방의 장관이다. 장관급의 고위관직(高位官職)이라고 할 수가 있다. 후삼국시대의 장관급 간부로서 제갈서는 전후로 동오(東吳)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제갈각과 대진한 바 있다. 역사기록(歷史記錄)에 따르면, "오나라의 대장군 소준 등은 십만이라고 부르는 군대를 모아서, 장강을 건넌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鄧艾)를 보내어 비양(肥陽)을 지키게 하고 등애는 적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중요한 곳이 아니라 여기고 부정으로 옮겨서 주둔한다. 그리고 태산태수 제갈서 등을 여장을 보내어 맞싸우게 하여 결국 쫓아냈다." 즉, 제갈서는 명장 등애의 지휘 하에 동족인 제갈각과 손준을 격패시켰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투도 등애의 지휘 하에 위나라가 촉을 멸망(滅亡)시키는 전투이다. 사마소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계책으로 등애로 하여금 강유(姜維)를 견제하게 하고 제갈서로 하여금 음평교(陰平橋)를 끊게 하여 강유의 퇴로(退路)를 차단한다. 그리고 종회로 하여금 촉군 주력이 배치되지 않은 전략요충지(戰略要衝地) 한중으로 진공하게 한다. 결국 위나라는 촉을 성공적으로 멸망시킨다. 그러나 위나라의 이 몇 개 부대는 내분이 발생하여 제갈서 부대가 종회부대에 흡수 재편된다.
제갈 가족 중에서 제갈서(諸葛緖)는 비록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그의 일맥(一脈)은 화를 당하지 않고 서진 때 진무제(晉武帝) 사마염의 신임과 중용(重用)을 받는다. 삼국이 진으로 통일된 후 제갈서는 공로로 관직이 태상(太常), 위위(衛尉), 낙안정후에 이른다. 태상이라는 관직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천자의 제사, 예의를 관장하는 관직이다. 동시에 박사시험의 주시험관(主試驗官)이다. 구경의 으뜸이다. 위위는 궁궐수비를 담당하는 관직이다. 천자(天子)가 아주 신임하는 자가 아니라면 맡을 수가 없다. 사마염(司馬炎)의 신임을 받았으므로 그의 수려하고 단장한 손녀 제갈완아(諸葛婉兒)는 후궁이 되어 황후의 바로 다음가는 부인(夫人)이 된다. 제갈 일족은 이로 인하여 서진 개국황제(開國皇帝)의 외척이 된다. 제갈서의 아들인 제갈충(諸葛沖)은 황제의 국장(國丈)이 되고, 형옥을 담당하는 정위(廷尉)를 맡고 평양향후에 봉해진다. 제갈충의 두 아들중 제갈전(諸葛銓)은 산기상시가 되고, 제갈민(諸葛玟)은 시중, 어사중승이 된다. 그 외에 제갈량의 손자 제갈경(諸葛京)은 강주자사가 되고, 제갈탄의 손자 제갈회(諸葛恢)는 상서령이 된다. 제갈 일가는 진무제 사마염(司馬炎)을 도와서 '태강성세(太康盛世)'를 만들어, 혁혁한 가문이 되어 진왕조의 관료세가로 된다.
동진 때 제갈 일족은 명문거족(名門巨族)이다. 심지어 삼국시대 제갈량의 명성보다도 높았다. 제갈량의 동생 제갈탄(諸葛誕)은 비록 위나라를 배반하여 삼족이 멸해졌지만 그의 장녀는 해를 입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사마의의 다섯째 아들인 사마주(司馬伷)에게 시집을 가서 제갈태비(諸葛太妃)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마주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그는 서진 개국황제인 진무제 사마염의 숙부이고 전후로 상서우복야, 무군장군, 진동대장군, 동관군왕, 낭야왕, 가개부의동삼사등의 직위를 맡는다. 제갈태비는 사마주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낳는다. 사마근(司馬覲), 사마담(司馬澹), 사마요(司馬繇). 사마근의 아들 사마예(司馬睿)는 바로 동진의 개국황제 진원제(晋元帝)이다. 진원제의 외증조부가 바로 제갈탄이다. 그리고 제갈탄은 제갈량의 당제이다. 그러므로 제갈 일족은 동진의 외척이 된다. 동진(東晉)의 황제에게는 대대로 제갈 가족의 피가 흘렀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동진황제에게 '무흥왕'에 봉해진다! 와룡(臥龍), 총호(冢虎)는 평생 적으로 만났는데 아마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자손이 혼인하여 화하(華夏)를 백년간이나 주재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제갈량의 자녀 4명은 누구인가?
제갈량(諸葛亮)은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고 삼국시대(三國時代)의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문학가, 서예가, 발명가이다. 중국전통문화에서 충신과 지자의 대표인물(代表人物)이다. 제갈량에게 4명의 자녀가 있다. 그들의 인생은 어떠했을까?
1. 제갈교(諸葛喬)
제갈량의 양자(養子)이다. 제갈교는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의 차남이다. 원래 제갈량의 조카이다. 동오(東吳)에 있을 때 형인 제갈각(諸葛恪)과 어려서부터 이름을 날렸다. 제갈량과 처인 황월영(黃月英)의 사이에 자식이 없자, 제갈교를 양자(養子)로 받아들인다. 제갈교가 촉으로 온 후에 제갈량이 그를 친아들처럼 대한다. 그가 평범한 인물로 남을까봐 엄격하게 가르쳤다. 제갈량의 북벌 시 제갈교(諸葛喬)는 군대를 따라 한중으로 간다. 사병을 이끌고 군량을 운송한다. 산골짜기를 오가면서 힘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갈교(諸葛喬)는 228년 젊은 나이로 요절(夭折)한다. 나이 겨우 25살 때이다.
2. 제갈첨(諸葛瞻)
제갈량과 처인 황월영(黃月英) 사이의 아들이다. 제갈첨이 태어날 때 제갈량은 이미 46살이다. 중년에 얻은 아들이다. 제갈첨(諸葛瞻)이 8살도 되지 않았을 때 제갈량이 병사(病死)한다. 그래서 제갈량으로부터 직접 배울 기회는 없었다. 17살이 되었을 때 제갈첨은 후주 유선(劉禪)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여 부마가 된다. 전후로 시중, 상서복야, 군사장군, 행도호위장군 등의 직위를 맡는다. 263년, 위나라 장군 등애(鄧艾)가 촉나라를 토벌할 때 위나라군대를 이끌고 음평(陰平)을 기습한다. 제갈첨과 장남 제갈상(諸葛尙) 그리고 촉장 장준(張遵), 황숭(黃崇) 등이 군대를 이끌고 방어한다. 성을 나서서 등애와 결전(決戰)을 벌이다가 교전 시 제갈상과 함께 죽는다. 제갈첨이 죽을 때 나이 겨우 37살이었다.
3. 제갈회(諸葛懷)
제갈량의 막내아들이다. 서진 때 태부(太傅) 왕람(王覽)은 진무제(晋武帝)에게 건의한다. 한나라 명신의 후예를 경성으로 불러서 직위를 내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제갈회만 가지 않는다. 원래 제갈회에게 작위를 주고자 했으나 제갈회(諸葛懷)는 사양한다. 신에게는 성도에 집이 있고 부친이 물려준 나무가 백 그루 있고 밭이 15경 있습니다.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재능이 없으니 그냥 집에서 평생 살고자 합니다 라며 작위를 거절한다. 진무제(晉武帝)도 그의 요구에 동의한다.
4. 제갈과(諸葛果)
전해지기로 제갈량의 유일한 딸이다. 제갈과(諸葛果)에 관한 기록은 정사에 보이지 않는다. 송나라 때 위료옹(魏了翁)은 ‘조진관기(朝眞觀記)’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성의 서북으로 나가면, 조진관이 있다. 관의 중간 왼쪽에 성모선사 승연갈녀지사가 있다. 예로부터 전해지기로 무후(武侯)의 딸인데 집에서 구름을 타고 가볍게 올라갔다고 한다." 민간(民間)의 전설에서는 제갈과(諸葛果)이 용모가 아름답고 평생 결혼하지 않으며 성도(成都)의 조진관에서 수행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도를 얻어 신선(神仙)이 되었다. 당연히 신선이 되었다는 말은 허황(虛荒)되지만 사람들의 제갈량에 대한 숭배(崇拜)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이를 보면 양자이건 친생자녀이건 제갈량(諸葛亮)의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의 가풍의 훈도를 받아 품행(品行)이 방정(方正)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였다. 어떤 자녀는 부귀(富貴)를 탐하지 않고 어떤 자녀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즐기니 모두 쓸모 있는 인재(人才)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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