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한때 인기리에 방영된 ‘대군사 사마의의 군사연맹’은 다시 한 번 사마의(司馬懿)와 제갈량(諸葛亮) 중 누가 더 대단한지에 관한 논쟁(論爭)에 불을 붙였다.
‘삼국연의(三國演義)’에는 두 명의 경쟁자(競爭者)가 있다. 한 명은 제갈량이고, 다른 한 명은 사마의이다. 두 경쟁대상(競爭對象)이 맞장 뜨면 도대체 누가 더 대단할까?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 줄줄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얼굴을 붉히고 목에 힘을 주기까지 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제갈량(諸葛亮)은 "다지이근신(多智而近神)" 즉 지혜(知慧)가 많고 거의 신격인 존재인 비범(非凡)한 인물이다. 민간에서는 그를 "지성(智聖)"이라고 부른다. 그는 한실(漢室)을 부흥(復興)시키기 위하여 재능을 발휘하여 삼분천하(三分天下)를 이룬다. 가히 공고개세(功高蓋世)라 할 만하고 이름을 천고에 남길 만하다. 교묘하게 동남풍을 불러오고 불길로 적벽을 불태운다. 팔괘진(八卦陣)을 발명하고 육손(陸遜)의 추격병(追擊兵)을 막아낸다. 맹획(孟獲)을 칠종칠금(七縱七擒)하면서 남방의 난을 평정한다.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발명하여 양초를 끊이지 않게 조달한다. 공성계(空城計)를 펼쳐서 사마의(司馬懿)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게 만든다. 이것만 해도 대단하지 않은가? 사마의가 이런 것들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제갈량(諸葛亮)에게는 치명적(致命的)인 결함이 있었다. 첫째, 인재전략(人才戰略)이 부족했다. 자주 사람을 잘 못썼다. 예를 들어 관우(關羽)를 잘못 기용해서 화용도(華容道)를 지키게 만드는 바람에 조조(曹操)가 구사일생할 수 있게 해준다. 관우로 하여금 형주(荊州)를 지키게 하여 결국 형주를 잃는다. 맹달(孟達)로 하여금 한중(漢中)을 지키게 하여 결국 맹달이 배신(背信)한다. 마속(馬謖)을 잘못 기용(起用)해서 가정(街亭)을 지켜내지 못한다. 그리고 일생동안 독당 일면할만한 인재를 배양(培養)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각각의 이익집단(利益集團) 간의 갈등을 제대로 해소하지도 못했다. 둘째, 대세를 장악(掌握)하지 못했고 자주 역행(逆行)했다. 그는 천시, 지리와 인화에 불리한 데도 불구하고 힘들게 병력을 모아서 전쟁(戰爭)을 벌였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재물을 낭비(浪費)했다.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셋째, 감정적(感情的)으로 일처리를 했으며 자주 감정에 휘말렸다. '선제의 촉탁'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의 두뇌는 냉정(冷靜)을 잃어버리고 충동적(衝動的)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일련의 잘못된 정벌전쟁(征伐戰爭)을 일으킨다. 이 세 가지 방면을 보면 제갈량은 고도의 전략적인 안목(眼目)을 가진 것이나 초강력적인 전략적 사고(戰略的思考)를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 사마의(司馬懿)를 보자. 그는 하남 온현(溫縣)에서 태어났고 제갈량(諸葛亮)보다 2살이 많다. 역사기록(歷史記錄)에 따르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목이 길고 두 눈이 넓고 길을 걸을 때 몸을 도릴 필요가 없이 머리를 180도 돌려서 후방(後方)까지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낭고지상(狼顧之相)"이라고 불렀다. 사마의는 두뇌(頭腦)가 맑았고 목표가 명확했다. 가슴에는 전체국면을 생각했고 대세를 파악(把握)했다. 자신의 힘을 고려하여 움직였고 대세(大勢)를 따랐다. 전략을 중시하고 소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도광양회(韜光養晦)할 줄 알고 역량을 축적(蓄積)할 줄 알았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기회를 보아서 움직였다. 적시에 나서고 적시에 물러났다. 나서면 위세(威勢)가 천하를 떨쳤고 물러나면 아무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지냈다. 사마의는 진정한 지자(智者)이다. 그는 예민한 관찰력(觀察力)과 통찰력이 있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난세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먼저 자신을 보전(保全)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정녕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이상(理想)을 운운할 것인가. 사마의는 공명(功名)을 이루면서 자신을 지켰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보통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해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가? 첫째는 은인(隱忍)이고 둘째는 실력이다. 한 사람의 경쟁력(競爭力)은 네가 얼마나 총명(聰明)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얼마나 뛰어난 지혜(知慧)를 가졌느냐에 있다.
TV드라마 ‘대군사 사마의의 군사연맹’의 제1편에서 배경소개(背景紹介)를 하면서 이런 말이 있다. "삼국의 난세(亂世)에 군웅이 축록(逐鹿)했다. 이 권력의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웃는 사람이 비로소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사마의(司馬懿)와 제갈량(諸葛亮)은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육출기산(六出祁山)의 힘겨루기에서 서로를 알았고 서로를 아꼈다. 필생의 최강적(最强敵)을 철저히 이긴 후에 실성통곡(失性痛哭)한다. 조정의 권모술수(權謀術數), 제왕의 심리술(心理術), 군사의 지략대결(智略對決), 궁중의 음모(陰謀)....일대군사 사마의가 어떻게 호걸(豪傑)이 배출되는 시대에 혈로(血路)를 뚫고 나와 '사상최강두뇌(史上最强頭腦)' 대결을 펼치는지를 보라." 이 선전 문구는 기실 이미 네티즌들의 논쟁(論爭)에 대한 대답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사마의가 최후에 웃었고 최후의 승자(勝者)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량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이다!
2.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대세를 잘 장악했다.
소위 "대세(大勢)"라는 것은 큰 추세(趨勢)의 전체적인 국면(局面)의 흐름을 의미한다. 그것은 천시, 지리, 인화의 종합적(綜合的)인 추세이다. 진정한 전략가(戰略家)라면 반드시 대세를 잘 봐야 한다. 방향을 잘 알고 시야(視野)가 넓으며 가슴으로 전체국면을 품고서 기세(氣勢)를 따라 올라가고 기세에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정확한 전략방침(戰略方針)을 세우고 계속 성공을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절대로 대세를 잘 장악(掌握)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첫째, 역량대비를 고려(考慮)하지 않고 병사들이 피곤(疲困)한 상태에서 원정을 벌인다. 당시 천하형세는 조위(曹魏)가 가장 강하고, 손오(孫吳)가 그 다음이며, 촉한(蜀漢)이 가장 약했다. 조위가 중원(中原)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지대물박(地大物博)하다고 할 수 있고 영웅이 배출되었다. 손오는 칭웅(稱雄)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지리, 인화의 우세(優勢)를 점하고 있었다. 촉한은 원래 전도(前途)가 양양했지만 먼저 관우(關羽)가 실수로 형주를 잃고 이이서 이릉(夷陵)에서 참패하면서, 선제(先帝)가 '붕어'하고, 남방에서는 '반란(反亂)'이 일어난다. 더더구나 후주(後主)는 혼용무능(昏庸無能)하여 촉한은 이미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였다. 이때 제갈량(諸葛亮)은 오히려 북벌을 결정한다. 기실 이는 계란(鷄卵)으로 바위치기와 다름이 없고 나방이 불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후의 사실이 증명(證明)한다. 제갈량의 육출기산(六出祁山)은 스스로를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에 빠지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하여 대량의 인력, 재력을 소모하게 되어 촉한멸망(蜀漢滅亡)의 속도를 가속화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위촉 양국(魏蜀兩國)의 실력을 비교해보기로 하자. 인구방면(人口方面)에서 위나라는 537만이고, 촉국은 겨우 90만이다. 영토방면(領土方面)에서 동한은 모두 14개주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가 하나 추가된다. 삼국정립(三國鼎立)이후 위나라는 그중 11개주와 1개도호부를 차지한다. 그것은 바로 청주(靑州), 연주(兗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사주(司州), 옹주(雍州), 양주(揚州), 병주(幷州), 유주(幽州), 기주(冀州), 형주북부(荊州北部)와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이다. 그러나 촉국은 익주만 가지고 있었다. 병력방면(兵力方面)에서 위나라의 병력은 70만-80만에 달했다. 그러나 촉국은 겨우 10만이었다. 촉국은 인구가 백만을 넘지 못했으므로 10만 군인을 기르는 것도 이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제갈량(諸葛亮)이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병력은 6만을 넘지 못했다. 위나라의 서부전선 방어병력은 20만 가량이었다. 인재방면에서 촉국에는 대장(大將)이 없었다. 요화(廖化)가 선봉을 섰다. 위연(魏延)만이 상장(上將)이라 칭할 만했고 마속(馬謖)만이 겨우 참모라 할만 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상장이 구름처럼 많았고 모신(謀臣)도 연이어 배출되었다. 생산력방면에서 당시의 중원옥토(中原沃土)는 농경이 선진적이고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서촉(西蜀)에 비하여 약간 나은 수준이 아니었다. 양초방면(糧草方面)에서 위나라는 후고지우(后顧之憂)가 없었다. 촉국의 양초운송(糧草運送)은 항상 문제였다. 지리방면에서 위나라는 편안하게 쉬면서 기다렸고 촉국은 피곤하게 멀리 행군해 가야 했다. 인화방면(人和方面)에서 제갈량은 시종 형주, 익주 양대 집단 간의 갈등(葛藤)을 해소하지 못했다. 중요한 순간에 항상 누군가 방해(妨害)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비교해보면 실력(實力)의 차이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은 대세(大勢)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스스로의 힘을 제대로 평가(評價)하지 못했다.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것이다. 어찌 패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고 충동적(衝動的)으로 행동에 나섰다. 고인은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출사표(出師表)’를 읽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다" 출사표의 문구인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이후이(死而後已)"는 실로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 다만 국가사무를 총괄(總括)하는 승상으로서 제갈량은 절대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 당시 국력이 쇠약(衰弱)하고 후주 유선은 혼용무능(昏庸無能)했으며 간사한 무리를 가까이 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했다. 그것은 "부불기적아두(扶不起的阿斗)"이다. 제갈량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출사표’에서 용심양고(用心良告)하어 완곡하게 간언(諫言)한 것이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 후주가 선제를 본받아 분발(奮發)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후주는 여전히 충언(忠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런 국가상황을 감안(勘案)하면 제갈량은 마땅히 정무를 돌보는 것을 위주로 해야 했고 토벌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설사 살아있는 동안에 통일대업(統一大業)을 완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촉한을 민부국강(民富國强)하게 만들고 실력을 증강시켰어야 했다. 다만, 제갈량은 '감정적으로 일처리 했다' 선제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리고 유비의 '탁고(託孤)'의 중임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북벌을 주장하고 계속 출병(出兵)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성과(成果)도 거두지 못하고 촉한을 '기울게' 만들어 삼국 중 가장 먼저 멸망(滅亡)의 심연에 빠지게 만든다.
셋째, 제갈량은 천시, 지리, 인화를 몰랐다. 전략적으로 보면 제갈량이 일으킨 북벌은 '북도중원(北圖中原), 흥복한실(興復漢室)"의 대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실로 사소하게 볼 수 없는 멸국(滅國)의 조치이다. 그러므로 '천시', '지리', '인화' 세 가지 방면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을 때 시행해야 한다. 소위 '천시'라는 것은 적국에 이미 퇴폐(頹廢)의 추세가 나타났거나 혹은 내란으로 국세가 흔들려야 한다. 다만 위나라는 당시에 정권이 안정되고 사마의는 '충성'스럽게 조위(曹魏)를 보좌하고 있었다. 소위 '지리'는 병력과 물력이 웅후(雄厚)하고 적국을 공격하는 것을 지탱해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망(滅亡)시킬 때처럼 다만 당시 제갈량(諸葛亮)은 그저 피곤하게 병사들을 멀리 원정 보내는 것이고 고립된 부대로 적국의 깊이 침입(侵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번 양식(糧食)이 떨어져서 퇴각해야 했다. 소위 '인화(人和)'는 약간의 전투를 잘하는 맹장과 모신이 서로 잘 화합(和合)해야 한다. 다만 당시에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무장은 위연(魏延) 한 사람뿐이고 모신은 없었다. 이 몇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失敗)할 수밖에 없었다.
비교해서 말하자면 사마의(司馬懿)는 천하의 전체적인 국면을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把握)하고 있었다. 그리고 추세(趨勢)를 따라서 행동할 줄 알았고 절대로 역행(逆行)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맹목적(盲目的)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천하에 분쟁(紛爭)이 끊이지 않고 국면이 불명확한 때 그는 가볍게 어느 편에 서지를 않았고 여러 번 조조(曹操)의 요청을 거절한다. 나중에 조조가 점차 세력을 얻고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號令)하자 사마의는 적시에 나선다. 그는 심계(心計)에 뛰어나고 조조가 자신을 불신(不信)한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일을 열심히 한다. 마침내 조조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사마의는 아주 분명하게 자신이 뭘 하려고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는 제갈량(諸葛亮)과 대치할 때 촉도난(蜀道難)으로 물자운송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 끌기'의 전략을 쓴다. 천천히 제갈량을 말려 죽인 것이다.
삼국후반부를 읽으면 발견할 것이다. 한 영웅(英雄)이 물러나는 동시에 사마의(司馬懿)는 계속 무대의 전면에 나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광망(光芒)은 계속 커지고 심지어 나중에는 모든 사람을 초월(超越)한다. 기실 한 사람의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를 보려면 세 가지 중요한 참고요소(參考要素)가 있다. 하나는 심시도세(審時度勢)이다. 소위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俊傑)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소위 남을 잘 아는 자가 지혜(知慧)로운 자이고 자신을 잘 아는 자가 총명(聰明)한 자이다. 스스로 몇 그릇의 밥을 먹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상대방이 몇 그릇의 밥을 먹을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셋째는 수기응변(隨機應變)이다. 소위 기회를 봐서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 구체적(具體的)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후 일체는 시간과 장소를 조건으로 바꾼다. 이 세 가지 방면으로 보자면 사마의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절대다수의 영웅호걸(英雄豪傑)들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삼국시대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나타나지만 그들은 모두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마의(司馬懿)가 완성할 수 있었다. 만일 '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이다'는 논리에 따른다면 사마의는 승리자(勝利者)이다. 절대적인 승리자이다. 부끄럽지 않은 영웅이다. 그의 승리는 간단하게 운이라는 요소로 분석할 수 없다. 그는 확실히 천하통일(天下統一)의 재능과 모략을 가졌다. 확실히 남보다 뛰어난 점이 많았다. 확실히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할 가치(價値)가 있는 것이 많았다.
3.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시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일대위인 모택동(毛澤東)은 이렇게 말했다. "일이 어렵고 쉽고는 일이 큰지 작은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기(時期)에 있다. 시기가 되지 않으면 헛수고이고 아무런 득이 없다." 제갈량(諸葛亮)이 어떤 목적에서 북벌(北伐)을 하였건 그가 발동한 시기는 심각(深刻)하게 잘못되었다. 즉 그가 북벌을 발동한 조건은 성숙되지 못했고 그래서 성공(成功)을 거두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마의(司馬懿)는 재능이 출중하고 뜻이 높고 크며 대세를 파악(把握)했을 뿐 아니라 시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먼저 사마의는 "은인고수(隱忍高手)"이다. 사마의는 재능과 지혜가 남달랐다. 다만 초기에 조조(曹操)의 수하로 일을 할 때 계속 겸손(謙遜)한 저자세였고 날카로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조 같은 간웅(奸雄)조차도 그는 속여 넘긴다. 이를 보면 사마의의 은인(隱忍)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나중에 조조가 사망(死亡)하자 그는 기회를 잡아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조비의 중용(重用)을 받는다. 다시 그 후에 제갈량(諸葛亮)과의 싸움에서 그는 더더욱 '인(忍)"을 극치로 발휘한다. 끝까지 나서서 싸우지 않고 제갈량을 말려죽였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 승리(勝利)한다. 사마의의 일생은 "인"자를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로 운용(運用)한다. 확실히 참는 것 하나로 하늘을 열었다.
사출기산(四出祁山)을 예로 들어보자. 231년(건흥9년) 촉군이 제4차 북벌을 개시한다. 위군의 총사령관 사마의(司馬懿)가 맞이해 싸운다. 사마의는 제갈량(諸葛亮)이 이끄는 부대의 기세가 아주 강한 것을 보고는 그 날카로움을 상대하기 어렵겠다고 판단(判斷)한다. 동시에 이렇게 추측(推測)한다. 촉군은 멀리 원정을 왔고 군량미(軍糧米)가 부족하다. 그래서 "염군의험(斂軍依險)" 군대를 거두고 험준한 지세에 의지한다는 계책(計策)을 쓴다. 부대에게 방어권(防禦圈)을 축소하도록 명령하고 험준(險峻)한 형세에 기대어 군영을 차리고 전투하러 나서지 않는다. 제갈량은 속전속결(速戰速決)하고 싶었는데 사마의가 수비만 하고 나서서 싸우려 하지 않자 사병들에게 매일 위나라군영 앞으로 가서 욕을 하며 도전(挑戰)한다. 격장계(激奬計)로 출병하게 하려한 것이다. 위나라장수들은 촉나라군대의 모욕(侮辱)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위나라의 명성(名聲)에 해가 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위군의 사기를 꺾는다고 여겼다. 차라리 제갈량에게 한번 힘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면서 계속 은인자중(隱忍自重)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았다. 자신이 지리적인 우세(優勢)를 점하고 있고 "급히 서두르는 사람에게는 천천히 대응(對應)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단 촉군의 군대에 기세(氣勢)가 약해지고 군량미가 부족하게 되면 반드시 퇴각(退却)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위군은 싸우지 않고 이기게 되는 것이다. 과연 유월이 되자 촉군의 양초(糧草)가 부족하게 되고 제갈량은 할 수 없이 철군명령(撤軍命令)을 내린다.
다음으로 사마의는 기회를 기다리는데 고수(高手)이다. 234년 봄 이월 제갈량(諸葛亮)은 촉군 10만 명을 모아서 다시 전국의 병력을 다 모아 북벌(北伐)을 진행한다. 육출기산(六出祁山)이다. 오장원(五丈原; 지금의 섬서성 미현 서쪽)에 군영을 차린다. 사마의(司馬懿)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친히 주력군(主力軍)을 이끌고 먼저 위하를 건넌다. 그리고 강안에 군영을 차린다. 높은 누대를 쌓아서 촉군과 대치하는 형세를 이룬다. 사마의는 종합적(綜合的)으로 분석한 후 역시 이일대로(以逸待勞) 즉 편안히 앉아서 기다리면서 멀리서 피곤하게 행군해온 적군을 상대하는 전략(戰略)을 쓴다. 그렇게 하여 촉군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져서 퇴경(退境)할 때 다시 기회를 잡아 출격하기로 한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런 수비만 하고 싸우지 않은 전략에 일찌감치 대비책(對備策)을 세워두었다. 이전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하여 그는 교묘(巧妙)한 계책을 쓴다.
묘책 하나: "군민대생산(軍民大生産)" 일부 병사를 뽑아서 밭으로 보낸다. 그리고 농민(農民)을 도와서 농사를 지어준다. 사람들에게 장기간 주둔(駐屯)할 생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묘책 둘, 욕을 한다. 사병을 위군 군영 앞에 보내어 북을 치며 소리치게 한다. 욕을 해대는 수법(手法)을 쓴 것이다. 촉나라병사들이 욕을 하는 식으로 도전(挑戰)하는 것에 대하여 사마의(司馬懿)의 수하들은 속속 분을 참지 못한다. 이는 위나라에 큰 치욕(恥辱)이라고 여기고 속속 주먹을 쥐고 흔들며 돌진해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사마의는 엄히 명령을 내린다. "여러 장수들은 군영(軍營)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진지를 굳게 지켜라. 본장군의 명령이 없이는 모두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
묘책 셋, 전서(戰書)를 보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제갈량(諸葛亮)은 계속 사마의(司馬懿)의 군영에 사자를 보내어 전서(戰書)를 전달한다. 양군이 교전(交戰)할 시간과 장소를 약정할 것을 요구한다. 매번 사마의는 가볍게 회신(回信)한다. 하늘을 얘기하고 땅을 얘기하는데 전투에 대한 것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백여 번 오고가면서 쌍방의 서신(書信)은 산더미처럼 쌓인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싸움은 한 번도 붙지 않는다. 서로 대치(對峙)하는 국면을 타파(打破)하기는 어려웠다.
묘책 넷, 사마의(司馬懿)에게 여자 옷을 보낸다. 마지막으로 제갈량(諸葛亮)은 하나의 묘계(妙計)를 생각해 낸다. 사람을 시켜서 사마의에게 여자 옷을 한 벌 보낸다. 조소(嘲笑)와 멸시(蔑視)로 사마의를 분노하게 만들려는 것이고 그가 나와서 싸우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의는 재상(宰相)의 뱃속에는 배를 저을 수 있어야 한다. 여자 옷을 거두고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연회를 베풀어 제갈량의 사자(使者)를 대접한다. 그리고 주석에서 "전쟁에 관한 일은 꺼내지도 않는다." 그저 공명의 "기거(起居)와 일의 번간(繁簡)"만을 묻는다. 사자의 말에서 제갈량의 병이 위중(危重)하다는 중대한 비밀을 알아낸다. 사후에 사마의(司馬懿)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제갈량은 "식사를 적게 하고, 일은 많으니, 어찌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
나중에 사마의(司馬懿)는 과연 제갈량(諸葛亮)을 말려죽인다. 234년 팔월, 54세의 제갈량은 큰 뜻을 완전히 펴지 못한 유감(遺憾)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제갈량의 사망은 장기간 국사(國事)에 머리를 쓰고 일이 생기면 직접 처리하고 지나치게 과로한 탓이다. 그래서 유진등고(油盡燈枯) 즉 기름이 다하면 등불이 꺼지는 결과가 초래(招來)된 것이다. 동시에 육출기산(六出祁山)이 순조롭지 못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사마의가 "싸우지 않고 방어만 하는" 전략 하에 제갈량은 위군을 물리칠 여하한 기회(機會)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더욱 초조(焦燥)해하고 침식(寢食)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결국은 한을 품고 죽어야 했다. 사마의는 기다리는 것을 가지고 승국(勝國)으로 이끈다. 기다리는 것으로 승리의 과실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병법"이다. 절대로 '상책(上策)'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마의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고수이다. 사마의는 은인(隱忍)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소극적인 은인이 아니다. 소극적인 은인으로는 아무 것도 못 이룬다. 그는 이상이 있는 살미이다. 그는 은인하는 와중에 역량을 축적(蓄積)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기회를 찾았다. 도광양회를 하면서 스스로를 키운 것이다. 도광양회는 재능을 숨기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실 사마의(司馬懿)는 바로 "도광양회"와 "유소작위(有所作爲)"를 노화순청(爐火純靑)까지 운용한 대단한 인물이다. 은인과 기다림은 이상을 실현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자질(資質)이다. 사마의는 절대로 기분대로 일처리하지 않았고 그는 시국을 판별(判別)했고 인심을 읽었고 사태를 관망(觀望)했으며 참아야할 때는 참았고 참으면서도 기회를 기다렸다. 참으면서 심지(心志)를 단련했다. 참으면서 전략과 전술을 기획(企劃)했으며 자신의 목표의 성공률을 높여갔다.
조방(曹芳)이 황제에 오른 후 조상(曹爽)과 사마의는 공동으로 보정이 된다. 조상은 대권을 독점하고자 사마의(司馬懿)를 배척한다. 사마의는 표면적으로 회피하며(韜光養晦) 암중으로 권력탈취를 위한 준비(有所作爲)를 한다. 정시9년(248년) 겨울 조상의 심복 이승(李勝)이 형주자사가 된다. 조상은 그에게 사마의에게 하직인사를 한다는 명목(名目)으로 그의 동정을 살피도록 시킨다. 사마의는 일찌감치 이승이 오는 이유를 알았고 병이 든 것처럼 위장(僞裝)한다. 이승을 만났을 때 그는 두 시녀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고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 뜻은 목마르다는 말이었다. 시녀는 죽 한 그릇을 가져와서 그에게 먹였다. 사마의는 한편으로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입 한쪽으로 죽이 흘러내렸다. 그리하여 가슴까지 다 젖는다. 이승은 이런 장면을 보고 연민(憐愍)의 마음이 들어 이렇게 말한다. "듣기로 예전 풍질(風疾)이 다시 도지셨다는데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사마의는 말을 매우 느릿느릿하게 해야 겨우 숨을 제대로 쉬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듣기로 병주(幷州)의 관리로 간다면서 거기는 오랑캐와 가까운 곳이니 몸조심 하시게." 이승이 말한다. "저는 병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형주(荊州)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마의는 못 알아들은 척 하면서 헛소리를 한바탕 한다. 이성은 다시 큰 소리로 설명했고 그제야 사마의가 알아들었다. 그는 말한다. 너는 형주에 자사로 가는구나. 내 생각에 나는 이제 얼마 못 갈테니 이번이 아마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 생사의 이별(離別)을 하는 것이니 나는 나의 아들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를 너와 친구로 사귀게 하고 싶다. 그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었다. 그 모습이 아주 처참(悽慘)했다. 이승은 돌아간 후 조상에게 사마의의 모습을 보고하고 조상은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늦춘다. 나중에 사마의는 조상이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정변(政變)을 일으켜 대권을 빼앗는다.
4.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인재전략을 잘 알았다.
삼국역사에서 제갈량(諸葛亮)은 인재를 배양하는데 뛰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촉국은 후기에 인재가 결핍(缺乏)되어 패망하게 되었다는 견해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지고 있다. 반대로 위나라의 후기를 보면 인재가 많았다. 이는 위나라 후기에 중심역할(中心役割)을 한 사마의(司馬懿)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사마의는 '교련형 지도자'이다. 그는 인재배양에 능했고, 특히 자신의 후계자를 기르는데 뛰어났다.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는 이로 인하여 진나라로 통일하는 기초를 세우게 된다.
지도자의 여러 가지 풍격 중에서 "교련형 지도자"는 날로 사람들의 존경(尊敬)을 받고 있다. 지도자의 임무중 하나는 부하를 배양(培養)하는 것이다. 좋은 부하를 배양하려면 먼저 반드시 부하에게 단련할 플랫폼을 제공해야 하고 그의 발전에 책임(責任)져야 한다. 다음으로 부하의 장점을 살려서 세심하게 지도해야 하며 그의 성장에 책임져야 한다. 그다음으로 부하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그가 상승(上昇)할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사마의(司馬懿)는 이 몇 가지 방면에서 아주 잘 해냈다.
제갈량의 육출기산(六出祁山)에서 전략목표는 아주 간단했다. 중원을 공격하여 함락(陷落)시키고 조위(曹魏)를 멸망시키며 한실(漢室)을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사마의(司馬懿)의 전략목표는 복잡했다. 첫째는 촉군의 진격(進擊)을 막아내야 한다. 둘째는 역량을 축적(蓄積)하여 조위를 대체해야 한다. 셋째는 병력을 길러서 기회(機會)를 보아 천하를 통일해야 한다. 이런 다중적인 성격의 전략목적(戰略目的)은 사마의로 하여금 현상을 유지하게 만드는 평형전략(平衡戰略)을 세우기 한다. 한편으로 제갈량(諸葛亮)이 큰 우세를 점하는 것을 막아서 위나라와 자기에 대하여 치명적(致命的)인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제갈량을 완전히 궤멸(潰滅)시켜서는 안 된다. 제갈량의 공격력은 보존(保存)시켜주어야 했다. 만일 제갈량이 철저히 무너진다면 사마의는 역대공신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희극적인 운명을 반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상을 대표로 하는 사마의의 적대세력(敵對勢力)은 계속하여 날로 강해지는 사마씨 가족을 없애버릴 기회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사마의는 실전에서 인재를 훈련(訓練)시키는 것을 중시한다. 오,촉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기반(基盤)을 마련한 것이다. 다만 매번 소전투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장군과 사병을 보내어 참여하게 했다. 실전을 통하여 장병(將兵)을 단련시킨 것이다. 실전(實戰)을 통하여 군대를 기르면서 성공적으로 전투력(戰鬪力)이 뛰어난 군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제갈량의 모든 일에서 권한(權限)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스타일과 달리, 사마의는 전체국면을 장악(掌握)한 상황 하에서 부하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주었다. 위나라후기에 오나라와 촉나라를 멸망(滅亡)시킨 대장 곽준(霍峻), 왕창(王昶), 등애(鄧艾) 등은 모두 사마의가 기산전투에서 직접 배양하고 발탁(拔擢)한 인재들이다. 이는 나중에 오,촉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군사인재측면에서의 대비(對備)가 된다.
사마의는 자기의 수하 겸 사업의 계승자인 사마사와 사마소에 대하여 더욱 실천과 단련을 중시(重視)한다. 매번 출정할 때마다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들에게 전쟁터에서 구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피와 불, 생과 사의 단련(鍛鍊)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시범(示範)을 보이고 직접 가르친다. 이는 몸소 시범을 보여서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갈량(諸葛亮)을 보면 비록 아들을 가르치는데 신경을 썼고 ‘계자서(誡子書)’ 같이 천고에 유명한 문장을 남겨서 아들을 교육했지만 제갈량은 아들 제갈첨(諸葛瞻)에게 이런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가 실전을 통하여 단련하도록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촉을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등애(鄧艾)가 부현(涪縣)으로 진격할 때 상서랑 황숭황숭 (黃崇)은 제갈첨의 병력을 따라 부현으로 간다. 대군이 여기에서 배회(徘徊)하고 망설이며 적시에 전진하지 못하자 황숭은 여러 번 제갈첨에게 신속히 진격하여 험요(險要)한 지세를 선점해야한다고 권한다. 그렇게 하여야 상대가 사천의 평탄(平坦)한 지역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제갈첨은 여전히 망설이며 결정(決定)을 내리지 못한다. 황숭은 이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痛哭)한다. 등애가 진격해 들어오자 제갈첨은 등애와 면죽(緜竹)의 평원에서 회전(會戰)을 벌이고 전쟁터에서 전사(戰死)한다.
사마의(司馬懿)는 수하를 훈련시키는데 방법이 있었다. 국면을 그가 통제(統制)할 수 있는 범위 내일 때 대담하게 권한(權限)을 내려 보내어 수하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준다. 그렇게 하여 수하로 하여금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게 한다. 그리고 수하가 실행(實行)할 때 세심하게 지도한다. 수하가 자신의 생각에서 잘못된 부분과 장애(障礙)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서 생각을 넓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수하의 능력과 소질(素質)을 제고시킨다. 249년, 사마의는 조상(曹爽)이 성을 나서 능에 제사지내는 틈을 타서 거사를 일으켜 조상을 타도(打倒)한다. 전날 저녁 그는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를 밀실로 불러 세 사람이 진지하게 상의(商議)한다. 끝난 후 그는 두 아들에게 돌아가서 휴식(休息)을 취하라고 한다. 그리하여 기운을 유지(維持)하도록 해서 다음 날 대전을 준비하게 한 것이다. 그 후 사마의는 심복(心腹)을 찾아서 그로 하여금 두 아들을 감시(監視)하게 한다. 대사를 치르기 전에 두 아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한 것이다. 그 결과 큰아들 사마사는 코를 골면서 잠을 잔다. 아주 양호한 심리적인 자질(資質)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휴식을 잘 해서 다음 날 병력(兵力)이 모일 때 아주 기운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은 아들 사마소는 심리가 그렇게 강대(强大)하지 못했다.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다음 날 확실히 정력(精力)이 부족한 것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사마의는 부대검열 때 큰아들을 칭찬하며 말한다. "이 아들은 됐다." 이를 보면 사마의는 수하와 후계자(後繼者)를 배양하는데 특히 심리적 자질(心理的資質)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그는 두 아들의 서로 다른 특징(特徵)과 장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임무를 부여(附與)했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發揮)하게 해준다. 가정전투(街亭戰鬪)에서 사마의는 군영(軍營)을 차린 후 둘째아들 사마소가 마음씀씀이가 세심하고 모략(謀略)에 능하다는 특징을 알아서 사마소를 파견하여 군영을 정탐(偵探)하게 한다. 사마소는 축군이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간 것을 보고 산을 포위(包圍)하여 수원을 끊자고 건의한다. 그리하여 촉군 병사는 싸우기도 전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난다. 만일 사마의가 대담하게 배양(培養)하지 않았더라면 사마소는 이렇게 군사적 재능(軍事的才能)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제갈량(諸葛亮)과 사마의(司馬懿)는 삼국시대에 일대효웅(梟雄) 조조의 뒤를 잇는 두 명의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들 둘의 대결에서는 사마의가 완승(完勝)을 거둔다.
천지인 삼자가 합일하고 화합하는 삼원인 정월 대보름의 유래와 풍속 (0) | 2021.10.18 |
---|---|
무예신보(武藝新譜)의 '18가지 무예'를 지칭하는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 (0) | 2020.09.15 |
방통과 제갈량은 똑같은 명성을 가졌지만 삼국지는 왜 방통을 저평가했는가? (0) | 2020.08.26 |
삼국시대 제갈량의 무덤과 가족들 그리고 4명의 자녀에 대한 내력 (0) | 2020.08.26 |
제갈량과 조조 그리고 적벽대전은 실제 역사적 재현인가? (0) | 2020.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