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荊州)의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제갈량과 방통 중 누가 정확했을까?
제갈량(諸葛亮)의 융중대(隆中對)에서는 형주(荊州)에 대하여 "북거한면(北據漢沔), 이진남해(利盡南海)"라고 하면서 그 땅의 주인인 유표(劉表)는 지킬 능력이 없어 하늘이 유비(劉備)에게 준 자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방통(龐統)은 이렇게 말한다. "형주황잔(荊州荒殘)" 이미 이곳을 차지한다고 하여 정족지세(鼎足之勢)를 만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누군가 이를 근거로 방통(龐統)이 형주를 더욱 정확하게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형주는 도대체 부유(富裕)한 땅인가 아니면 황량한 땅인가? 혹은 방통과 제갈량 중 누구의 말이 더 맞았을까?
한 사람이 한 말이 정확한지 여부(與否)를 따지려면 반드시 당시의 언어 환경(言語環境)과 결합해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한 말을 명확(明確)히 하려면 반드시 그 말을 했을 때 형주(荊州) 당시의 상황이 어떤지를 봐야 한다.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를 본 것은 건안12년(207년)이다. 당시의 형주는 어떤 상황(狀況)이었을까?
초평원년(190년) 유표는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임명된다. 그는 현지 호족(豪族)의 지지를 받으며 금방 형주7군을 장악(掌握)한다. 그는 동탁토벌(董卓討伐)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평3년 동탁이 피살(被殺)될 때까지 그는 여전히 동탁의 부장(副將)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형주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안전(安全)했다. 그래서 많은 민중과 저명한 인사들이 형주로 피난(避難)을 온다. 그중에 비교적 유명한 사람으로는 왕찬(王粲), 배잠(裴潛)등이 있다. 제갈량(諸葛亮)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위개(衛凱)의 말을 빌리자면 관중(關中) 한곳에서만 "인민이 형주로 유입된 경우가 10만여 가이다." 이를 보면 형주가 얼마나 흥성(興盛)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건안원년(196년)부터 유표가 통치하는 형주는 전후로 다음과 같은 전쟁을 벌인다. 북부에서 장수(張繡)와 양성(穰城)전투, 강남에서 내부인 장선(張羨)의 장사(長沙)전투, 남부에서 교주의 변방마찰, 그리고 동남부에서 황조(黃祖)와 손씨 정권의 방어 작전 등이다. 이들 전투는 모두 형주(荊州)의 중심지역에서 진행된 것은 아니고 규모에서도 아주 크지는 않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안정(安定)된 환경의 형주가 얼마나 부유했을지는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제갈량(諸葛亮)은 유비(劉備)에게 "천지소이자(天之所以資)" 하늘이 준 자산이라고 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형주와 제갈량이 말한 또 다른 익주(益州)를 제외하면 천하는 기본적으로 모두 잔결지지(殘缺之地)이다. 군대가 이리저리 오가고 얼마나 많은 전투(戰鬪)와 죽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제갈량이 말한 이것은 하늘이 유비에게 준 자산(資産)이라고 한 것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건안12년(207년), 조조(曹操)는 유표를 정벌하고 유표(劉表)는 죽는다. 그의 아들 유종(劉琮)은 투항한다. 유비는 유종이 투항(投降)한 것을 모르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는 이미 완성(宛城)에 도착했다. 유비(劉備)는 창졸간(倉卒間)에 당하다보니 할 수 없이 남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고 당양(當陽)에 이른다. 이주하는 인구가 이미 십여만 명을 달한다. 조조는 유비(劉備)가 강릉성(江陵城)을 점거(檢擧)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친히 부대를 이끌고 빠르게 추격(追擊)한다. 하룻밤 만에 유비를 따라잡는다. 전투를 한판 벌이고 유비는 전멸(全滅)한다. 할 수 없이 수십 기를 이끌고 도주(逃走)한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군대는 전선이 불에 탔을 뿐 아니라 군대도 전염병(傳染病)에 걸렸다.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앞을 다투다가 쓰러지고 짓밟혔다. 그리하여 군대는 사상자(死傷者)가 아주 많이 나온다. 주유(周瑜)는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그가 이릉(夷陵)의 포위를 풀고 난 후에 강릉성(江陵城)은 외로운 성이 되어 버린다. 성을 지키고 있던 조인(曹仁)을 불러내기 위하여 조조(曹操)는 전후로 여러 부대를 파견(派遣)한다. 이들 부대는 후방에서 전방(前方)으로 가는 것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들은 관우(關羽)의 강력한 저지를 받는다. 1년여의 쟁탈전(爭奪戰)을 거쳐 조인이 마침내 철수(撤收)하고, 강릉성은 주유가 점령(占領)한다. 주유는 남군태수가 되었다. 유비는 원래 공안(公安)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지방이 너무 적다는 것을 핑계로 손권에게 형주를 빌리겠다고 청하여 손권(孫權)의 동의를 받는다. 이렇게 하여 주유가 죽은 후, 유비는 형주의 남군 및 강남4군을 차지한다. 이때 형주는 실제로 갈기갈기 찢겼다. 강하(江夏)는 동오(東吳)가 점령하고 북부의 남양(南陽)은 조조가 가졌다.
한 곳이 외부에서 전투(戰鬪)를 벌이게 되면 더 많은 것은 인력과 물력의 소모(消耗)이다. 그러나 내부의 전투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소모되면서 생산에 큰 파괴(破壞)를 가져온다. 인원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군인 중 사상자(死傷者)가 나올 뿐 아니라 많은 백성들도 사망한다. 위에서 유비(劉備)가 당양(当陽) 장판파(長坂坡)에서 실패한 예에서 유비가 이끄는 군대만 전멸(全滅)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많은 사상자를 낸다. 설사 백성들의 사상자는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이주(移住)하고 다시 이주했다. 이것은 생산에 대한 파괴이다. 그래서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이미 형주(荊州)는 갈기갈기 찢겼다. 이제는 피폐(疲弊)한 땅이 된 것이다. 방통(龐統)이 말한 바는 정확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유비(劉備)는 형주가 이미 파괴된 것을 몰랐을까? 기실 방통(龐統)이건 제갈량(諸葛亮)이건 그들이 형주를 얘기한 것은 모두 유비를 설득(說得)하기 위함이다. 유비에게 취사선택(取捨選擇)을 물은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한 것은 형주(荊州)는 부유하고 주인이 지킬 수 없으니 기회를 봐서 차지하라는 것이고 이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방통(龐統)이 말한 것은 형주는 이미 파괴(破壞)되었으니 이곳에 의지해서 정족지세(鼎足之勢)를 만들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익주(益州)를 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 되었고 시급하게 진행해야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의 형주(荊州)에 대한 견해는 모두 틀리지 않았다. 원인은 여건(與件)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부환경(外部環境)은 계속 변화하고 사람의 인식도 외부사물(外部事物)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제갈량 같은 명성을 가졌지만 삼국지에서 저평가된 방통
방통(龐統)은 유비(劉備)가 수경선생(水鏡先生) 사마휘(司馬徽)로부터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둘 중 하나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삼국시대 제갈량(諸葛亮)과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실제 삼국지에서는 방통(龐統)의 명성(名聲)보다는 저평가(低評價)되었다. 또한 그렇게 제갈량(諸葛亮)과 겨룰 정도의 사람이었는데도 조조(曹操), 손권(孫權) 모두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유비(劉備)조차도 수경선생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방통(龐統)이 스스로 찾아왔음에도 그를 높이 중용(重用)하지 않고 시골 동네의 현령으로 발령을 내었다.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하며 어렵게 모셔온 것과는 너무 대조(對照)되는 장면이다. 유비(劉備)의 입장에서는 제갈량을 얻었기에 이미 천하를 자신이 얻을 수 있다고 판단(判斷)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방통(龐統)이 손권(孫權)이나 조조(曹操)의 수하에 들어갔었다면 이 또한 유비 입장에서는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님에도 그는 방통을 너무 가볍게 대했다.
어찌 됐건 유비(劉備)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방통(龐統)이 뇌양현(耒陽縣) 현령(縣令)으로 발령(發令)을 받는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유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를 수용(受容)했다는 것이다. 이는 삼국지연의에서도 손권(孫權)을 떠나면서 노숙(魯肅)에게 이미 마음은 유비에게 가 있는 상태를 은근히 내비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시 후한 말의 상황에서는 어떤 인재(人才)를 자신의 휘하(麾下)에 두느냐에 따라 명운(命運)이 엇갈리는 상황이었다. 특히 조조(曹操)의 경우에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재를 얻고자 수단(手段)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수경선생(水鏡先生)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 그의 노모를 볼모로 하여 자신이 보호(保護)하고 있다는 핑계로 그를 부른 일이나 사마의(司馬懿)가 한사코 관료 자리를 사양할 때에도 그를 겁박(劫迫)하여 자신의 수하에 들인 일들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방통(龐統)만은 예외였다. 그의 명성이 제갈량(諸葛亮)과 같았음에도 왜 그를 천거(薦擧)하지 않았을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대체적으로 그 이유가 그의 외모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도 외모지상주의(外貌至上主義)를 문제 삼지만 그 당시에도 외모가 인재 등용(人才登用)에 중요한 요소였나 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推測)일 뿐 실제 방통의 외모가 못생겼다는 역사적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어찌 됐건 방통(龐統)이 제갈량에 비해서는 볼품이 없었나 보다. 제갈량(諸葛亮)이 훤칠한 키에 호남형의 얼굴이었던 반면 방통은 첫인상부터 호감(好感)을 주지 못하니 그와 대면하는 것 자체가 부담(負擔)스러웠을 수 있으며 그가 어떤 말을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좋은 묘책(妙策)을 내논다 할지라도 ’니까 짖게 뭘 안다고‘ 하는 식으로 치부(置簿)했을 수도 있다.
방통(龐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고을 현령의 자리에서 유방(劉邦)의 군사로 발탁(拔擢)되고 난 후였다. 방통이 제갈량(諸葛亮)만큼 뛰어난 지는 그의 삶이 너무 짧게 끝나서 비교(比較)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단지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유비가 촉땅을 얻어 천하삼분(天下三分)의 지형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방통(龐統)의 별호는 봉추(鳳雛)였는데 봉황(鳳凰)의 새끼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학식도 뛰어났으며 정세를 바라보는 혜안(慧眼) 또한 뛰어나 일찍이 제왕(帝王)을 모실 사람으로 알려졌었다. 사실 천하삼분론(天下三分論)을 주장한 것은 제갈량(諸葛亮)이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겨 결실을 맺게 한 인물은 방통이었다. 방통이 익주(益州)를 얻을 것을 유비(劉備)에게 제안하여 유비가 익주(益州)를 얻음으로써 명실공히 삼국의 틀을 갖출 수 있었다.
방통(龐統)과 제갈량(諸葛亮)은 어려 면에서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제갈량이 교과서적인 전략과 완벽주의적(完壁主義的)인 성격을 지녔던 반면 방통은 이와 달리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전략 수립(戰略樹立)을 통해 싸움을 이끌었다. 어찌 보면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전략과 전술의 달인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제갈량이 지피지기(知彼知己) 전법으로 상대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통해 작전을 수립하고 싸움을 전개했다면 방통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임기응변식(臨機應變式)의 전술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계책(計策)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방통(龐統)이 즉흥적(卽興的)이지는 않았다. 그가 익주(益州)를 얻을 때 유비(劉備)에게 상, 중, 하의 계책을 내세웠던 것은 그가 다양한 전술을 구사(構思)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한 가지 계책을 갖고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대방(相對方)과 자신의 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 계책 중 가장 합리적(合理的)이며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여 승리(勝利)하였다는 것이다.
정석적인 제갈량(諸葛亮)의 전략과 상대의 허를 찌르는 방통(龐統)의 전략은 서로 대조(對照)되었다. 사실 제갈량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계획안에 상대가 따라오지 않으면 진전(進展)이 없었다. 그 예가 유비(劉備) 사후 유선(劉禪)에게 출사표(出師表)를 던지고 북벌을 위해 싸움에 나갔지만 사마의(司馬懿)와의 전투에서 번번이 수성(守城)만 하는 그를 물리치지 못한 것이다. 만약 방통(龐統)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의 계획을 수정(修整)하여 새로운 전략으로 상대를 제압(制壓)하지 않았을까? 마치 익주를 탈환(奪還)할 때 유비에게 제시한 3가지 계책처럼 다양한 전술(戰術)을 부리며 그 상황을 돌파하지 않았을까?
제갈량(諸葛亮)이 큰 그림을 그린다면 방통(龐統)을 그 그림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마치 장량(張良)이 큰 그림을 그리고 한신(韓信)이 이를 실행에 옮겼던 한나라 건국 초기와 다를 바 없었다. 방통이 조금 더 오래 살면서 제갈량과 전략적(戰略的)으로 서로 결합하여 유비(劉備)를 도왔다면 마지막 패자(霸者)는 유비가 되었을 수 있다. 제갈량과 방통의 결합(結合)은 천하를 얻기에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방통(龐統)이 죽은 이유가 삼국지에서는 자만심과 제갈량(諸葛亮)에게 공을 빼앗길까 봐 서두르다 변을 당했다고 하지만 실제 방통(龐統)이 죽은 곳은 낙봉파(落鳳坡)가 아니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기며 걸어가는 제갈량의 성품과 달리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문제를 해결(解決)해 가는 방통의 성격상 죽음의 위험요소(危險要素)는 더 많이 있었던 거 같다.
주군(主君)의 마음을 헤아리고 제왕과 비책(祕策)을 논하는 등 때론 유화적(宥和的)이며 변화무쌍한 전술로 상대를 농락(籠絡)했던 방통(龐統)이지만 이른 나이에 죽음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블라인드 리더로서 보여준 삶은 요즘 시대를 살아갈 때 임기응변식(臨機應變式)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자신마저 위험한 상황(狀況)으로 모는 일은 피해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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