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왜 밥을 먹는가?”와 같은 우문(愚問)이다. 밥 먹고 술 마시고 배설(排泄)하고 자고 일어나고 걸어가고 말하고 호흡(呼吸)하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나 자신의 삶의 방식(方式)이며 수십 년 키워온 습관(習慣)이다.
글쓰기는 살아가는 생(生) 그 자체이다. 왜 글 쓰는가? 반문자체가 무의미(無意味)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글은 써야 하고 써내려가야 하므로 그저 쓴다. 따라서 상상(想像) 속의 요물(妖物)같이 가끔 나의 사색을 유혹(誘惑)할 때가 있다. 그 유혹에 빠져 무작정 글을 쓴다.
나의 글쓰기는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때 반급 작문 짓기에서 1등을 했다. 아마 그때부터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것 같다. 좀 커서 나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호흡(呼吸)처럼 글을 써 간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나 방법이 아니라 생존(生存) 바로 그 자체이다.”
그리고 낙서에 비유(比喩)하면서 글쓰기를 설명(說明)한다. “조금 슬프다는 이유(理由)로, 조금 괴롭다는 이유로, 조금 심심하다는 이유로 나는 가끔 흰 종이 위에 낙서(落書)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일기(日記)가 되기도 하고 잡문(雜文)이 되기도 하고 수필(隨筆)이 되기도 한다.
무턱대고 하루 일상(日常)의 숙제(宿題)처럼 쓰기만 했다. 봐줄 사람 없어도 좋았다. 이렇게 종이에다 독백(獨白)하면서 나는 계속 생각하고 그리고 쓸 것이라고 명언(明言)했다.
모든 사물(事物)을 자판기로 낙서하는 것이 나의 글이다. 나는 늘 이렇게 공언(空言)한다. 그러면서 글을 돈으로 저울 질 하는 SNS과 블로그에 참된 내용(內容)과 의미를 제거(除去)해 버린 되는 대로의 글을 아무렇게나 마구 끄적거린다.
글의 품질(品質)과 내용이 없는 글쓰기를 낙서처럼 해왔다. 모종(某種)의 의미에서 나 자신의 글은 일종의 허식(虛飾)이다. 인터넷 시대의 ”파워 블로거” 자체가 바로 ‘불행아(不幸兒)’라고 간주한다.
나는 가끔 홀로 있으면서 이런 사색(思索)에 빠져보곤 한다. 누구의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문장대가(文章大家)들을 본받아서 글쓰기 실력을 늘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대가들의 문풍(文風)을 배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죽어도 흉내 낼 것 같지 못하다.
글쓰기 자체가 바로 외로움이다. 내가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그냥 글이랍시고 쓰고 또 쓴다. 그리고 내가 쓴 것이 글이 맞는지를 수없이 되뇌기도 한다. 물론 대답부터 말하면 No다. 물론 글쓰기 밑천이 없으니 조건(條件)도 딸린다. 글을 쓰려면 생활 체험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초급학생처럼 문법(文法)과 문리(文理)를 차근차근 깨우치면서 그동안 쌓은 체험(體驗)을 짬짬이 써 내려가야 한다.
세상과 격리(隔離)된 집구석은 “감옥(監獄)”이 아니면 “낙원(樂園)”이다. 감옥(監獄)으로 생각하는 의식을 나는 우선 뇌리 속에서 제거(除去)해 버린다. 그 누구의 감시도 간섭(干涉)도 관심도 모든 거추장스러운 고독(孤獨)의 장벽(障壁)을 제거 해 버린 낙원(樂園)에서 나는 글쓰기생활을 재미있게 즐기면서 해야겠다.
나의 낙서 글을 읽어주는 사람 하나 없다. 나의 배설(排泄) 같은 글에 관심(關心)두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나”가 있다. 그 “나”가 나의 유일한 충실한 독자(讀者)가 되어준다. 물론 이 독자가 읽어주지 아니해도 상관(相關)없다. 있어 주는 것만으로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慰安)한다.
흔히 말하는 도피생활(逃避生活)로 인해 나는 지고 무상(至高無上)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 그 대처의 처방으로 자기의 통치와 자기에 향한 배려를 위안으로 삼았다. 자신에 향한 배려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언어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언어는 감옥(監獄)도 없고 법원(法院)도 없고 타자(他者)도 없는 “집구석”의 지경(地境)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알몸 같은 뇌리 속을 바라보면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또 이런 상념(想念)에 이른다. “집구석”과 절대적 “낙원”은 그 역설적 의미에서 결국은 너무 자유로워서 두려운 자유로운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내면의 진실함을 추구하는 언어를 찾은 다음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이 “집구석”의 낙원을 탈출(脫出)하여 자신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인간사회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절박감을 꼭 이룩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같은 환경에 오래 눌러 있으면 그 자체가 사상을 죄이는 “감옥”이 된다. 흐르지 않는 썩은 물같이 온갖 해로운 병균을 발생시키는 온상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가 집구석을 탈출하는 이유는 충분히 주어져있다. 수많은 타자들이 사는 인간의 사회에서 타자와 대화를 나누며 나를 개변시키고 또 사회에 무언가 흔적을 남긴다.
내가 글 쓰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상정(常情)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정신적 구원, 변함의 방식을 추구 하고자 한다. 따라서 화자로서의 내가 던진 글들이 다른 사람의 반응이 있으면, 그것만으로 나는 의식했던, 또는 무의식했던 모종의 것이란 단어를 쓰고, 목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나는 굳이 목적을 필요하기 보다는 이 자체가 모종의 생활방식인 까닭에서였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나는 글쓰기를 일개인의 언설적(言說的) 발설이라 생각한다. 그 글이 다른 사람이 읽어도 안 읽어도 상관없다. 나는 글쓰기가 어떤 제약된 관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이 읽히고 많은 독자의 공명(共鳴)을 일으키거나 매료(魅了) 된다면 글쓰기의 망외(望外)일뿐이다.
물론 내가 쓰는 글, 그 많은 글들은 사회를 향한 나 자신의 넋두리, 타령이고 낙서로 양산 한다. 좀 문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知的)생산의 글이 대중에게 수용되든 안 되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나는 글쓰기만 하는 정신제품(精神製品)의 생산자이다. 계란을 낳는 암탉이다. 계란이 맛있으면 잡수시고 맛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독자들의 평판(評判)은 자유이지만, 저자를 과도하게 탓하는 일은 독자의 권한을 벗어난 “배려”이다.
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지식의 폭넓은 글쓰기에 대해서 담론 할 때, 왜 글 쓰는가? 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금수문장(錦수文章)을 써 내려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짓이고, 모종 체제에 발라맞추기 위한 것으로 작용했다면 그것은 죽은 글이다. 아니 살아서 독해를 뿌리는 최고의 악문이 된다. 지식인의 사명이 있다하면 나는 진실을 쓰고 진실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참된 사명의 제1위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고백하여 나는 그런 평가들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다. 왜냐면 나는 오로지 독서하고 사색하고 글쓰기로 꽉 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끝날 내가 아니다. 왜 글을 쓰는가? 의 물음에 준비된 답은 “탈옥하는 글쓰기”이다. 비좁은 울타리가 아닌, 개인 한계적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다문화의 취지를 내걸고 행해지는 “사실주의”라는 글쓰기. 이는 나의 숙명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나 내가 하는 일은 거시적 시야를 통 털어 첫 번째 일일뿐만 아니라, 진부하고 척박한 문화 풍토 속에서 항상 거의 첫 보습을 들이대는 작업이 된다. 나는 이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글을 쓰고 또 쓰게 지탱해 준다. 또 하나 내가 배짱 있게 주장(主張)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짱짱한 배짱과 주장은 다방면적인 학문만이 키워줄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밥 먹는 것과 같은, 숨 쉬는 것과 같은, 심장이 박동(搏動)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배설(排泄)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적는 나의 글쓰기의 목적(目的)이기도 하다.
이 말은 “왜 밥을 먹는가?”와 같은 우문(愚問)이다. 밥 먹고 술 마시고 배설(排泄)하고 자고 일어나고 걸어가고 말하고 호흡(呼吸)하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나 자신의 삶의 방식(方式)이며 수십 년 키워온 습관(習慣)이다.
글쓰기는 살아가는 생(生) 그 자체이다. 왜 글 쓰는가? 반문자체가 무의미(無意味)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글은 써야 하고 써내려가야 하므로 그저 쓴다. 따라서 요지경(瑤池鏡) 속의 괴물(怪物)같이 가끔 나의 사색을 유혹(誘惑)할 때가 있다. 그 유혹에 빠져 무작정 글을 쓴다.
나의 글쓰기는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때 반급 작문 짓기에서 1등을 했다. 아마 그때부터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것 같다. 좀 커서 나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호흡(呼吸)처럼 글을 써 간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意味)나 방법이 아니라 생존(生存) 바로 그 자체이다.”
그리고 낙서에 비유(比喩)하면서 글쓰기를 설명(說明)한다. “조금 슬프다는 이유(理由)로, 조금 괴롭다는 이유로, 조금 심심하다는 이유로 나는 가끔 흰 종이 위에 낙서(落書)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일기(日記)가 되기도 하고 잡문(雜文)이 되기도 하고 산문(散文)이 되기도 한다.
무턱대고 하루 일상(日常)의 숙제(宿題)처럼 쓰기만 했다. 봐줄 사람 없어도 좋았다. 이렇게 종이에다 독백(獨白)하면서 나는 계속 생각하고 그리고 쓸 것이라고 명언(明言)했다.
모든 사물(事物)을 자판기로 낙서하는 것이 나의 글이다. 나는 늘 이렇게 공언(空言)한다. 그러면서 글을 돈으로 저울 질 하는 SNS과 블로그에 참된 내용(內容)과 의미를 제거(除去)해 버린 되는 대로의 글을 아무렇게나 마구 끄적거린다.
글의 품질(品質)과 내용이 없는 글쓰기를 낙서처럼 해왔다. 모종(某種)의 의미에서 나 자신의 글은 일종의 허식(虛飾)이다. 인터넷 시대의 ”파워 블로거” 자체가 바로 ‘불행아(不幸兒)’라고 간주한다.
나는 가끔 홀로 있으면서 이런 사색(思索)에 빠져보곤 한다. 누구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문장대가(文章大家)들을 본받아서 글쓰기 실력을 늘려 보려고 했다. 그러나 대가들의 문풍(文風)을 배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죽어도 흉내 낼 것 같지 못하다.
글쓰기 자체가 바로 외로움이다. 내가 하루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그냥 글이랍시고 쓰고 또 쓴다. 그리고 내가 쓴 것이 글이 맞는지를 수없이 되뇌기도 한다. 물론 대답부터 말하면 No다. 물론 글쓰기 밑천이 없으니 조건(條件)도 딸린다. 글을 쓰려면 생활 체험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초급학생처럼 문법(文法)과 문리(文理)를 차근차근 깨우치면서 그동안 쌓은 체험(體驗)을 짬짬이 써 내려가야 한다.
세상과 격리(隔離)된 집구석은 “감옥(監獄)”이 아니면 “낙원(樂園)”이다. 감옥(監獄)으로 생각하는 의식을 나는 우선 뇌리 속에서 제거(除去)해 버린다. 그 누구의 감시도 간섭(干涉)도 관심도 모든 거추장스러운 고독(孤獨)의 장벽(障壁)을 제거 해 버린 낙원(樂園)에서 나는 글쓰기생활을 재미로 즐기면서 한다.
나의 낙서 글을 읽어주는 사람 하나 없다. 나의 배설(排泄) 같은 글에 관심(關心)두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나”가 있다. 그 “나”가 나의 유일한 충실한 독자(讀者)가 되어준다. 물론 이 독자가 읽어주지 아니해도 상관(相關)없다. 있어 주는 것만으로 괜찮다고 스스로 위안(慰安)한다.
흔히 말하는 도피생활(逃避生活)로 인해 나는 지고 무상(至高無上)의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 좋다. 그 대처의 처방으로 자기의 통치와 자기에 향한 배려를 위안으로 삼았다. 자신에 향한 배려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한 언어 그것이라고 주장(主張)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언어는 감옥(監獄)도 없고 법원(法院)도 없고 타자(他者)도 없는 “집구석”의 지경(地境)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알몸 같은 뇌리 속을 바라보면서 가능(可能)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또 이런 상념(想念)에 이른다. “집구석”과 절대적 “낙원”은 그 역설적(逆說的) 의미에서 결국은 너무 자유로워서 두려운 자유로운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내면의 진실함을 추구(追求)하는 언어를 찾은 다음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이 “집구석”의 낙원을 탈출(脫出)하여 자신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인간사회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절박감(切迫感)을 꼭 이룩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같은 환경(環境)에 오래 눌러 있으면 그 자체가 생각을 죄이는 “감옥(監獄)”이 된다. 흐르지 않는 썩은 물같이 온갖 해로운 병균(病菌)을 발생시키는 온상(溫床)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내가 집구석을 탈출(脫出)하는 이유는 충분히 주어져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인간 사회에서 사람들과 대화(對話)를 나누며 나를 개변시키고 또 사회에 무언가 흔적(痕跡)을 남기고 싶다.
내가 글 쓰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상정(常情)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정신적(精神的) 구원, 변화(變化)의 방식을 추구 하고자 한다. 따라서 화자(話者)로서의 내가 던진 글들이 다른 사람의 반응(反應)이 있으면 힘이 된다. 반응만으로 나는 의식했던 또는 무의식했던 모종의 것이란 단어를 쓰고 거기서 위안을 느낀다. 효과(效果)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나는 굳이 효과를 필요(必要)하기 보다는 이 자체가 모종의 생활방식인 까닭에서였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글쓰기를 일개인의 언설적(言說的) 발설이라 생각한다. 그 글이 다른 사람이 읽어도 안 읽어도 상관없다. 나는 글쓰기가 어떤 제약(制約)된 관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이 읽히고 많은 독자의 공명(共鳴)을 일으키거나 매료(魅了) 된다면 글쓰기의 그저 망외(望外)일뿐이다.
물론 내가 쓰는 글, 그 많은 글들은 사회를 향한 나 자신의 넋두리, 타령이고 낙서로 양산(量産) 한다. 좀 문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知的)생산의 글이 사람에게 수용(受容)되든 안 되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나는 글쓰기만 하는 정신제품(精神製品)의 생산자이다. 계란(鷄卵)을 낳는 것은 암탉이다. 계란이 맛있으면 잡수시고 맛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독자들의 평판(評判)은 자유이지만, 과도하게 탓하는 일은 독자의 권한(權限)을 벗어난 “배려와 관심”이다.
글에 한정(限定)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식의 폭넓은 글쓰기에 대해서 담론 할 때 왜 글 쓰는가? 물어보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主張)한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금수문장(錦수文章)을 써 내려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거짓이고 모종 발라맞추기 위한 것으로 작용(作用)했다면 이미 죽은 글이다. 아니 살아서 독해(毒害)를 뿌리는 최고의 악문(惡文)이 된다. 글쓰는 사람의 사명(使命)이 있다면 진실을 쓰고 진실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는 것이 참된 사명의 제1위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고백(告白)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는 평가(評價)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다. 왜냐면 나는 오로지 독서(牘書)하고 사색하고 글쓰기로 꽉 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끝날 내가 아니다. 왜 글을 쓰는가? 의 물음에 준비된 답은 “탈옥(脫獄)하는 글쓰기”이다. 비좁은 울타리가 아닌 개인 한계적 문화의 경계(境界)를 뛰어넘어 다방면의 취지(趣旨)를 내걸고 행해지는 “다문화적(多文化的)”이라는 글쓰기가 나의 숙명(宿命)이다.
거창(居昌)하게 들릴지 모르나 내가 하는 일은 거시적 시야(視野)를 통 털어 첫 번째 일일뿐만 아니다. 나의 진부(陳腐)하고 척박(瘠薄)한 문화 풍토 속에서 항상 거의 첫 보습을 들이대는 작업이 된다. 나는 이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글을 쓰고 또 쓰게 지탱(支撑)해 준다. 또 하나 내가 배짱 있게 주장(主張)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짱짱한 배짱과 주장(主張)은 다방면적인 학문만이 키워줄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밥 먹는 것과 같은, 숨 쉬는 것과 같은, 심장이 박동(搏動)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배설(排泄)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적는 나의 글쓰기의 목적(目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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