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방문자에게 내가 쓴 문장을 이해시키고 터득(攄得)시킬 것인가? 내 나름대로 알기 쉽게 읽고 느끼게 하는 이해에 필요한 감정을 주입하려고 수없이 심사숙고(深思熟考)를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장을 어떤 논리의 전개방식(展開方式)으로 진행하고 또 문장의 내용과 성격을 어떻게 부각하고 펼쳐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심층적(深層的)으로 분석을 밝히기가 생각보다 그리 간단치 않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문장이란 진실적으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말과 글로 표현할 때 완결된 내용을 나타내게 됩니다. 따라서 삶의 희로애락, 희망과 좌절, 활기와 실의로 점철(點綴)되는 인간의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일관하게 자신이 생활해왔던 경험과 교훈에 대한 상징적(象徵的)인 수법을 표현해 한 사회에 따라 한 문화에 따라 그리고 한 시대에 따라 애절한 노래일수도 있고 눈물의 서정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보다는 생활이라는 삶의 원초적(原初的)인 생명을 구가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문장에서 도저히 남들의 추종(追從)을 불허하는 나만의 특유필법에서 칼럼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장르의 여러 편 글들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점들은 지금까지도 풀 수없는 수수께끼입니다. 무엇보다도 칼럼은 지성과 감성의 배합(配合)입니다, 자기 고백적이며 방관자적인 고찰을 갖추어야 한다는 데서 나만의 칼럼들은 거의 완미(完美)의 수준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칼럼은 무형식적(無形式的)이며 전문적인 사람만 쓰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런 이론과 내가 오늘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는 일련의 칼럼들은 일치해야 합니다. 다만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나 격차(隔差)가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인지는 앞으로도 계속 남아있게 될 과제일지 모릅니다.
한 방문자가 나의 글에 대한 인상담(印象談)을 부탁하셨는데 시간상 관계로 세세히 설명은 못 드린 점 사과하겠습니다. 다만 여러 방문자 분들이 이 글을 터득하는데 이해의 도움을 드릴까 하는 마음에서 몇 자만 적어보겠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도 나만의 지성적(知性的)인 면과 은근하면서 수식이나 과장 없이 솔직한 인품이 잘 나타나는 아주 독특하며 재치를 과시하는 좋은 칼럼이었다는 점은 넉넉하게 수긍(首肯)이 가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몇 편의 칼럼들과 함께 연관시켜보면 이것이 곧 나만의 칼럼세계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부분에서 지성과 감성의 조화가 어긋나는 부분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특히 감성적인 데에 괴리(乖離)를 느끼게 만드는 부분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방문자들에게 나만의 감성은 뜨겁고 강렬하고 웅변적(雄辯的)으로 나가는데 그것이 문장 속에서 지성과 조화를 이루어내는데 무슨 문제냐고 반론(反論)하겠습니다.
나는 나 나름대로 그 원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최근에 몇 편 글들에서 관념(觀念)이나 주장하고 싶은 메시지에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수단에 의해 접근한 흔적(痕迹)이 자주 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식으로 받아들인 것을 충분히 소화한 상태가 되어야 관조(觀照)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데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이것은 자족(自足)이지 지족(知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메시지를 너무 강하게 신랄(辛辣)한 표현을 써서 남을 설득하려고 한 흔적이 뚜렷합니다.
이상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때 나는 내가 내세운 칼럼 이론과 나의 문장, 즉 실질적인 것에 상당한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강렬하게 느꼈던 것은 칼럼형식 영역에서 칼럼은 무엇이나 담을 수 있는 용기라는 사실이며 나는 이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동안 보여주셨던 대부분의 칼럼들이 무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나 다룰 수 있고 어디에서든 끌어들여서 할 수 있는 자유분방(自由奔放)함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칼럼이 서정적인 것이 많다고 한다면 전통적으로 서양의 에세이는 메시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인 문제의식(問題意識)을 담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동안 중국에서 동양문명(東洋文明)과 함께 지낸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론적으로 나의 글을 어느 장르의 글로 확실하게 구분해야 할지도 고민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칼럼과 산문의 정의에서 많은 학자들도 혼란(混亂)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방문자들의 이 방면에서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적어도 이번 칼럼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문장의 단락을 보면 해탈은 글 속의 실제의 해탈이 아니고 상상속의 해탈을 의미합니다. 사람이란 삶을 영위하는 도중에 그냥 어떤 관점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매듭을 일종의 암시로 끝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탈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미 해탈하였거나 또는 해탈을 시도하고 있는 상상의 몸을 한데 통 털어 삶의 내음이 묻어나는 사유의 실재를 재현(再現)시켜 놓은 것입니다. 흔히 사람의 이런 생각을 가리켜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나 느낌. 또는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이라고 표현 했는가 하면 ’사리를 따져 분별하고 판단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설명이 성립(成立)되는 것은 해탈을 꿈꾸는 사람은 해탈이라는 꿈의 색소침체가 깊어가고 있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안타까움과 당황스러움입니다. 또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과정을 해탈로 표현해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처럼 형상성 재치를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부분을 동양문학에서는 칼럼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해봅니다. 해탈 도중에 색소침체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의 생각을 가리켜 꿈의 사유가 나왔다는 어마어마한 표현을 해놓았으면서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고 정서와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국문학에서 경수필(輕隨筆), 또는 서정수필, 연수필(軟隨筆) 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동양문학으로 분류하면 반드시 칼럼이나 산문이라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칼럼이란 말은 정격(正格)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내용에 있어서 객관적 진리와 무게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자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목적(目的)으로 하는 것으로 독자를 자극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늦추게 하는 글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논문처럼 무엇을 증명(證明)하거나 어떤 결론에 도달하여 작자의 주장을 독자에게 설명 설득하려고 굳이 고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나의 최근 창작하고 있는 칼럼 같은 산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관한 창작수법(創作手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감추는 것만큼 벗겨보고 싶고 눌리는 것만큼 튕겨보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심상은 거기에서의 ‘해탈'입니다. 이 경악할 만큼이나 충격적인 문장 속에 글로 투시(透視)되어 있다고 했으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봄에 꿈을 꾸고 여름에는 상상하고 가을에는 고뇌합니다. 그럼 당연히 겨울에는 이 모든 것에서 해탈하게 됩니다.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성장(成長)하고 가을에 무르익고 겨울에 죽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 우리네 무정한 인생입니다. 어찌 보면 불쌍하기만 한 생명입니다.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르고 인생 끝에 와서 마지막 남은 그 인생의 옷자락을 잡고 즐기고 싶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일 년 사시절 봄으로부터 가을까지 계속 순환(循環)하지만 다시 오는 봄은 원래의 봄이 아닙니다. 지나간 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상기해보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봄에 꿈꾸고 여름한철 내내 상상에만 골몰(汨沒)하면서도 죽어라고 몸부림치는 인생, 삶을 즐길 줄 모르고 무언가 지키려고 지나간 그 나날들을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한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가을의 옷자락을 잡고 살려달라고 고뇌(苦惱)에서 벗어나기에 너무 서툴렀던 '나'에게 애원(哀願)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래도 악을 써봅니다. 오히려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남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 지나간 인생에 대한 미보(弥补)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봅니다.
천지가 들썽하도록 쿵쿵 뛰는 심장소리는 인생의 절주(節奏)입니다. 소리 하나에 인생의 한 발자국입니다. 쿵쿵하는 소리도 날이 갈수록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그만큼 세월의 흐름속에 노화가 되어 에너지가 그만큼 소모(消耗)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길도 한 걸음 나아가면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쿵쿵 소리만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얼마 남았는가 하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누구나 후회 없는 일생을 살기엔 다만 그 내디디는 한발자국 마다에 충실(忠實)하게 열심히 내디뎌야만 되는 것이 아닐까 거듭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이미 그것은 가을을 타는 내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어 내 발에 활기를 주는 손짓이 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희망을 찾아 그 손짓을 따라 이 가을을 넘어 겨울에서 봄으로 계속 드팀없이 가야겠다는 즐거운 유혹에 빠져있습니다. 물론 유혹(誘惑)은 언제까지나 나만을 한(限)한 유혹일 따름입니다. 희망은 말 그대로 나만의 희망일 따름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새 희망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 희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서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나 너나 다 불쌍한 인간의 삶입니다.
언어학자라면 이 문제를 놓고도 긴 문장을 지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저 이 두 단어의 근본적인 차이를 말한다면 전자는 보다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의성어(擬聲語)이고 후자는 보다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를 표현하는 의성어(擬聲語)이라고 설명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처음으로 인생에 임하는 청춘의 긴장한 심태를 잘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단어 하나로써 작자는 생명에 대한 약동(躍動)과 삶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는 인생에 대한 마지막 배려(配慮)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방면으로 화자의 약간 긴장한 심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또 새것에 임한 화자의 극락(極樂)의 경지에 이르는 격정을 재치 있게 암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작자는 해탈을 꿈꾸는 화자(話者)의 상태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심리적인 사유에 대한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줄곧 정신 상태에 대한 조명(照明)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쉽게 보아낼 수 있습니다. 읽는 이들은 이 칼럼의 마지막 몇 단락을 잘 읽어보면 마치 환각상태에서처럼 해탈경지(解脫境地)에 이른 화자의 청각적 ,시각적 이미지가 그려져져 있으며 또 상상적 이미지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보아낼 수 있습니다.
해탈을 꿈꾸는 상태에서 화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천당(天堂)의 황홀한 광경이 아니며 명승지의 절승경개가 아니며 또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지속상태에서 체험한다는 절세의 미녀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다는 환각이 아니며 동양 사람들이 동방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대도시 어느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농경 문화적(農耕文化的)인 동경 즉 내가 멀리 고향에 두고 온 그러한 향토적 풍경이며 흙냄새가 싱그럽게 풍기는 고향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칼럼의 주제를 확대(擴大)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바 나에게 있어서 해탈의 경지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정신경지(精神境地)는 언제나 짙은 향수(鄕愁)와 끈끈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에 대한 암시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장 속에서 내가 노린 기본주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향의 농경문화적인 풍경이나 고향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 모두 우선 향토적 삶의 현장에 대한 산문적인 재현이고 내적 미에 도달한 화자의 육신과 정신의 원상태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의 재현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방문자에게 내가 쓴 문장을 알기 쉽게 터득(攄得)시키는 요령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문장이란 우선 방문자를 감화시키는 주제를 설정하고 내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내공을 키워야 합니다. 좋은 글은 꼭 좋은 영향을 일으켜 보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바람직하게 변화시키는 작용한 놉니다. 아마 이런 것을 일컬어 좋은 글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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