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다문화시대(多文化時代)라 그런지 번역에 대한 질문이 많아서 참고가 될까 해서 단천(短淺)한 소견을 담아 올립니다. 우선 번역에 이론공부를 하기 전에 오늘은 번역가로서의 자질, 태도, 예절, 교제, 소통 등 지켜야 할 규칙을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조금씩 번역공부(飜譯工夫)를 하는 중이라 어쩌면 여러분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저어되기도 합니다.
먼저 예를 들어 한 고객이 번역가(翻譯家)를 찾고 있다고 합시다. 당연히 온라인에서 신뢰할 만한 번역가를 찾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미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사람, 자신의 강점과 경험을 조리 있게 그리고 자세히 제시해 둔 사람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수준이 비슷한 서너 사람으로 대상을 압축(壓縮)했을 때, 그 고객은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게 될까요? 그때는 자신의 ‘감’을 따를 것입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믿음이 가는’ 혹은 ‘왠지 맘에 드는’ 사람이라는 식일 것입니다. 마치 그 사람을 여러 번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겠지요. 그리고 여러 번 만난 것 같은 그런 ‘감’이 오는 사람을 선택(選擇)할 가능성이 높을 것은 당연한 겁니다.
여러분이라도 모르는 사람을 신뢰(信賴)할 수 없을 겁니다. 사실 제 말 자체가 모순되지만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신뢰하겠습니까? 모르면 당연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신뢰를 하든지 말든지 하죠. 그럼 상대방을 알려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접근하십니까? 우선 한번 만나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만나서 악수를 하고(觸覺) 얼굴을 보고(視覺) 대화를 하면(聽覺) 일단은 어느 정도 상대방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거래도 하고 협력도 하고 결혼도 하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대면 접촉은 인류가 아주 오랫동안 사용해온 신뢰 구축 방법, 아니 실은 유일한 신뢰 구축(構築) 방법입니다. 갑자기 인터넷 시대가 되었고 사람들의 의사소통이 온라인으로 대폭 옮겨갔다고 해서 우리 속에 깊이 박힌 ‘신뢰’ 프로세스마저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어느 번역가와 어느 고객이 아주 오랫동안 서로의 필요에 따라 다소 피상적(皮相的)인 의사소통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별 사건사고 없이 그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번역가와 고객은 최소한 상대방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더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 하는 거죠.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충족(充足)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 동안의 거래를 통해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신뢰는 있겠지만 그 관계가 더 깊은 신뢰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요약(要約)하자면 온라인으로 일을 하는 자유계약(自由契約) 번역가에게도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 구축을 위한 노력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비즈니스에서 장기적으로 신뢰를 구축해나가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온라인으로 일하는 프리랜서 번역가는 어떻게 처음 만나는 고객 혹은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온 고객에게 신뢰를 얻어 나갈 수 있을까요? 온라인으로 만나는 사람과 신뢰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과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과 그 본질(本質)이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아래에서는 온라인으로 만나는 고객과 어떻게 장기적인 신뢰를 구축해 나갈 수 있을지를 어느 정도 순서에 따라 나열(羅列)해 보겠습니다.
최소한 프로필에 사진은 올려 두어야 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비록 실제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이름과 얼굴을 서로 연결할 수 있도록 프로필에 사진을 올려 두는 일은 기본(基本) 중의 기본일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장차 고객이 될 사람에게 내 얼굴조차 보여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외모(外貌)가 초라한 저도 사진은 올려 두었습니다.
공식적인 정보(情報)는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사진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상대방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첫 걸음에 불과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한다면 나에 대해 상당한 정도는 손쉽게 알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공개(公開)하는 것이 꺼림칙하다면 최소한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 사는지(이런 정보는 실제로 일을 해 나가는 데 중요한 정보이기도 함), 나이는 대략 어느 정도인지, 어떤 경험이 있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정보는 프로필 페이지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요청(要請)하면 언제든 알려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괜찮습니다.
나를 정직(正直)하게 알려야 합니다. 프로필에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번역 잘 하는 사람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그런 자신감은 좋지만 그 자신감(自信感)이 실제와 다르다면 그런 과장은 결국 역풍(逆風)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오래 속이거나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고요. 실은 번역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을 오래 속이는 것도 아주 힘듭니다. 실력이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번역가로 살아가기 위해 세계 최고의 번역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뭔지, 그런 것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기준에서 그런 것을 정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특정 분야에 상당한 정도의 전문 지식을 갖추고 성실하게 노력(努力)하는 사람이면 된다고 봅니다. 자신을 그렇게 내세우고 그런 말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노력하는 편이 실력과 경험을 과장(誇張)하는 것보다 고객의 신뢰를 구축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프로필은 사람 냄새 나게 써야 합니다. 이건 한국 문화와 관련이 있는지 한국 사람들이 쓴 프로필은 도무지 프로필 같지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필이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강점(强點)이 무엇인지,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지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제시함으로써 나에게 꼭 맞는 고객이 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나를 선택해야 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가 읽어 본 프로필들은 마치 “나도 다른 사람하고 비슷하니까 너무 의심하지 말고 나를 써 보세요!”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프로필에서 상대방이 찾는 것을 보도록 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프로필은 결국 나만의 독특한 강점을 제시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는 문서이기 때문에 나만의 독특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프로필은 그저 수천 장의 다른 프로필들 속에 파묻히고 말 것입니다. 어리숙한 초보를 찾는 사기꾼이라면 관심을 가질지 몰라도 자신에게 꼭 필요한 사람, 자신의 독특한 필요를 채워줄 서비스 능력(能力)을 갖춘 번역가를 찾는 실제 고객에게는 전혀 흥미가 없는 그런 프로필이 되고 말겠지요. 그저 밀린 숙제하듯 프로필을 작성하지 말고 나의 독특성(獨特性)이 드러나는 프로필, 사람 냄새 나는 프로필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주 가끔은 얼굴을 보며 대화도 해보야 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일을 주고받는 프리랜서 번역가가 무슨 수로 그렇게 하나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은 아주 쉽습니다. 스카이프(혹은 비슷한 다른 서비스)를 이용하면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사람과도 쉽게 대면 대화(對話)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성격이 아주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먼저 대화하자고 제안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다보면 가끔은 이메일보다는 통화를 하는 것이 훨씬 나을 때가 꽤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고객이 제게 스카이프나 전화 통화를 하자고 하면 저는 흔쾌히 “지금 당장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실은 언제 한번 통화를 하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통화를 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잘 되었다” 그렇게 말해 줍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기회가 마땅치 않아 못 한 것이지 그토록 오랫동안 협업(協業)을 해 온 사람이라면 서로 궁금해지거든요. 그리고 그것 아세요? 그렇게 한 번 통화하고 나면 그 뒤부터는 이메일을 쓸 때 그 사람 얼굴이 또 오르고 그냥 얼굴 보지 않고 전화만 한 경우에도 그 사람 목소리가 기억이 나면서 훨씬 친근(親近)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 이메일 인사도 “Dear Mr. Smith”에서 “Hi John”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서로가 훨씬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고객과의 관계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희 집에 우편배달부가 소포를 들고 오면 그 사람은 저희 집 현관 이상 들어오지 못합니다. 현관(玄關)에서 용무가 끝나지요. 그러나 이웃이나 친구가 오면 거실까지 들어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뒤뜰에도 나가 볼 수 있고요. 그러나 2층에 있는 제 번역방이나 침실(寢室)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집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허락을 구하면 둘러볼 수 있도록 허락(許諾)이야 하겠지만 거기 머물지는 못하지요.
무슨 얘길 하고 싶으냐 하면, 번역가와 고객의 관계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고객에게 자기 사생활(私生活)을 떠벌리는 것은 부적절하고 현명(賢明)치 못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벌써 수 년 째 같이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고객과 마치 로봇처럼 딱딱하고 깍쟁이 같은 인사만 건넨다면 그것도 좀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저와 거의 10년째 거래를 하는 고객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제게 예고(豫告) 없이 전화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고객입니다. (참고로, 다른 고객들은 제게 전화를 할 수 없습니다.) 또 서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전화해서 부탁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서로 열심히 해결해 줍니다. 비록 얼굴은 아직 한 번도 못 본 사이지만 친구(親舊)처럼 지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고객은 거래를 시작한 지 한 5년 되었고, 그 고객사의 대부분의 PM과 e-mail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화는 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안 지 1~2년밖에 되지 않은 고객들과는 꽤 공식적인 말만 주고받는 편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서 거의 10년 동안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지냈는데 늘 판에 박힌 문구로 이메일만 주고받는다면 ‘이거, 내가 로봇과 일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오랜 역사가 있으니 작업 내용에 대한 신뢰는 할지언정 사람에 대한 정은 별로 가지 않겠지요. 그런 정도의 사이라면 무례(無禮)하지 않은 범위에서 자신의 실수(상대방의 실수에 대해서는 절대 안됨!)에 대해 사과와 더불어 농담(弄談)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약점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서로 신뢰하고 있다는 표지이니까요.
여러분이 신뢰할 만한 고객을 찾고 싶어 하듯이 고객들도 여러분이 신뢰할 만한 번역가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얼굴 없는 번역가 여러분 일단 얼굴부터 보여주시고, 여러분이 유령(幽靈)이나 로봇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이란 것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며 나아가 여러분이 존엄하고도 독특(獨特)한 번역가임을 다른 번역가들과 고객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처음에는 어색하고 조금은 두렵기도 하겠지만 여러분은 대단히 특별하고 소중(所重)하며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직업(職業)이라는 건 무엇이건 '빈 공간을 채워주는 일'일 거예요. 필요한 것이 있는 곳에 그걸 잘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먹고살기에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 빈 공간을 찾아내고 자기가 그것을 어떻게 잘 채울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고민해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解決)해줄지 궁리해서 상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단골'이 될 테죠. 단골을 많이 만들면, 일은 한결 수월해집니다. 그 다음은 신뢰를 지켜나가면 되는 것이고요. 이게 당연히 말처럼 쉽지 않지만요.
제가 해보니까, 어느 일이든 같더군요. 원리는 단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단순한 걸 자꾸 잊어버리고 더 쉬운 길만 찾으며 자기 단련을 게을리 해요. 자기를 단련하는 건 고(苦)되거든요. 지루하거든요. 사실은 단련을 반복해서 일정 단계에 도달(到達)했을 때 비로소 모든 게 물처럼 흐르게 되는 법인데. 번역가로서 성공(成功)하는 방법, 너무나 간단합니다. 첫째, 번역 잘하면 되고요. 둘째, 편집자들과 관계 잘 맺으면 돼요. 일정 관리도 여기에 들어가죠.
덧붙인다면, 번역만 잘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편집자(編輯者)들의 고민을 한걸음 앞서서 자기가 고민하고 그들의 고민(苦悶)을 하나라도 더 해결해준다면 더욱 사랑받는 번역가가 되겠죠. 더 나아가 최종 고객인 '독자(讀者)'의 필요까지 생각한다면 만점(滿點)일 테고요. 아주 단순하지만 그 단순한 걸 해내려면 자기 관리가 필수인데, 그게 어렵다 이거죠.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면 번역을 더 잘할까, 어떻게 하면 편집자를 더 잘 도울 수 있을까, 독자에게 필요한 게 뭘까, 이런 걸 생각하면서 실력(實力)을 갈닦으세요. 그러면 나머지는 술술 풀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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