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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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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옹이 생성 이유 및 생존 집념과 연륜에서 보는 삶의 흔적

사진 = 브런치

나무옹이는 어떻게 생겨날까요?
산에 자라는 나무에서 생성하는 옹이는 때로는 아름다운 무늬로 변할 수 있고 또 보기 싫은 흠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무옹이는 그 사용용도(使用用途)에 따라서 우점과 결점이 구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무옹이 생성 이유 및 생존 집념(執念)과 연륜(年輪)에서 보는 삶의 흔적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무는 많은 잎사귀를 생성하는데 대량의 영양소(營養素)를 만들어 생장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가지는 나무가 성장하는데 있어 중요한 생산기관(生産機關)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무는 생존을 위해 높은 곳을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競爭)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자꾸 더 높은 곳으로 자라면서 위쪽에 가지를 만듭니다. 결국 활발히 활동을 하던 아래쪽 나뭇가지는 몇 년 지나면 위에 있는 가지들에 밀려 피압(被壓)됩니다.

피압된 가지는 약한 햇빛만 받게 되므로 광합성(光合成量)이 적어지게 되고 나중에 잎이 줄어들어 죽고 맙니다. 그렇게 죽게 되면 자꾸 자라나는 줄기 속에 죽은 가지가 묻히게 됩니다. 끝은 잘려나가게 되고 가지의 밑동이가 줄기 속에 파묻히게 되는데 이런 죽은 가지 밑동이가 옹이가 됩니다. 그 옹이는 나무줄기에 붙어있는 가지가 남긴 흔적(痕迹)입니다.

나무에 옹이가 생기는 이유는 직경생장(直徑生長)을 위해서 더 많은 햇빛을 필요로 가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뻗어 나온 가지에서 생성된 잎이 햇빛을 흡수(吸收)하고 더 높은 곳을 생장하면서 위쪽에 가지를 계속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옹이는 생장을 위한 가지의 흔적입니다. 생태적으로 나무도 생존경쟁을 합니다. 결국 생존을 위해 밑에 있는 가지들은 위에 생긴 가지들에 밀려서 죽게 됩니다. 자라나는 줄기 속에 가지가 묻혀 죽은옹이가 됩니다. 

옹이는 산 옹이와 죽은옹이로 구별합니다. 산 오이는 가지가 말려든 것으로 주위 목질부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은 오이는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빠질 수 있습니다. 이밖에 썩은 옹이는 죽은옹이에서 일부 또는 전부가 부후균(腐朽菌)에 부후된 옹이를 말합니다. 빠진옹이는 죽은옹이에서 옹이가 빠져버린 것을 말합니다. 또 우리가 잘 모르는 숨은 옹이가 있습니다. 즉 목질부(木質部) 내부에 옹이가 숨어있다고 판단되는 옹이입니다. 숨은 옹이는 산옹이, 죽은옹이와 같이 재면에 나타나 보이지 않으나 돌출, 함몰 등 흔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산옹이, 죽은옹이, 썩은 옹이, 껍질박이가 포함된 옹이 빠지기 쉬운 옹이, 빠진옹이는 나무의 등급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따라서 강도(强度), 건조성(乾燥性), 기계가공성(機械加工性), 화학처리성(化學處理性), 도장성(塗裝性), 접착성(接着性) 등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다용도인 목재를 구조재로 사용할 때 옹이부분의 섬유는 수간 축과 직교(直交)하고 그 주면에서 줄기의 목부섬유(木部纖維)가 흐트러져 있으므로 강도저하의 인자(因子)가 됩니다. 특히 목재재면에서 중앙부에 있는 옹이에 비하여 목재의 가장자리에 있는 옹이가 강도저하(强度低下)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무의 가장자리, 중앙부 옹이 수종에 따른 차이를 살펴보면 주로 침엽수(針葉樹)와 활엽수의 옹이가 있습니다. 침엽수는 나무의 줄기에서 가지들이 사방으로 생깁니다. 그리고 활엽수(闊葉樹)는 나무의 줄기에서 생긴 가지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생깁니다. 이렇기 때문에 활엽수보다 침엽수에서 옹이가 더 많이 생깁니다. 침엽수에서 생성된 옹이의 경우는 활엽수보다 색이 더 진하게 생성됩니다. 이것은 수지(樹脂; 레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지나 레진(resin)이 없는 활엽수에서는 옹이가 색깔로 구분이 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옹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가지를 자르면 바로 상처가 치유되어 죽은옹이를 만들지 않습니다. 가능한 가지의 크기가 작을 때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 나무의 품질등급(品質等級)을 최대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사용해야 하는 목재에 이미 옹이가 존재한다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즉 옹이를 자른 후 집성하여 사용, 접착제(接着劑)로 옹이 다시 붙이기, 접착제로 옹이 틈새 메우기, 옹이 위치를 판재(板材)의 중간으로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늬로 보일 수 있는 옹이가 나무에서 왜 결점(缺點)이 될 수 있는지와 옹이의 종류(種類)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가구를 제조할 목재를 선택하실 때 용도에 맞춰 옹이를 확인하고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나무옹이의 상처는 흔적일까요? 영광의 흔적일까요?
변화가 심한 자연환경에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란 나무옹이는 그 성장의 상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옹이가 없는 무절 자재(資材)가 가장 좋지만 나무 상처인 옹이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나무의 특징과 용도를 감지(感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산에 가면 늘 미끈한 나무보다 아픔을 먹고 어렵게 자란 못생긴 나무에 더 정이 쏠립니다. 보잘것없는 못생긴 나무가 울창한 수림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릿해옵니다. 기암괴석(奇巖怪石) 험한 바위틈에 끈질기게 뿌리박은 소나무가 사람의 심혼(心魂)을 사로잡습니다. 

무성한 수림과 너무 대조적인 험준(險峻)한 바위 위에 척박하게 자란 못생긴 나무 한 그루, 사나운 비바람 속에 자라며 모진 눈보라를 견뎌냅니다. 그리고 구부정한 나무가 바위에 짓눌리어 억압(抑壓)된 모습이 애처롭게 안겨옵니다. 홀로 산을 지키는 나무는 바위하고만 벗하고 지잽니다.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아님을 잘 아는 옹이덩어리인 나무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살아갑니다.

못생긴 나무는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 찬 풍진세상보다도 청정한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아침이슬을 머금고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마음속에 묻어둔 청산도 드팀없이 지켜가고 있습니다. 아픔을 이기고 고통도 삼켜온 나무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천신만고를 이겨냅니다. 험한 바위 위에서 악착(齷齪)스레 자란 나무는 못생긴 그 양자(樣姿) 때문에 새들의 눈길을 더 많이 끕니다. 못생긴 나무는 잘생긴 형제나무들이 재목으로 베어져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비록 온갖 조소와 비방을 받아왔지만 차마 혈육의 정을 못 잊어 동정과 연민의 눈길을 바래주곤 하였습니다. 아, 못생긴 나무의 뜨거운 사랑이여, 이제야 당신의 깊은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산사나이는 사랑을 하지 말라고 하던 선인들의 얘기도 깡그리 잊은 채 이 산에 뿌리내리게 된 눈물겨운 이야기 속에서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말입니다.

이른 아침, 몽몽한 안개 속에서 깨여나는 모습도 보고 싶고 또 해살과 함께 밝아져오는 잎새의 흐느낌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또 속 깊은 곳에서 뭔가 꿈틀거리고 있는 태동의 움직임도 느끼고 싶습니다. 특히 가진 것 하나 없고 보잘것없는 못난 나무가 다른 나무들처럼 어엿한 자태도 없고 무성한 잎사귀도 없음에 장래의 동량(棟樑)이 될 자신 없는 슬픔의 목소리를 무척 듣고 싶습니다. 같은 소나무여도 평지의 소나무는 하늘로 곧게 뻗지만, 저 높은 산정(山頂) 절벽의 소나무는 이리 굽고 저리 굽어 살아갑니다. 묘하게 구부러짐은 그 소나무의 삶의 흔적(痕迹)입니다. 역경의 흔적입니다

산을 지키는 나무는 결코 잘난 나무가 아닙니다. 잘난 나무는 일찍 베여지지만 못난 나무는 못난 탓에 끝까지 남아 푸른 산을 지킵니다. 가물과 비바람을 먹으면서 허리 굽어진 못난 나무가 푸른 산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겨운가요. 나도 못난 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못난 나무가 없는 산은 골짜기가 없는 산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거기에는 오묘한 인생철리가, 처세묘리(處世妙理)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약삭빠르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직(正直)하게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깁니다. 자기들처럼 살지 못한다고 비웃습니다. 편하게 사는 방법이 있는데 모른다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들은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깁니다. 세상을 잘 사는 방법은 사람 나름에 달렸다고, 멋지게 사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 아니라고 은근히 자부심(自負心)을 내세웁니다.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세상물정에 젖지 않은 ‘바보’가 더 많을까요? 암투(暗鬪)와 시기(猜忌)가 살판 치는 지구촌에는 잘난 사람이 더 많은지도 모릅니다. 가령 ‘바보’들이 있다면 그냥 ‘멍청’스런 바보가 아닐 겁니다. 박학다재하고 명지하던 정판교(郑板桥)가 난득호도(难得糊涂)라는 절창을 내놓았을 때는 숙고(熟考)를 많이 하였을 겁니다. 스스로 어리석은 체 얼떨떨한 체 하는 사람은 바보일지라도 거룩한 ‘바보’들입니다.

저는 오늘도 못생긴 나무처럼 살아갑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살아갑니다. 제힘으로 변화(變化)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며 나의 못생긴 운명의 질그릇에 나름대로 캐어내는 정신적 보물(寶物)을 담으려고 정력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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