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 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눈물어린 인생고개 몇 고개이더냐
장명등이 깜빡이던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쓰린 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이 노래는 현인-유호-박시춘 콤비의 여러 히트작 중 초기인 1948년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당시 제목은 《비나리는.…》이란 옛 표기법이었고 작사가의 이름도 유호씨의 초기 필명인 “호동아”였습니다. 유호씨는 박시춘씨로부터 작사를 부탁 받은 후 서울 중앙방송국 (현 KBS) 도서관 벽에 걸려있던 커다란 한국 지도에서 “어머니를 돌아다본다”는 한자 (顧母)의 뜻을 갖고 있으면서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작은 고모역 (顧母驛)을 발견하고는 그에 맞춰 가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노래가 발표될 당시에 경부선으로 대구역에서 영천을 가노라면 경북 경산군 초입 (지금의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고모라는 역과 언덕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좁고 가파랐으며 일제 때는 징용으로 끌려가던 자식이 여기까지 따라오신 어머니의 손을 놓고 이별하면서 몇 번이고 돌아다보며 그만 돌아가시라고 손을 흔들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가사는 이렇듯 아쉽게 어머니와 헤어진 후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그리워하며 애달파하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991년에 <비내리는 고모령> 노래비가 이곳에 세워졌는데, 안타깝게도 이듬해에 이 노래비를 취재하다 열차를 피하지 못해 순직한 김문호 한국일보 사진기자 (당시 29세)의 불망비 (不忘碑)도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1969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고 (김희갑 문희 박노식 출연), 이 노래를 배호/주현미/장사익씨 등도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가요무대>에서 불려진 전체 순위 조사 (2005년)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와 《찔레꽃》에 이어 3위를 차지했지만, 고모역은 2006년 11월에 81년의 역사를 끝으로 폐쇄되어 아득한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현인 (본명: 현동주, 1919 ~2002) 선생님은 부산 출생으로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47년에 경주의 불국사를 배경으로 한 《신라의 달밤》으로 데뷔한 후, 《굳세어라 금순아》 《청포도 사랑》 《꿈 속의 사랑》 《럭키 서울》 《서울야곡》 《고향만리》 《꿈이여 다시 한 번》 《인도의 향불》 《베사메무초》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등을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건국 이후 노래를 음반으로 발표한 첫 번째 가수였기에 ‘대한민국 가수 1호’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답니다.
선생님은 다른 가수들과 달리 턱을 심하게 상하로 떨면서 소리를 내는 창법을 쓰셔서 사람들은 선생님이 부르신 《신라의 달밤》을 “시-이-인 라-예-에 다-아-알 빠-암-이-이-여~~”라고 장난기로 모창하곤 했지요. 선생님은 자신이 클래식 발성법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서 가요에 맞게 소리를 내기 위해 개발한 창법이었다고 합니다. 당뇨병이 심해져서 끝내 돌아가셨는데, 사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였던 부산 영도대교 남단에 동상과 함께 노래비가 세워졌습니다. 서수남씨가 딸 현혜정씨와 듀엣으로 활동하다 결혼한 사위였다는 사실은 (47)번 과수원길 편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유호 (1921 ~ 2019, 본명: 유해준) 선생님은 황해도 해주 출생인데, 군수와 부지사를 지낸 부친이 서울로 올라와 계동에 50칸이 넘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양조장과 금광으로 생활이 아주 윤택했습니다. 일본 제국미술학교 도안과를 수료하고 동양극장 미술부/문예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창작력이 뛰어나서 1945년 KBS 편성과로 옮긴 후 라디오 작가로 데뷔했고 국내 최초의 연속 낭독소설 <기다리는 마음>을 집필했습니다. 1949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입사했고 전쟁 중에는 육군본부 정훈국에서 근무했으며, 1954년 다시 경향신문사로 돌아와서 5.16 혁명으로 신문사가 폐간될 때까지 문화부 차장/부장을 거쳤습니다. 박시춘씨가 운영하던 럭키레코드사 문예부장을 겸직하기도 했는데, 6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라디오와 TV의 드라마를 집필하셨습니다. 60년대 후반에 TBC-TV에서 <일요 드라마>의 극본을 맡았다가 인기가 치솟자 국내 방송 사상 최초로 작가의 이름을 붙인 <유호극장>으로 개칭하고 5년간 총 250편을 방영한 기록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한운사/조남사 선생님과 더불어 방송작가 1세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1948년부터 박시춘 선생님과 짝을 이루어 유호 (兪湖, 맑은 호수라는 뜻)라는 필명의 작사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는데, 박시춘 선생님은 유호 선생님이 KBS에 입사할 당시 KBS 초대 경음악단장이었고 그 후 오래 작품활동을 같이 하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작권협회에 작사자로 등록된 총 63편의 노래 대부분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는데, 대표작으로는 《신라의 달밤》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이별의 부산 정거장》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무정 부르스》 《삼다도 소식》 《고향만리》 《낭랑 18세》 《서울야곡》 《아내의 노래》 《떠날 때는 말없이》 《맨발의 청춘》 《맨발로 뛰어라》 《종점》 《그늘에 핀 꽃이라》 《길 잃은 철새》 《남성 금지구역》 《몽땅 내사랑》 《산유화》 《선죽교》 《카츄샤의 노래》 《님은 먼 곳에》 《짚세기 신고 왔네》 등이 있습니다. 그 밖에 《전우야 잘자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전선야곡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같은 병영가요와 이흥렬 선생님이 곡을 붙이신 《진짜 사나이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도 선생님이 작사하신 곡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주제가도 많이 작사하셨는데, 《여옥의 노래 (불러도 대답 없는 님의 모습 찾아서…)》가 특히 유명합니다. 선생님이 지은 가사 중에는 유난히 지명(地名)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격동의 시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워낙 많은 곡을 만드신 박시춘 선생님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현인 선생님께서 부르신 (9)번 《꿈이여 다시 한 번》과 박시춘 선생님께서 작곡하신 《물새우는 강언덕》을 함께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 자료 제공 : sandjay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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