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一日之節在器 百年之節在志 器濫則出 志荒則醉(일일지절재기 백년지절재지 기람즉출 지황즉취)
하루의 절개는 그릇에 달려 있지만 백 년의 절개는 뜻에 달려 있다. 그릇이 넘치면 흘러나오지만 뜻이 거칠면 취하는 것이다. - 정약용(丁若鏞)『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다산 선생의 사소해 보이는 기물들을 바라보는 기발함과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 함께 느껴진다. 그 기발함과 애틋함이 그의 인생을 만들었을 터이다. 등잔걸이의 신세를 읊은 ‘등경명(燈檠銘)’, 파리채의 쓰임새를 읊은 ‘승불명(蠅拂銘)’, 담뱃대의 자세를 읊은 ‘연대명(煙袋銘)’, 술잔의 효용을 읊은 ‘고명(觚銘)’ 등등. 저마다 버림을 당하기도 하는 생이지만 귀한 존재임을 잊지 말라. 파리채는 파리를 잡는 것이 아니야, 잡지 말고 휘저어 쫓아라. 잘 쓰이되 먹히지는 말라. 한잔 술이 위안이 되겠지만 ‘결코’ 거칠어지지는 말라. 최소한의 원칙을 지키며 삶을 예찬하라. 우리의 날들은 이어지고(繼日), 하늘이 도울 것이니(補天)! 당신의 행운을 빈다!
다산초당의 주인장 정약이 혼자 웃으며 지었다는 독소 한 대목이 생각나게 만든다.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 걸(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그러나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깊은 산속에 살면서 거친 옷의 짚신을 신고 맑은 못가에서 발을 씻으며 고송에 기대여 휘파람을 분다."
천재 지식인이요 사상가였던 다산 정약용, 그에게서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다산이 꿈꾼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 낡은 조선을 새롭게 한다)’의 설계사무소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 영조 38~1836 헌종 2) 선생은 정적들에게 내몰려 사지에 겨우 목숨을 건져 전남 강진군에서 18년의 유배생활을 한다. 1801년(순조 1) 음력 11월, 그의 나이가 마흔이 되었을 때다.
1800년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노론 벽파들이 전권을 장악했다. 이듬해(신유년, 1801) 호시탐탐 노리던 노론 벽파 정적에게 정약종이 참수를 당했고 또 유배에 1802년에는 4살의 넷째 아들 농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그에게 상상을 초월한 시련을 맞는다.
유배생활은 그는 장기(長鬐)로 손암(巽菴)은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 다시 10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손암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11월, 다산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손암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었다
그의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동천여사(東泉旅舍) 사의재(四宜齋) 4년-보은산방(寶恩山房 :고성사)-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집 1년 반- 다산초당 10년(茶山草堂) 산정(山亭)- 만덕사(萬德寺 : 백련사)에서 머물렀다.
위인은 환경을 탓하지 않은 법이라고 했던가! "거센 파도만이 강한 어부를 만든다"는 격언이 생각나게 하는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상상을 초월한 학문적 대 업적으로 승화시켰다. 그 어느 누구도 그를 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단언한다.
유배가 길어지자 47세 때(1808 순조 8) 봄에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외가인 귤동(橘洞 : 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곳마을에 사는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산정으로 이 초가가 유배생활 후반부 1808년부터 1818년까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곳이 '다산초당'이다. 다산서옥(茶山書屋)이라고 부른다. 1808년(순조 8, 47세)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이때를 경세유표(經世遺表) 다산 정약용 연보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며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의 생활은 지극히 고독과 싸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주마등같은 스쳐가는 만감이 교차하는 회후에 갑자기 눈물이 난다.-홀만(忽漫)
홀연히 꽃을 보니 눈물이 수건 적시네 / 巾십 년 전에만 해도 조정에 있던 신하였는데
봄 얼음에 호랑이 꼬리 마음 놓을 곳이 없고 / 비바람에 닭이 울면 먼 곳 사람 그립다네
忽漫看花淚滿 十年前是內朝臣 春氷虎尾無安土 風雨鷄鳴憶遠人
지기지우 만나려면 황천에나 가야 있고 / 꿈이면 자주자주 집 찾아 돌아간다네
벽오동 그늘 아래 틈만 나면 기대 누워 / 주고받던 옛 얘기를 호젓이 더듬는다네/
知己秪應泉下有 還家猶向夢中頻 碧梧陰下頻婆側-다산시문집 제5권
이곳에서 그는 1500권의 책을 쌓아놓고 읽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썼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아방강역고’ '흠흠신서' 등 그의 책 500여 권은 대부분 다산초당에서 잉태하고 탄생했다. 제자 18명을 길러 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중 혜일(慧日)의 시에, "대낮에 고요히 베개에 의지하고 있으니, 해어진 돗자리와 명아주 평상이로다. 대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니, 모골이 서늘하구나. 일어나 앉아 남쪽 포구를 바라보니, 석양에 산 그림자가 길다. 잠시 저녁 종이 울리고, 불전에서는 예불하는 향냄새 흘러오네."라고 만덕산의 감회를 읊었다.
그러나 오늘 초당 주변은 숲으로 완전히 덮혀져 오후만 들어서도 어둡다.
다산초당은 본래 윤단이란 사람이 건립하여 서당으로 쓰던 건물인데 다산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오며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건물이다. 본래는 초가집이었는데, 1936년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57년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기와집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해남 윤씨는 다산 선생의 외가이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산초당 건물에서 동쪽으로 연못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동암(東庵)은 다산 선생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거처를 하던 건물이다. 그는 소나무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곳이라고 해 송풍암(松風庵)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친필로 다산동암(茶山東菴)이라고 현판을 걸었다.
동암에는 24세 연하인 추사 김정희가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듯으로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글을 써 올렸다. 이곳에서 목민심서 등의 저술작업이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다보면 초당 앞에 있는 서암(西庵)은 다산의 제자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다성각(茶星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암과 서암 모두 1970년대에 강진군에서 복원해 놓은 건물이다. 초당에서 동암을 지나 작은 모퉁이를 돌면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이 정자는 다산 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던 당시에는 없던 정자이다. 다산의 이곳에서의 생활이 어찌 좋았을까?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의 시에서 그 단면을 찾을 수 있다.
찌는 더위 절로라도 가고 싶으나 / 늙고 피곤해 재에 오르기가 무섭네 炎敲思走寺 衰疲畏陟嶺
모기 벼룩이 극성스럽게 덤벼 / 여름밤이 어쩌면 이리도 길까 蚊蚤恣侵虐夏夜覺苦永
밤이 길어지면 발광이 나서 / 옷을 벗고 우물에 가 목욕하면 更深每發狂 解衣浴村井
시원한 바람 내 얼굴에 불어오지만 / 숲이 울을 막아 그게 불만이라네 長風吹我面 疏林觖藩屛
생각하면 그댄 구름 속에 누워 / 뼈와 살이 차도록 쉬고 있겠지 憶汝雲臥高 偃息肌骨冷
그러나 중 유일(有一)과 즐겁게 놀 때도 있있다.
약초 싹은 비를 맞아 깨끗하고 / 느릅나무 꼬투리는 봄이 짙어!보이네 / 藥苗經雨淨 楡莢受春深
철 물건을 보니 나그네 눈이 번쩍 / 절간 찾아 외로운 마음 달래보네 旅食驚時物 禪樓散客心
일공의 시가 붙어 있어 / 난간 기대고 이렇게 읖조린다네一公詩句在 凭檻有遙吟
'포구라 서풍 속에 배를 띄워 나서며, 동녘 고향 바라보니 구름 연기 아련하네 야윈 아낸 지나가는 푸른 산을 한탄하고, 어린 아들 조는 백조 흥미롭게 구경하네'
浦口西風好放船 鄕園東望杳雲煙 瘐妻解惜靑山過 穉子耽看白鳥眠
이 자리는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선생이 가족이 그리울 때 나와 앉아 마음을 달랬던 자리라 한다.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여 전망이 빼어난 자리이다. 다산4경이라 불리는 정석바위,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은 모두 다산 선생의 유배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정석바위는 다산초당 뒤쪽에 있는 바위인데 바위에 '정석(丁石)'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약천(藥泉)'은 다산초당 건물 뒤에 있는 샘으로 다산 선생이 직접 파서 만든 샘이라 한다.
'다조'는 초당 앞에 있는 널찍한 반석으로 이곳에서 다산 선생이 이 돌을 부뚜막 삼아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시던 곳이라 한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초당 옆에 있는 연못과 연못 가운데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다.
다산 선생이 탐진강가에서 직접 돌을 주워다 만든 것이라 한다. 이 연지 옆으로 만덕산 기슭인데 대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산에서 흐르는 물이 연못으로 들어가게 해놓았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가 있다. '정석'이란 글씨는 소동파와 정령위(丁令威)의 고사를 끌어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다산은 약천을 옥정(玉井)이라고도 했는데, 지정(池亭)의 서북쪽 모서리에 물웅덩이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를 파자 돌 사이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고 적고 있다. 다산은 자연을 사랑한 시인이자 조경디자이너인 면모가 '사경첩'에서 확인된다.
또 정자 앞에는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가 있다. 다조는 “차 끓이는 부뚜막이 초당 앞에 놓였네(烹茶小竈艸堂前) / 소나무 단에 하얀 돌 평상은/ 바로 나의 거문고 타는 곳(松壇白石牀 是我彈琴處)/산객이 거문고는 걸어두고 가버렸지만/ 바람이 불면 절로 소리를 내네( 山客掛琴歸 風來時自語)”다산의 시와 연상된다.
다산 정약용 연보 1808년(순조 8, 47세)에 따르면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다산은 강진현 남쪽에 있는 만덕사(萬德寺) 서쪽에 있는데, 처사(處士)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다. 그가 다산으로 옮긴 뒤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열지어 심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며 석벽(石壁)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주역》의 어려운 부분을 들추어 〈다산문답〉 1권을 썼다. 봄에 둘째 아들 학유가 방문했다. 여름에 가계(家誡)를 썼다. 겨울에 〈제례고정(祭禮考定)〉이 이루어졌다. 또 《주역심전(周易心箋)》이 이루어졌다. 〈독역요지(讀易要旨)〉 18칙을 지었고 〈역례비석(易例比釋)〉을 지었다. 〈춘추관점(春秋官占)〉에 보주(補注)를 냈다. 〈대상전(大象傳)〉을 주해했다. 〈시괘전(蓍卦傳)〉을 주해하였다. 〈설괘전(說卦傳)〉을 정정하였다. 《주역서언(周易緖言)》 12권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1년 동안 유배자임에도 낙담하기는 커녕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에서 다산의 퍌경 '담을 스치고 있는 산복숭아나무'를 이렇게 표현했다.
산가의 발 표면에 일렁이는 잔물결은 / 다락 머리에 흔들대는 버들 가지 그림자라네
산골짝에 눈발이 날리고 있는 게 아니라 / 봄바람이 유서를 불어 맑은 못물 놀린다네
山家簾子水紋漪 照見樓頭楊柳枝 不是巖阿有飛雪 春風吹絮弄淸池
개울가 초정에 발에 부딪치는 버들개지를 두고는
죽죽 뻗은 칡덩굴 부드러운 햇살 아래 / 화로에는 차 달이던 연기마저 끊겼는데
어디선가 깍깍대는 세 마디 꿩소리가 / 구름 속 들창 아래 잠시 든 잠 깨워대네
山葛萋萋日色姸 小爐纖斷煮茶煙 何來角角三聲雉 徑破雲牕數刻眠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흙무덤의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4살 차이인 형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을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구강포(九江浦) 앞바다의 모습은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그의 시 '한 해가 저물어가는 때에'란 시가 가슴을 파고 든다.
고요한 산중 누각 외론 잠을 깨고 보니, 세밑이라 개암 감초 그리움이 아련하다
아홉 겹의 산봉우리 가을빛에 드높다면, 두세 집의 울타리 석양에 늘어섰네
九疊峯巒秋色裏 數家籬落夕陽邊 寥寥山閣起孤眠 歲暮榛苓思渺然
벼슬길에 고난 겪어 명군에게 부끄럽고, 시골의 한적한 몸 어린시절 생각난다
백옥루라 상제 궁궐 아스라이 삼백 리, 찬 구름 바라보니 긴 하늘 끝이 없네
名途歷險羞明主 鄕里偸閑憶幼年 迢遞玉樓三百里 寒雲極目有長天
그리고 형에 대한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하다.
새로 옮겨가신 가곡은 / 어천에 비하여 어떻던가요
떠돌이 생활 나라를 떠난 듯하고 /늙으면 의지하고픈 게 형이지요
稼谷新移處 漁川較孰贏 流離如去國 衰晩欲依兄
땅 넓으면 농사 많이 짓고 / 산이 깊으면 물정에는 어둡지요
처량한 몇 줄의 서찰 / 휘파람 한 번에 눈물이 갓끈 적시네
土廣饒農事 山深遠物情 凄涼數行札 長嘯一沾纓
1770년(영조 46) 9세 때 모친 해남 윤씨가 죽었다.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다. 윤선도의 증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다산의 외증조부가 된다. 다산의 얼굴 모습과 수염이 공재를 많이 닮았다. 다산이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정분(精分)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라 하였다.
다산은 그래서 형제의 연(緣) 뿐 아니라 지기(知己)까지 되어준 유일한 사람 으로 말 할 정도로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깊게 교류하였 던 손암(巽菴), 그래서 한 없이 그리워했던 형, 애절하고 밖에 할 말을 잊는다.
섬이래야 작기가 공만한데 / 자연스레 대인이 살게 되었구려
사는 게 그래도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 꿈이라고 왜 꼭 현실이 아니리까.
絶島如丸小 天然載大人 亦云生勝死 何必夢非眞
고도에서 홀로 슬픈 노래라니 / 건너가려도 배와 노 없으니
이 그물을 언제나 벗어날까 / 여유로운 저 물오리 기러기는
孤島獨悲歌 欲渡無舟楫 何時解網羅 優哉彼鳧雁
아득히 먼 신지섬도/분명히 이 세상에 있겠지
수평으로 궁복의 바다와 닿아 있고/가로는 등룡(고금도)의 산과 마주대했다
眇眇薪支苫 分明在世間 平連弓福海 斜對鄧龍山
지는 달 아무런 소식도 없고 / 뜬구름만 저 혼자 가고 오네
언제인가 지하에 가서 / 환한 얼굴로 우리 형제 만나리
落月無消息 浮雲自往還 他年九京下 兄弟各歡顔
유독 형 정약전과는 어머니가 같아 어릴때 부터 형제애가 더 각별했다.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고달픈 가운데 형을 그리워했다.
보은산 정상에 올라 우이도(흑산도) 를 바라보며(九日登寶恩山絶頂) 시를 읊은다 . 이때 흑산도를 자산(玆山)이라고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피럭했다.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여 내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하고 서신을 쓸 때마다 자산(玆山)으로 고쳐 썼는데 자(玆)란 검다는 뜻이다."
나해와 탐진이 이백 리 거리인데 / 羅海耽津二百里
험준한 두 우이산을 하늘이 만들었던가 / 天設巃嵷兩牛耳
삼년을 묵으면서 풍토를 익히고도 / 三年滯跡習風土
자산이 여기 또 있는 것은 내 몰랐네 / 不省玆山又在此
사람 눈은 그 힘이 멀리 보지 못하여 / 人眼之力苦不長
백 보 밖의 얼굴도 분간을 못하는데 / 百步眉目已微芒
더구나 탁주 같은 안개구름 껴있으며 / 況復雲霾濃似酒
눈앞의 섬들도 자세히 보기 어려움에랴 / 眼前島嶼猶難詳
먼먼곳을 실컷 본들 무슨 소용 있을 건가 / 瓊雷騁望嗟何益
괴로운 마음 쓰라린 속을 남들은 모른다네 / 苦心酸腸人不識
꿈속에나 서로 보고 안개 속을 바라보다 / 夢中相看霧中望
눈 물커지고 눈물 말라 천지가 깜깜하다네 / 目穿淚枯天地黑/다산시문집 제4권
그는 초의선사와조 근친했다. 다산이 초의에게 준 시의 친필이 남아 있다.
송라(松蘿)가 드리워진 좁은 돌길은 구불구불 서대(西臺)와 가까이 있네.
이따금 짙은 초록 그늘 속으로 적막히 스님 하나 찾아오누나.
垂蘿細石徑 紆曲近西臺 時於綠陰裡 寂寞一僧來
시에서 서대(西臺)는 다산초당을 말한다.
그래도 외로웠다. 그럴때에는 다산초당의 정자, 천일각에서 산길은 만덕산의 흙길을 지나 백련사에 가서 봄날 백련사에 가 차와 학문을 논하였던 혜장선사와 놀았다. 선사도 다산때문에 지금 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성임(成任)도 시에, "찬 바람 찬 눈속에 꽃이 피니, 절 문 동쪽에는 숲이 짙게 붉어라. 사시에 봄빛을 홀로 차지하였으니, 조물주도 여기서는 공평치 못하구나." 하였다고 시기한 절이다.
다산 자신이 다시 백련사에서 놀다(春日游白蓮寺)라고 시가지 썼으니 많이 놀았다 보다.
구름조각이 닦아냈는지 바다하늘 활짝 맑고 / 냉이밭에 나비들도 하얗게 훨훨 나는데
우연히 집 뒤의 나무꾼 길을 따라 / 드디어 들 머리 보리밭을 지나왔네
바다끝에서 봄 만나니 나도 이제 늙나보다 / 외진 마을 벗이 없어 중이 좋은 걸 알았다네
때로 먼 산 바라보던 도연명 생각이 나서 / 한두 편 산경을 놓고 중과 함께 얘기했네
경세유표는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이다. 목민심서는 현행법 내에서도 공직을 바로잡아 백성을 살려내려는 취지였다. 다산의 정확한 현실인식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고 민(民)을 구제하기 위한 방략이었다.
다산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독서와 저술에 열중했다. 다산은 먼저 예학과 주역을 공부했다. 경학에 힘써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주자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관념론이 아닌 실천론으로서의 경학이었다.
다산은 개인적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김조순 등 당파나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얼룩진 어두운 시대에 아파하는 몸부림의 결과물을 저술로 토로했다. 사실 다산이 겪는 고초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불의(不義)의 시대에 태어난 탓이었다. 그의 시문은 민초들의 고통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농민들의 착취와 압제의 실상을 목격하고, 농촌현실에 근거한 문제의식과 그 해결을 위한 저술에 몰두했다.
그를 실학자라 한 것에 대해 몇 가지 들어보면 저서 〈전론(田論)〉에서는 이상적인 전제개혁안으로 여전법(閭田法)을 제시하고, 耕者有田, 土地公有, 공동경작, 공동수확, 노동량에 따른 수확물의 분배 등에 대해 논하였다. 〈기예론(技藝論)〉에서는 낙후된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고 중국에서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농업ㆍ방직ㆍ의료ㆍ군사 부문에서의 기술을 특히 강조했다. 〈상론(相論)〉에서는 관상에 의해서 빈부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직업이 분화되어 습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相이 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향리론(鄕吏論)〉에서는 농민을 수탈하는 향리들을 굶주린 호랑이와 솔개에 비유하면서 임용제도의 쇄신을 역설했으며, 〈湯論〉에서는 天子도 상향식 간접선거제도를 통해서 뽑고, 뽑힌 사람이 적당하지 않을 때는 사퇴시키고 다시 선출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民意를 중시하는 정치이념을 제시했다. 〈五學論〉에서는 비실용적 관념의 유희를 일삼는 性理學, 訓詁學, 文章學, 科擧之學, 術數之學을 통박했다. 〈風水論〉에서는 풍수지리설의 허구를 지적했다. 〈俗儒論〉에서는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글이나 짓고 理氣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오랑캐를 물리치고 財用을 넉넉히 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監司論〉에서는 夷署들을 小盜, 관찰사를 大盜로 규정하며 지방관리들의 부패한 실상을 고발하였다.
그의 일화는 거두인 만큼이나 많이 전한다. 다산은 만년에 ‘사암(俟菴)’을 자신의 호로 사용했다. 사암(俟菴)이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성인에게도 자기 학문은 질책 받지 않으리라는 한 인간이 태어나 후회없는 에너지를 쏟고 떠나는 자신감이 배어있다.
1818년(순조 18) 57세 때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 1836년(헌종 2, 75세) 그의 부부가 혼인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回婚)의 날, 친척들과 자손들이 모인 날. 그는 75세로 세상을 마쳤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기는 이익(李瀷)의 학풍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던 1762~1788년까지, 제2기는 28세 때부터 관리가 되어 정조의 지우(知遇)를 받으며 요직을 거치던 1789~1800년까지, 제3기는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연루되어 18년간 강진에 유배되어 저술에 힘쓰던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제4기는 유배에서 돌아와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던 1818년부터 1836년까지의 시기이다.
다산 정약용은 1765년(영조 41) 4살부터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1768년(영조 44) 7세에 한시를 지었다. 이때 지은 ‘산'이라는 제목의 한시에서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지)" 라고 썼다.
이때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눈썹이 세 개로 나누어지자 삼미자(三眉子)란 별호를 갖게 된다. 1770년(영조 46) 그의 나이 9세때 어머니 해남 윤씨를 43세로 여윈 불운을 겪는다. 모친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다. 10세땐 본인이 쓴 시들을 모아 삼미집(三眉集) 이라는 시집을 냈을 정도로 “엄친아”요 타고난 천재였다. 그것은 남아있는 방대하고 가치적 업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그의 출세가도가 1780년(정조 4) 22세때 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할때부터 임금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1789년(정조 13) 28세에 드디어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데 임금께서 특별히 총애한 덕에 암행어사, 참의, 좌우부승지등을 거치면서 정조가 사조세자를 배향된 주교사(舟橋司)를 찾아가게 하기 위해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의 설계를 했을 정도로 그의 재능을 아낌없이 펼쳐 그의 평생은 남다른 재주와 천재적 다능한 능력의 소유자로 15개의 직함을 얻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식하나 잃은 것도 평생 가슴에 묻는다는데 6명을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던 형용하기 힘든 각혈을 토해내야 했다.......타향이 내 땅이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 /즐거이 평지에 선인(仙人)됨을 좇으리니......비장함이 들만큼 자신을 이겨낸다.
.....입술 타고 입은 이미 말랐고 / 혀도 갈라지고 목도 다 쉬었네 / 내 마음 아무도 아는 자 없고 / 너울너울 밤만 오려고 하네 舌敝喉亦嗄 唇焦口旣乾無人解余意 駸駸天欲夜 마음을 육신 노예 삼았노라고 / 도연명도 말을 했지만 / 백 번 싸워야 백 번 다 지니 / 이 몸 왜 이리 멍청할까 / 以心爲形役 淵明亦自言 百戰每百敗 自視何庸昏.....그 고뇌의 산물을 남기고 간 성인, 그를 쉬 평가하기 힘든 것이 이때문이다.
인간 다산은 젊은 날, 성균관시험에 3번이나 떨어지고 학문을 닦는데 갈등하다 책을 팔고 18년의 유배의 정적들의 수 많은 견제로 마지막 까지 벼슬 길이 막히는 등 그에게도 수 많은 갈등과 방황은 피하기 힘들었다. 그냥 음풍농월(吟風弄月)만을 일삼는 시인이나 문인서화가 조경전문가 이상의 지점이 다산초당이었다.
1816년(순조 16년, 선생 55세) 5월 3일 연아(淵兒)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진실로 큰 일이기는 하지만 죽고 사는 것에 견주면 하찮은 일이다. 사람이란 경우에 따라 생선을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하여야 할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하찮은 일 때문에 아양을 떨면서 동정을 애걸한다면, 만일 나라 국경에 난리가 일어났을 경우 군부(君父)를 버리고 적에게 투항하지 않을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내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천명이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천명이다. 그러나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닦지 않고서 천명만을 기다리는 것은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다했다.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이미 다 했는데도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천명일 뿐이다...."했듯이 그는 요컨대 초당은 다산이 자신의 처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꾼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 낡은 조선을 새롭게 한다)’의 설계사무소인 셈이다.
‘다조’의 솔바람소리(松風)는 그냥 선정(禪定)으로 들어는 찻물 끓는 소리가 아니라 다산에게는 그 넘어 에서 들려오는 ‘민중의 울부짖음(天鼓, 천둥소리)인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저술한 목민심서 등 대민을 위한 책들이었다.
훗날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은 자신의 관 속에 《목민심서》를 함께 담기를 원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 시대적 국경을 초월한 다산의 학문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언덕 뿌리의 길을 오르다보니 그가 이곳을 오르는 처절한 인내의 초상의 모습이 연상되어 가슴이 아려온다. 외롭고 고독하고 길, 그래서 위대한 업적의 탄생이 더욱 빛났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어떠한 경우로든 그러한 인물이 우리들의 선조였음에 아주 만족한 행복감을 느끼게 해 마음 뿌듯하고 가슴이 뭉클거렸다. 그의 고명(觚銘)이 스치운다.
하루의 절개는 그릇에 달려 있지만 / 一日之節在器
백 년의 절개는 뜻에 달려 있다 / 百年之節在志
그릇이 넘치면 흘러나오지만 / 器濫則出
뜻이 거칠면 취하는 것이다 / 志荒則醉
/다산시문집 제12권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가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만들곤 하는데 行拂亂其所爲, 이것은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動心忍性, 지금까지 못하던 일도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다. 곧 정약용을 곤궁에 빠지게 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능하지 못한 것을 잘하게 해서 보다 훗날 큰 인물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으로 결론을 짓는다.
강진군 일대에 산재하고 있는 다사의 유적을 사적 제107호로 지정하고 있다. 그 밖에 전남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사적으로는 제126호 용장성 · 제274호 신안 해저유물 매장해역 · 제302호 낙안읍성 · 제312호 운주사지 · 제337호 나주읍성 · 제381호 여수 충민사 · 제384호 입암산성 · 제407호 옥룡사지 · 제418호 검단산성 · 제483호 나주목 관아와 향교 · 제505호 화엄사 · 제508호 해남 대흥사 등이 지정되어 있다. - 참고문헌=고전번역서 다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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