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칼럼을 연재해 온 장석준 신현재 기획위원의 비평집 <근대의 가을>이 출간됐다. 책은 글 모음을 넘어서는 짜임새를 갖고 있다. 1, 2부에서 저자는 한국인들의 정치·사회·문화적 의식과 행동에 대한 진단을 내놓는다. 3, 4, 5부는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대안에 대한 좌파적·생태적 관점의 모색이 담겨있다.
5편의 글로 구성된 1부에서 저자는 지금의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힘을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와 '보나파르트주의'로 특징짓는다.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란 "1987년에 만들어진 권력 질서 안에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가둔 채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을 민주주의 거의 전부"로 여기고, "정치와 경제는 별개라는 전제 아래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 개혁의 상호작용을 차단"하고,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생태계 위기 같은 새로운 과제들을 계속 관심과 고민의 사각지대 속에 가둬 놓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87년 체제 하의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한국 정치의 또 다른 특징은 '보나파르트주의'로 귀결됐다. 칼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유래한 '보나파르트주의'는 "시민사회 안의 어떤 계급도 확고하게 정치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권력이 1인 통치자에게 집중되는 양상"을 뜻한다.
최근의 대선에서 이는 "양대 정당이 각각 내세운 이재명, 윤석열 두 후보를 향한 기대 혹은 적대라는 정념"이 정치적 담론을 지배하고 "이른바 '분석'이라 제시되는 것들도 이 정념의 정제된 표현 정도"에 그치는 상황으로 발현됐다.
4편의 글로 구성된 2부에서 저자는 한국인들의 사회·문화적 의식과 행동을 '추격의식', '중산층 행동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그려낸다.
"경제적 이익 추구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태도"를 일컫는 '경제주의'에 바탕을 둔 '추격의식'은 경제적 상층 계급을 따라잡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의식을 뜻한다. 언젠가 자신이 되어야 하는 이상향을 부정할 수는 없기에 '추격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계급의식'이 자리 잡기는 어렵다.
'계급 운동'의 빈자리는 '중산층 행동주의'가 채웠다. 흔히 '20 대 80'의 사회에서 20으로 여겨지는 중산층은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의 정규직 노동자",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 "상당한 자산 가치를 지닌 주택을 한 채 이상 보유",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입학 경쟁에 뛰어드는 가정" 등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조직화와 동원, 여론 형성의 강력한 자원"을 가진 이들이다.
이때문에 승자독식 선거제도 하에서 거대 양당도 "중산층 끌어안기 경쟁"을 펼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둘 중 누가 권력의 주인이 되든지 중산층 행동주의는 불패 신화"를 이어왔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나머지 22편의 글에서 저자는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대안을 모색한다. 변화의 사상적 기초를 다룬다고 볼 수 있는 3부에서 저자가 중심으로 삼은 말 중 하나는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생태'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만은 일상어의 지위를 잃은 '사회주의'다.
저자는 조국 사태 당시 "엘리트 계층의 특권 세습"에 대한 반발이 "현실을 뒤집는 진짜 개혁"이 아니라 "사다리 위쪽으로 올라가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를 그대로 두는 "경쟁의 공정성"에 머물렀다는 점을 짚는다. 그리고 이는 한국 사회에 "보편적 평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이념-운동"이 비어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채울만한 "이념-운동"으로 저자가 택한 것이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86세대에 속하는 한 무리의 지식인-운동가"들이 내다 버린 '사회주의'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정전위 정당 같은 낡은 개념을 다시 시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재정확장을 통해 기초연금을 지금 당장 최소한 50만원은 넘게 지급해야 한다는 것", "입시제도나 끝없이 뜯어고칠 일이 아니라 대학 평준화를 단행해야 한다는 것", "학력과 성별, 고용 형태와 기업 규모에 따른 임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아낼 만한 표지를 지금 당장 마련할 수 없다면 이미 있는 표지로라도 "평등 사회 실현"이라는 목소리를 대변할 "이름", "깃발"을 내걸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한국과 달리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지난 200여 년 간 '사회주의'가 그런 역할을 해왔다는 점도 지적한다.
저자는 프랑트푸르크 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사회학자인 악셀 호네트의 논의를 빌려 '국유화'나 '중앙집권 계획경제'가 아닌 '사회적 자유'를 사회주의의 핵심 구성 요소로 제시한다. '사회적 자유'는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는 생각을 담은 말로 '개인적 자유'와 구별된다. 이런 자각을 가진 사람은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흔히 "동지애", "연대"로 표현되는 벅찬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사회적 자유'는 이렇게 "자유, 평등, 우애"라는 "근대의 약속"도 하나로 묶어낸다.
이어지는 4부에서 저자는 재벌권력 개혁, 산업구조 개혁, 플랫폼 산업, 부동산, 돌봄사회로의 전환, 기본소득과 일자리 보장제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저자가 제시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본 해법을 제시한다.
5부의 주제는 기후위기와 생태 전환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그린뉴딜이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넘어 '전시동원'에 준하는 특단의 대책과 실현 계획이 필요하다는 제안, '경제적 이성'을 '생태적 이성'으로 대체하자는 제안, 불평등한 기후위기에 대한 '계급적 적응'이 필요하다는 제안 등과 함께 생태 전환이 우리 삶에 가져올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 담겨있다.
그간 써온 글을 모아 다듬은 것만으로도 좌파적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앞날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짜임새 있는 책이 나온 배경에는 저자가 지나온 삶의 이력이 있다. 장 위원은 진보신당 부대표, 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 등을 지내며 진보정당의 정책·교육 활동에 참여해왔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 사회, 생태 전환 등의 문제에 천착해왔으며 해외 진보정당의 역사와 현재에도 조예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