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시절 습자시간과 작문시간이 제일 좋았다. 연필에 침을 묻혀 필기장(筆記帳)에 또박또박 눌러쓰는 것이 좋았고 삐뚤삐뚤한 글자가 공책(空冊)에 꽉 차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나는 펜으로 글 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나는 습작(習作)에 열중한다. 대가들의 문장을 습지(習知)했으나 모방은 하지 않았다. 모방(模倣)은 내 글이 아니라 걸 일찍 알았다. 지금도 어떤 문체(文體)를 특별히 선호(選好)하거나 특정 작가를 사숙(私淑)할 타산도 없다. 그저 어느 작가의 책을 볼 기회가 생기면 무작정 탐독(耽讀)하여 글쓰기에 참고(參考)로 할 뿐이다.
사실 한 토막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전문서적(專門書籍)이나 속담사전(俗談事典)까지 곰 가재 뒤지듯 해야 한다. 누구 말처럼 ‘글 쓰는 일은 자기를 파먹는 일’이라 말 못할 어려움이 따를 때가 많다. 맞는 말이다.
나는 처음 글을 쓸 때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죄다 적었다. 되도록 토씨 하나라도 틀리지 않으려 무척 조심했다. 글의 형식(形式)도 중요했지만 내용의 정확성(正確性)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쓰겠다고 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쓰기가 어렵다. 몇 번의 반복(反復)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뒤져보면 순서(順序)가 빠졌거나 핵심(核心)을 놓쳐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글들이 나의 경험 세계를 넓혀주고 지나간 기억(記憶)을 되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줄 글이 쌓이면 나의 경험이 되고 한 권의 책도 된다는 것을 경험(經驗)했다.
그러다가 글쓰기가 막히거나 기분이 침울(沈鬱)하거나 답답할 때면 나는 책도 필도 다 팽개치고 창밖을 내다보며 보건체조(保健體操)를 십여 분 동안 한다. 그러고 나면 침울하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참 이보다 더 좋은 특효약(特效藥)이 내게는 없다. 나는 늘 글을 쓰는 것으로 안정(安定)을 찾는다. 원체 병 자랑하며 집에만 꾹 박혀 있으니 말이다.
나는 사유의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바꿀 용기가 없어 늘 근심걱정에 사로잡힌다. 스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드넓은 하늘을 바라본다.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바로 사유의 급전환(急轉換)이다. 사유의 급전환을 거쳐야 비로소 더 높은 곳에 설 수 있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또 가까이서 보아야 자세히 보고 세밀(細密)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全體)를 보려면 뒤로 한발 물러서야 한다. 그래야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객관적(客觀的)으로 관망(觀望)할 수 있다. 즉 가까이서 본 것의 실체(實體)도 제대로 알게 된다. 이따금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필요(必要)하다. 그래야 더 정확하고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럼 정신 치유(治癒)란 무엇을 의미할까? 기억을 치유한다는 건 또 무슨 의미(意味)일까? 어떤 의도(意圖)로 분석하면 부정적(否定的)인 믿음과 화(火)와 그리고 좌절감(挫折感)과 분개(憤慨), 죄책감(罪責感)과 절망감(絶望感) 그 밖의 파괴적(破壞的)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억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파편(破片)들이다. 파편이고 흔적(痕迹)일 뿐인데 언제든 다시 살아나 멀쩡하던 사람을 바닥부터 뿌리째 흔들어 놓는다. 치유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워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뜻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명상(瞑想)이다. 기억을 치유하는 존재(存在)이다.
나의 희망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그 글 속엔 나와 당신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별거 아닌 얘기라도 어느 부분에선 읽던 사람을 한동안 그대로 멈추게 할 거다. 무엇보다 좋은 글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것이다. 나의 희망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고 그 글 속에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덧 십여 성상을 이어지고 있다. 매일매일 안겨오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고통도 크다. 그러나 고통을 이겨내는 보람과 기쁨은 더 크기 때문에 오늘도 다시 펜을 들어 '좋은 글'을 또 쓴다. 당신의 가슴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미소 지으며 말이다.
여기서 주제넘게 한마디 보탠다. 글은 말의 구성(構成) 및 운용상의 규칙(規則), 또는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學問)이다. 즉 작법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그런 지식을 말한다. 그래서 문장은 그 사람의 독특한 개성(個性)에 따라 소질(素質)에는 주관적인 특색(特色)으로 감명을 환기(喚起)한다고 한다. 요컨대 일종의 영감(靈感)을 부여한 사상(思想)을 불어넣어 자기주장을 고취(鼓吹)한다고 한다.
한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그의 정신을 읽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다른 사람과 다른 개성과 정신을 읽는 것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썼든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차라리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을 본다. 훌륭한 글은 호흡이 흐르고 그래서 살아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은 한 사람의 형태(形態)는 본 딸 수 있으나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세계는 절대 본 딸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글은 그 본인의 마음(성격)씨를 그대로 배설(排泄)하기 때문이다. 맘씨와 글씨는 직결(直結)되어 있다.
교훈을 밝은 거울로 삼아야 한다. 생활을 더 소중히 여기고 존중(尊重)하면서 왜곡된 글은 쓰지 말아야 한다. 왜곡된 글로 사람들을 미혹(迷惑)시키고 거짓도 불사(不死)하는 행동에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 글은 거짓말쟁이의 수다가 아니다. 또한 글 자체가 수단이 아니다. 어떤 목적(目的)을 위해 독자를 꾀려는 속셈은 화(禍)를 불러온다.
지금 이 시각 글을 쓰면서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기실은 글이 사람을 쓴다. 인간은 술에 사람이 취한다고 생각한다. 기실은 술이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글에 도취된 사람은 그 상대가 글이 아니라 실은 자기가 글인 것으로 착각(錯覺)하게 된다. 이에 같은 글을 써도 글에 나타나는 인격(人格)은 천차만별이다.
집구석 일탈(逸脫)은 글쓰기의 궁극적 목적(目的)을 달성하는 수단(手段)이다. 나는 자신이 미시적(微視的) 글쓰기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시적(巨視的) 의미의 글쟁이라는 껍데기를 벗기고 나면 그 안에는 동양적 유교사상(儒敎思想)의 또 다른 나신(裸身)이 드러나 보인다. 어쨌든 간에 지금은 온통 창밖의 드넓은 창공을 훨훨 날고 싶은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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