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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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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특수'에 가려진 베트남 전쟁…"또다른 베트남을 경험하지 않을 교훈을"

▲월남으로 파병가기 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참전 군인들 ⓒ보도사진연감

 

[베트남 종단열차③] 냉전의 흔적이 사라진 한반도를 꿈꾸며

글 : 박정연 기자  |  기사입력 2022.12.11. 13:01:32 최종수정 2022.12.12. 09:42:41

2019년 5월 <프레시안>은 조합원들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 황량한 대지 위에 빛나는 태양과 해가 진 뒤 떠오른 수많은 별들을 함께 보았습니다. (관련기사 : 최초 여성 공산주의자 김알렉산드라를 따라 걷다) 코로나로, 또 전쟁으로 열리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철길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번엔 베트남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프레시안>이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베트남의 남북을, 열차로 종단하고 온 이야기를 전합니다. 곧 <프레시안>의 조합원들과 함께 떠날 날을 그려봅니다.

후에역에서 출발한 야간열차는 새벽을 가로질러 달렸다. 30도를 육박하는 베트남의 후덥지근한 10월, 야간열차의 밤은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하다 못해 한기가 돌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도 추운 날씨가 우습게 기차 안에서는 반팔을 입을 정도로 따뜻했는데, 이 또한 기차여행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꼬박 22시간을 달린 열차는 호찌민역, '사이공역'에 도착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 된 이후 도시 이름은 '호찌민'으로 바뀌었지만 철도 시간표와 승차권, 역사 앞의 간판에는 여전히 옛 지명인 '사이공'이 남아있다. 사이공역은 살아 있는 유물 같은 것이다.

사람이 적고, 여유로웠던 후에와 달리 호찌민은 도시 그 자체였다. 8차선 도로를 꽉 채운 오토바이와 차들은 베트남의 '러시아워'를 제대로 뽐내는듯 했다. 차 사이로 오토바이가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건물의 네온사인과 간판 불빛은 화려하게 빛났다. 호찌민은 도시 이름이 무색하게 베트남에서 보았던 도시 중 자본주의의 냄새가 가장 짙게 나는 곳이었다.

구찌 터널을 판 베트콩, 고엽제를 뿌린 미국

호찌민시에서 60km 떨어진 작은 농촌 마을인 구찌현은 베트남 공산주의 군사 조직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근거지였다. 그 중심이 되었던 구찌터널은 사실 미군이 아닌 프랑스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패망 후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던 프랑스는 1946년 베트남을 침략했다. 이때 베트남 독립군들은 저항기지로 48km의 터널을 구찌현에 만들었다. 

1954년 프랑스에 대항한 베트남 독립전쟁이 승리로 끝나며 통일정부 수립이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남베트남에서는 응오단지엠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베트남 공화국을 세웠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공격했고, 독립군의 후예들은 남베트남해방전선을 결성해 호미와 바구니를 이용해 구찌터널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갔다.

늘어난 구찌터널의 길이는 200km가 넘었다. 사이공강에서 캄보디아 국경 지대까지 이어졌다. 지하 터널은 미로같이 매우 복잡했을 뿐 아니라 통로는 너비 80㎝, 높이 80㎝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이 안에는 숙소, 부엌, 회의실 뿐 아니라 병원과 극장까지 갖추어져 있는 하나의 지하 도시를 이루었다.

▲구찌터널 개념도 ⓒ박흥수 철도노동자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베트콩들의 습격에 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몸집이 작은 병사들로 '땅굴 쥐 부대'를 만들어 침입을 시도했지만, 구찌터널의 부비트랩과 죽창 등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진입을 하더라도 산소 부족과 무더위로 이 '땅굴 쥐'들은 터널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독일에서 공수해온 군견들 3000여 마리를 이용해 땅굴 입구를 찾으려 했지만 이 또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미군은 고엽제와 화염방사기로 베트남의 밀림을 그야말로 밀어버렸다. 또 구찌현 일대에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불을 지르고 약 8천만톤의 고엽제를 살포하며 "이 땅에 생명체가 살 수 없도록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이때문에 베트남 숲 전체의 17.8%에 달하는 지역과 2만㎢의 논밭에 고엽제가 살포돼 현지 생태계도 심각하게 파괴됐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인과 참전용사 최소 300만~480만명이 암 등 심각한 질병과 기형아 출산 등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남베트남해방 군복을 입은 해설사는 구찌터널에서 작동했던 부비트랩을 재현하기도 했다. 또한 나뭇잎이 덮힌 구찌터널 입구 안으로 들어가 은신했다가, 그 작은 통로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뭇잎이 덮힌 뚜껑이 닫히면, 어디가 터널 입구인지 정말 식별이 불가능했다.

▲허리를 굽혀야만 다닐 수 있는 구찌터널 ⓒ박흥수 철도노동자
▲구찌터널 입구 주변에 설치된 부비트랩 ⓒ프레시안(박정연)
▲구찌터널의 숨구멍 ⓒ프레시안(박정연)

관광객 탐방이 허용된 구찌터널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후에에서 다녀온 빈목터널보다(관련기사 : 나라를 둘로 쪼갠 군사분계선은 그냥 '흰 선'에 불과했다) 훨씬 더 좁고 어두웠다. 허리를 더 굽혀야 했고 터널에서는 여기저기 곡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좁은 터널을 뚫고 적을 상대했어야 할 베트남 군인도, 이 미지의 터널을 탐색했어야 할 '땅굴 쥐' 미국 군인도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한국 군인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참전에 회의를 느끼는 병사들도 있었다. 한 참전 용사는 "그 전쟁이 그랬다. 어느 놈이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의 전쟁이었고, 그 이상한 전쟁에서 죽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참전용사는 "지금 생각에도 A형(A형 레이션은 미국식 레이션으로 전투 식량인 C레이션, K레이션에 비해 고기가 풍부하게 들어있다고 한다) 가져온 놈이나, C백 하나 메고 온 놈이나 차이 나는 건 고엽제 경·중·고 뿐"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전,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 2020, 렛츠북)

 

대통령궁을 뚫고 들어온 탱크... 미국 "길고 힘든 싸움이었지만, 우리는 졌다"

베트남 전쟁의 인상깊은 장면 중 하나는 남베트남 대통령 궁을 정말 '뚫고' 들어온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탱크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대통령궁을 점령하며 사이공을 함락했고, 수많은 미군은 헬기를 통해 대피했다. 베트남 전쟁은 종료됐고 이듬해인 1976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통일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호찌민 도시 중심가에 있는 대통령 궁은 뚫렸던 다시 정문이 세워졌고, 이제는 '통일궁', '독립궁' 이라는 별칭을 갖고 개방되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대통령궁 오른쪽 숲에는 이곳을 점령할 당시 진군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탱크 두 대가 깨끗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 탱크들은 중국제나 소련제였다. 오래된 전쟁같지만, 불과 50년밖에 안되었고 이렇게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궁을 뚫고 들어오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탱크 ⓒLIFE
▲독립궁에 전시되어 있는 탱크 ⓒ박흥수 철도노동자

남베트남의 대통령궁은 호화로움 그 자체였다. 금박 장식을 한 가구들부터, 당구장, 영화관, 귀족풍의 침대까지 1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다. 지하에는 남베트남 대통령의 전용 벤츠도 전시되어 있었다. 하노이의 호찌민 나무 관저도 베트남 일반시민의 집보단 넓겠지만, 이 대통령궁에 비하면 참 소박한 집이었다.

특히 옥상에는 전용 헬기 이착륙장이 조성돼 있었다. 남베트남의 응웬반티에우 대통령이 이곳에서 부랴부랴 사임 성명을 발표하고 금괴를 챙겨 망명길에 오른 것을 상상하니, 왜 베트남 국민들이 소박한 '호 아저씨'에 열광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대통령실 지하 벙커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종합 상황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당시 우방이었던 미국의 지원을 받아 최첨단 장비들이 도입되어 무전을 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부패하고 무능했던 남베트남의 지도자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미국도 자국의 들끓는 반전 여론과 재정부담으로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독립궁의 앞마당 전경 ⓒ박흥수 철도노동자
▲독립궁 옥상의 헬기 이착륙장ⓒ프레시안(박정연)
▲지하벙커에 조성된 전시상황실 ⓒ박흥수 철도노동자

"길고 힘든 싸움이었지만, 우리는 졌다. 우리는 수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하고도 정책이 인색하고 어정쩡했는데, 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베트남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교훈을 얻기 바란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사이공 지부장인 토머스 폴가는 헬기에 타기 직전 워싱턴DC에 보낸 마지막 전문)

'베트남특수'에 가려진 베트남 전쟁 피해의 '실존'

베트남 전쟁은 냉전의 결과물이었고, 제국의 대리전이었다. 전쟁을 주도한 미국,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을 지원한 소련과 그 우방들. 기차로 베트남을 종단하며 느낀 강한 의문은 '도대체 왜 전쟁을 했을까',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베트남과 파병으로 참전하게 된 우리나라와 같은 작고 힘없는 나라의 청년들 뿐 아니라 제국의 청년들마저도 전쟁의 주체가 아닌 희생자라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나라가 '월남전',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국가 경제 발전과 떼어놓을 수 없다. 미국의 젊은이가 기피하는 전쟁에, 한국은 제일 먼저 파병을 결정했다. 박정희 정부는 대규모 파병을 보냈고 한국군 파병으로 벌어들인 총수입은 약 2억 3556만달러로 집계됐다. 총 수입의 약 80%인 1억 9511만 달러가 한국 정부에 송금됐고, 정부는 그 돈을 경제개발 자금으로 썼다고 말한다. 그렇게 한국 청년들의 목숨과 맞바꾼 경제발전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찾아왔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국가담론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대중적 파급력을 지녔던 것이 전쟁과 연관된 경제발전론이다. 이는 단순한 담론 수준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이 성장의 효과를 공유한 부분이었고,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현재 한국사회의 공적기억은 베트남전쟁의 이념적 성격보다는 발전전쟁으로서의 실리적 성격을 더욱 강조하며 이를 통해 전쟁을 정당화 한다. 베트남 전쟁을 근대화와 발전을 통해 읽는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120만 명, 부상자 300~400여 만 명, 여기에 질병과 국토의 황폐화까지 감수해야 했던 베트남인들이 베트남 전쟁과 연관된 한국의 발전담론 기억 방식을 읽는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참전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과 이를 참전의 중요한 '가치'로 기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쟁에 대한 과거의 기억 방식을 그대로 재생산 하는 것은 베트남인들에 대한 '기억의 폭력'이다.

우리 안의 베트남전쟁은 참전군인의 '몸의 기억'으로도 지속된다. 2013년 7월 12일 대법원은 참전군인 1만 6천 579명이 고엽제 제조사인 미국 다우케미컬과 몬산토 등 2개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 이로써 1999년 9월 시작되어 14년을 끌어 왔던 고엽제 피해소송은 사실상 참전군인의 패소로 일단락되었다. <잊힌 전쟁, 오래된 현재. 베트남전쟁의 한국사회사> 2015, 푸른역사

 

베트남전쟁을 통해 한국이 경제개발을 했다는 '사실'과 이를 베트남전쟁의 중요한 가치로 부각시키는 것은 전쟁을 정당화 하는 건 다른 차원의 논리다. 국가는 그 담론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베트남 특수'라는 용어는 한국근현대사사전에도 등재되어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 전쟁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때 참여한 젊은이들의 희생과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과 부상자들은 가려진다.

하지만 호찌민 전쟁박물관에서 베트남전쟁의 피해자들은 실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쟁 피해자들의 사진은 끔찍했다. 어렴풋이는 상상했지만 처음 마주하는 전쟁의 본모습이었다. 머리만 남은 베트콩 시신을 들어 올린 미군 장교의 모습, 장갑차 뒤에 연결된 밧줄에 알몸의 베트콩 포로를 묶은 채 끌고 가는 사진, 고엽제로 인해 샴 쌍둥이로 태어난 아이들은 양반인 정도였다.

다만, 전쟁박물관에서는 전쟁 피해를 입은 베트남 민간인 뿐 아니라 지쳐가는 각 나라의 군인들과 포로가 된 군인들의 피해도 함께 다루고 있었다.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쟁 피해 보도 사진 ⓒ프레시안 (박정연)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쟁 피해 보도 사진 ⓒ프레시안 (박정연)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쟁 피해 보도 사진 ⓒ프레시안 (박정연)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쟁 피해 보도 사진 ⓒ프레시안 (박정연)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쟁 피해 보도 사진 ⓒ프레시안 (박정연)

전쟁박물관에는 베트남전쟁에 쓰인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토록 긴 기간 동안 전쟁 무기를 팔아넘긴 미국의 방산 기업은 이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본 이들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갔던 철도노동자도 "이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일지도 모른다"고 방산 기업들의 행태를 비꼬아 표현했다. 전쟁박물관에서 마주한 전쟁 피해 앞에서 그들의 '이득'은 후안무치 그 자체였다.

"We can forgive but we don't forget"

전쟁박물관에는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관광객이 왔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던 국가의 젊은 세대들이 박물관을 찾는 점이 인상 깊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단체로도 이 박물관을 찾았고, 우리 일행을 제외한 젊은 한국인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베트남전쟁의 피해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전쟁박물관에서, 베트남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쟁박물관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20대 베트남 청년 트란티키우비는 "우리는 과거의 적들을 용서할 수 있지만, 잊을 순 없다"(We can forgive, but we don't for get)고 말했다. 이들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통일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은 단일된 힘으로 미국에 맞서 싸웠다"며 "우리를 침략하려 했던 모든 나라에 맞서서 맞서 싸워왔다"고 했다.

이어 그는 "몇 번의 침략을 겪은 우리에게 독립과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과거에 중국 프랑스 미국은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지만, 현재는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한국도 미워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모든 적이었던 국가들과 친구가 될 준비가 되어있다. 만약 그들이 정말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면... 다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지만, 잊을 순 없다"고 강조했다.

▲전쟁박물관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20대 베트남 청년 트란티키우비 ⓒ프레시안(박정연)

자신을 앤이라고 소개한 10대 베트남 청소년은 "전쟁은 매우 끔찍하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모든 도시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준다"며 "평화는 소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을 언급하며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다. 이 세상에 전쟁이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여행을 온 20대 청년 엘렌은 "박물관에 와서 자신이 기존에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베트남 전쟁을 바라 볼 수 있었다"며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만든 가장 큰 정치적 실수 중 하나다. 특히 우리 세대가 매우 부끄럽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쟁박물관에서 본 인명적 피해 뿐 아니라 환경적 피해 또한 막대하다"며 "더 이상의 전쟁은 있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10대 베트남 청소년 앤과 진ⓒ프레시안(박정연)
▲미국에서 여행을 온 20대 청년 엘렌 ⓒ프레시안(박정연)

전쟁박물관에서 만난 젊은 세대들은 입을 모아 "더 이상의 전쟁은 있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전쟁의 '이득'을 계산하며 전쟁을 정당화 하는 게 아니라, 전쟁의 피해와 실상을 마주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군사분계선이 있던 후에에서,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의 철도노동자들과 기자도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 철도노동자들이 잇고, 운전하는 기차를 타고 한반도 전역을 취재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군사적 대립이 난무하는 지금의 한반도에서 그 장면이 당장 실현되긴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전쟁의 흔적이 사라진 평화의 한반도를 볼 수 있길 기원해봤다.

"옛 베트남 분단의 현장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다짐과 남북을 잇는 열차를 타고 평화의 내일로 달리는 한반도를 생각하며, 한국철도노동자 20명과 1명의 기자가 이 글을 남깁니다"

ⓒ프레시안(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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