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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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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호지물(玩好之物)보다 독서(讀書)에 미친 활자중독자(活字中毒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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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관한 편력(遍歷)을 말할라치면 책을 몇 권 정도는 무난히 쓸 것 같다. 어려서부터 나는 책벌레로 소문났었다. 여섯 살에 누나에게서 글자를 익히고 여덟 살에는 긴 문장도 줄줄 내리읽었다. 그래서 신문지(新聞紙)나 휘보(彙報)에 박힌 활자(活字)를 닥치는 대로 읽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책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아직 글을 모르는 유아기(乳兒期)에도 책 읽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아마 내게 있어서 책보다 더 좋은 장난감은 없었나 보다. 소학교에 입학 전부터 나는 부모에게 과자보다 그림책을 사 달라고 더 졸랐다고 한다.

나의 괴벽을 잘 알고 계신 부모와 누나는 시내로 일 보러 갈 적마다 일부러 서점에 들러서 만화책(漫畫冊)을 사다 주곤 했다. 원체 병약(病弱)한 나는 자주 앓음 자랑하다 보니 거의 집구석에 박혀있었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 누워서 책만 죽어라고 읽었다.

빈한(貧寒)한 우리 집에는 책이 몇 권 없었다. 그 나마 6년 이상인 누나가 학생(學生)이어서 교과서와 그가 읽던 책 수십 권이 있었다. 나는 여러 번 읽었던 책도 다시 즐겨 보았다. 한자를 모르니 도감(圖鑑)이나 삽화(揷畫)라도 보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소학교 때 나는 책이 좋아서 늘 책하고 씨름했다. 친구(親舊)와 어울리며 밖에서 노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체육시간(體育時間)을 제외하고는 홀로 책만 읽었다. 지금도 나는 낙(樂)이라 하면 독서(讀書)보다도 즐거운 낙을 느끼지 못한다. 읽고 쓰는 것이 내 생애(生涯)의 전부인 것 같다.

소학교 3학년 땐가 나는 최서해(崔曙海)의 ‘탈출기(脫出記)’을 읽기 시작했다. 누나의 책장 속에서 몰래 들추어내서 읽었다. 그때 읽었던 줄거리를 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은 책 뒤 부분이 페이지가 여러 장 떨어졌는데 아는 동네 형님에게서 겨우 빌려서 결락(缺落)된 수 십 페이지 분량(分量)을 죄다 만년필로 베껴냈다.

이 장면(場面)을 보고 너무 놀란 누나가 혀를 두르며 “너 장차 작가가 되겠네”라고 놀려댔다. 어려서부터 나는 책 읽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또 책 읽는 것만이 가장 고상한 취미(趣味)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도 역시 인생 지복(至福)은 매일 책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좌우명처럼 간주(看做)하고 있다.

4학년 때 누나의 서랍에 있던 누렇게 퇴색(退色)한 ‘김소월시선‘을 가만히 꺼내 읽은 기억이 오늘도 선명(鮮明)하다. ’접동새‘ ’진달래‘를 읽으면서 우리말 아름다운에 무척 감탄(感歎)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시들을 줄줄 외웠다. 시가 뭔지도 모르지만 멋진 글귀가 좋아서 그냥 낭송(朗誦)했고 음률이 너무 좋아서 암송했다. 나는 김소월(金素月)의 시를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김소월 시를 모방(模倣)해서 몇 수를 지어 국어선생님께 보였더니 잘 썼다고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청춘기에 들어선 내가 모르는 미지(未知)의 세계의 또 하나 수수께끼 같은 답을 알게 되는 것은 축복(祝福)이다. 톨스토이의 “인생보감”을 얻어 밤을 지시며 읽었다. 그리고 자기 양심(良心)에 부끄럼 없이 처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진부(陳腐)한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런 진리적 교훈(敎訓)은 영원한 인생보감(人生寶鑑)이다.

독서(讀書)를 하면서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할지언정 절대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 않는 정직함을 배웠다. 모르는 미지세계를 점차 알아가면서 오묘한 지식에 대한 호기심에 충만 된 나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줄곧 책만 읽었다. 감동(感動)을 주거나 재미를 보태주는 책은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반급의 애들로부터 많은 책을 빌린 학생이 나였다. 도서실의 예쁘장한 여선생은 나를 여간 귀여워하지 않았다. 방학 후 귀가해서 늘 마을회관에 있는 신문, 잡지를 보러가곤 했다. 그리고 또래 애들에게 제집에 있는 책을 한권씩 갖고 오라고 했다. 반급학장이었던 나는 권리와 명성을 ”권위적(權威的)“으로 활용했다.

소학, 중학 시기는 난독(亂讀)시기였다. 무어나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나는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계열의 책도 좋아했다. 커서 처음 세계 문학명작을 접하게 된 나는 낮에는 수험공부, 밤에는 명작탐독을 병행(竝行)시켰다. 그 무렵 나는 장차 작가가 되느냐 학자가 되느냐 무척 고민했다. 결국 책이 좋아서 글쓰기에로 용왕매진(勇往邁進)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장차 사람들에게 지식(知識)을 가져다주는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활자중독자(活字中毒者)란 숙어(熟語)를 고안했다. 책이 인간을 육성(育成)한다는 논리이다. 독서는 늘 홀로서기 (獨立)의 사고력을 육성하는 기반(基盤)이 된다. 정신적 자극, 긴장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의 진폭(振幅)을 넓혀준다. 나는 마치 만경창파(萬頃蒼波)를 날아예는 해연(海燕)마냥 지식의 바다에서 많은 서책을 탐독(耽讀)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또는 나 자신에 필요한 영양분(營養分)을 섭취했다. 독서의 여러 종류 영양가는 독서의 폭을 넓히고 여러 장르, 영역을 섭렵(涉獵)하는 것에서 온다. 독서의 폭이 좁으면 하나의 지식에 절대시 하는 치명적 함정(陷穽)을 파게 된다. 하나의 기성지식을 절대시하는 것은 결국 사고정지(思考停止) 상태에 빠지게 된다.

책은 자기인간형성의 정신적 힘이다. 독서를 배제(排除)한 정신적 힘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순수한 활자중독자(活字中毒者)이다. 그리고 수시로 변화하는 미몽(美夢)을 꾼다. 독서야말로 내 자신이 인간형성이 완성되는 공정(工程)이기도 하다. 요즘은 컴퓨터시대, 휴대폰시대이다. 인간은 이미 컴퓨터와 휴대폰의 노예로 디지털의 지배에 길들여졌다. 희극(喜劇)인지 비극(悲劇)인지 간파를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책의 시대의 활자중독자(活字中毒者)이다. 책의 노예(奴隸)가 되고 싶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사네”하고 읊은 어느 시인의 말을 “나는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로 화답(和答)한다. 독서를 대신(代身)할 지복(至福)의 희열을 지금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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