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諸葛亮, 181년 음력 7월 23일 ~ 234년 음력 8월 2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고 후한 말 군웅(群雄)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형주(荊州)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의 익천(翼千)을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諸位)에 오르자 승상(丞相)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蜀漢)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魏)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攻略)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중국 역사상 지략(智略)과 충의(忠義)의 전략가로 많은 이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그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유선(劉禪)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며 이를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평하는 명문(名文)으로 꼽히고 있다.
생애
제갈량(諸葛亮)의 생애는 크게 형주(荊州) 시절에 입촉(入蜀)과 유비(劉備)가 죽기 전에 그리고 유선대에 이르러 남정(南征)과 북벌(北伐)을 할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출생 및 융중 시절
181년 낭야군(琅邪郡)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형은 제갈근(諸葛謹)이고 친동생은 제갈균(諸葛均)이다.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諸葛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荊州)로 이주하였다. 그는 양양(襄陽) 인근의 융중(隆中)이란 마을에서 학문(學文)과 농사로 소일했는데 이 시기에 지었다는 양보음(梁父吟)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당시 형주는 전란(戰亂)을 피해 온 명망 높은 문인들이 많았는데 제갈량(諸葛亮)은 이들과 활발히 교류(交流)하였다. 이는 그가 양양 지역의 유명한 문인이며 대부호였던 황승언(黃承彦)의 사위였다는 점이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야의 현인(賢人)으로 상당한 명성(名聲)을 얻게 되었다.
유비의 참모로 출사함
당시 유비(劉備)는 여남(汝南)에서 조조(曹操)에게 패한 후 유표(劉表)에게 의탁(依託)하고 있었는데 제갈량(諸葛亮)의 명성을 듣고 융중(隆中)으로 직접 찾아와 제갈량을 자신의 모사(謀士)로 두었다. 이 때 만들어진 고사가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다.)이다. 사실 삼고초려는 제갈량이 스스로 유비에게 출사(出仕)했다는 구주춘추(九州春秋)나 위략(魏略)의 기록과는 다르다. 반면 출사표와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서는 유비가 세 번 만에 제갈량(諸葛亮)을 만났다는 정황이 보이기 때문에 현재에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배송지(裴松之)가 주석(註釋)을 남기니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의 표(表-즉, 출사표)에서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어 신의 초려(草廬)를 세 번 방문하시고 당세의 일을 물으셨다’고 했으니 즉 제갈량이 먼저 유비(劉備)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 분명하다. 비록 듣고 본 것이 서로 달라 이런 저런 말이 각각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 어긋나고 위배(違背)되는 점이 이 정도에 이르니 또한 실로 괴이(怪異)한 일이로다.
선제(先帝)께서 신을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셔서 세 번이나 몸을 낮추어 초려를 찾아주시고 신에게 친히 형세(形勢)의 일을 물으시니 신은 감격(感激)하여 선제께 이 한 몸 바치리라고 결심(決心)하였습니다. – 출사표 중
이후 화북(華北) 일대를 석권(席卷)한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공격해오자 남쪽으로 퇴각(退却)하는 유비(劉備)를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비는 조조군의 추격을 받아 당양(當陽)에서 패주(敗走)하는 등 위기에 몰리지만 유표(劉表)의 장남 유기(劉琦)의 구원으로 강하 지역에 둔병(屯兵)하여 한동안 소강상태(小康狀態)를 이루었다. 이후 조조가 동진(東進)하자 손권(孫權)에게 사신으로 가서 반 조조 동맹(同盟)을 성사시켰다. 결국 208년 11월 손·유 연합군이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기에 이른다. 연의(演義)에서는 제갈량(諸葛亮)이 조조군의 화살을 소진(燒盡)시키거나 제사를 지내 동남풍을 부는 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가공(加工)이다.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赤壁大戰)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記錄)이 없다. 정사 삼국지 “선주전(先主傳)”과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는 유비가 패주하는 조조군을 남군까지 추격(追擊)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참모로 종군(從軍)하거나 병참 등을 담당한 듯하다. 이후 유비(劉備)가 형남(荆南) 4군(장사, 계양, 무릉, 영릉)을 정벌할 때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임명되어 행정(行政)과 병참(兵站)을 담당하였다. 즉 내정에서의 수완은 유비(劉備)에게 인정받은 듯 보인다.
입촉 및 촉한의 건국
형주(荊州) 남부를 장악한 유비(劉備)는 이후 서촉(西蜀)을 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211년 한녕(漢寧)의 장로(張魯)가 유장(劉璋)을 공격하자 유비는 이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서천(西川)으로 출병하였다. 결국 212년 유비와 유장과 전쟁이 발발(勃發)하자 형주 병력을 이끌고 서촉(西蜀)으로 진격한다. 연의에서는 방통(龐統)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參戰)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涪水關)을 공격하자 바로 서촉으로 진군(進軍)하였다.
214년 유장(劉璋)이 항복한 후 ‘군사장군(軍師將軍)’에 임명이 되는데 이후 유비가 황제(皇帝)를 칭할 때까지 이 직위에 머물러 있었다. 군사장군이란 직위가 이름을 붙여 만든 잡호직(雜號職)에 속하므로 이 시기에는 유비(劉備) 정권 내에서 제갈량의 위상이 높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 가후전(賈詡傳)에서 조조가 제갈량(諸葛亮)의 정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권한(權限)이 상당했으리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법률인 촉과(蜀科)를 만들고 익주(益州)의 국가적 구조조정(構造調整)에 참여하였다.
219년 유비(劉備)와 조조(曹操)간의 일생일대의 격전인 한중공방전(漢中攻防戰)이 발발한다. 반년 간에 걸친 전쟁은 유비의 승리로 끝나는데 연의의 기록에서는 갖가지 계책(計策)을 펼쳐 조조군을 격파한 핵심 브레인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 한중공방전에서 유비를 수행한 참모는 법정(法正), 황권(黃權)이었다. 이 시기 제갈량(諸葛亮)은 성도(成都)에 있었으며 병참(兵站)과 보급을 담당했다.
이후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된 후에도 계속 군사장군(軍師將軍) 직에 있었고 221년 유비가 황제(皇帝)에 오르자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에 취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諸葛亮)은 유비의 양자 유봉에게 관우(關羽)를 구하지 않은 죄로 죽게 했는데 이를 나중에 유비(劉備)가 알자 제갈량을 크게 책망(責望)했다. 이에 제갈량은 유봉이 살아있으면 후주(後主)가 위험하다는 말을 하여 유비를 설득시켰다. 유봉(劉封)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유선(劉禪)이 제위에 오르는 데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제갈량은 과거 원소(袁紹)와 유표(劉表)의 예를 들며 후계자 문제가 복잡한 세력은 결국 망했다는 말로 유비를 진정시켰다.
222년 선주(先主: 유비를 말함)는 손권(孫權)의 공격으로 패사한 관우(關羽)의 복수를 위해 동오(東吳)를 공격하는데 이때도 성도(成都)에 머물며 내정과 병참을 관장하였다. 223년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패한 선주가 백제성에서 병사하자 상서령(尙書令) 이엄(李嚴)과 함께 탁고(託孤)를 받아 후주(後主: 유비의 장남 유선을 말함)를 보좌할 고명대신이 되었다.
남정
선주가 죽고 후주가 즉위하자 승상(丞相), 녹상서사(錄尙書史), 익주목(益州牧) 및 사례교위(司隸校尉)를 겸하며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14년 동안 촉한의 재상으로써 실권(實權)을 행사하였다.
225년 당시 익주(益州)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雍闓), 고정(高定), 주포(朱褒) 등이 손권(孫權)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반기를 들자 제갈량(諸葛亮)은 직접 남정에 나섰다. 촉의 남중(월준, 건녕, 장가, 영창)은 유언(劉焉)과 유장 부자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부터 이민족(異民族)과 토착 호족(土着豪族)들이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한중공방전(漢中攻防戰) 기간에도 반란이 일어나 이엄(李嚴)에 의해 진압당한 전례가 있었다. 제갈량(諸葛亮)의 남정은 225년 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 계속되었으며 칠종칠금(七縱七擒: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다.)의 고사를 남기며 성공적으로 진압(鎭壓)되었다. 하지만 칠종칠금의 고사는 일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맹획(孟獲)이 반란의 주모자(主謀者)로 등장하지만 맹획은 촉한과 친화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축융부인(祝融夫人), 올돌골(兀突骨) 및 목록대왕(木鹿大王) 등도 연의에서 만들어낸 가공인물(架空人物)이다. 남정의 성과 중의 하나는 구리광산의 개발(開發)이었는데 이는 촉한이 발행한 화폐(貨幣)의 품질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북벌
227년 제갈량(諸葛亮)은 선주의 유조를 명분으로 위(魏)나라에 대한 북벌군을 일으켰다.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上奏文)이 바로 유명한 출사표(出師表)이다. 이는 350자로 되어 있으며 선주에 대한 충성과 후주에 대한 당부가 담겨있다. 북벌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8년간 다섯 번 이루어졌다. 제갈량은 북벌 기간 동안 전쟁이 없는 상황에도 한중(漢中)에 상주했는데 이 기간 촉한(蜀漢)은 준전시 체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벌
228년 봄 제갈량(諸葛亮)은 사곡(옹주 서부)과 기곡(장안의 서쪽)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다. 이 때 사곡(斜谷)의 본진은 제갈량이 지휘하였고 기곡에 파견된 별동대의 지휘관은 조운(趙雲)이었다. 위의 명제(明帝)는 조진(曹眞)을 도독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고 조진(曹眞)은 장안과 가까운 기곡(箕谷)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제갈량이 사곡에 진출하자 옹주(雍州) 일대의 호족들이 일제히 호응하였고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 3군을 점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후계자로 평가되는 강유(姜維)가 귀순하였다. 반면 기곡 전선에서는 조운의 별동대(別動隊)가 조진에게 밀려 한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이 때 위연(魏淵)은 1만의 병사로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넘어 장안(長安)을 급습하는 “자오곡 계책(子午谷計策)”을 진언하였다. 당시 장안은 무능하다고 알려진 관중(關仲)도독 하후무(夏候楙)가 지키고 있었는데 위연(魏延)은 열흘 동안 신속하게 행군하여 자오곡(子午谷)을 지나 장안을 기습(奇襲)하면 하후무(夏候楙)가 도주(逃走)할 것이고 이를 통해 장안을 점령하면 위군은 사례주(司隸州) 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즉 전선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촉한이 옹양주(雍楊洲)를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각종 위험부담(危險負擔)을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명제는 자신이 직접 관중(關中)으로 출병하는 한편 당시 위나라 제일의 용장으로 꼽히던 장합(張郃)에게 5만의 군사로 제갈량(諸葛亮)의 본진을 상대하게 하였다. 장합은 사곡(斜谷)과 한중(漢中)을 잇는 가정(街亭)으로 진격하여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遮斷)하고자 하였고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방어하게 하였다. 하지만 마속은 협곡(峽谷)을 막아 방어하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무시한 채 산위에 둔병(屯兵)하였고 장합의 포위전술(包圍戰術)을 맞아 고전하였다. 왕평(王平)과 고상(高翔)이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대패하였다. 보급로가 끊긴 촉군은 한중으로 퇴각(退却)하였고 1차 북벌은 실패한다. 이후 제갈량은 마속에게 패전(敗戰)의 책임을 물어 처형했는데 이 과정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 또는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제갈량은 후주에게 표를 올려 북벌 실패에 대한 사죄(謝罪)의 의미로 스스로 우장군(右將軍)으로 지위를 낮추었지만 재상의 권한은 유지하였다.
2차 북벌
같은 해 가을 제갈량(諸葛亮)은 진창(陳倉)으로 진격하였다. 진창은 조진(曹眞)의 부하 장수인 학소(郝昭)가 불과 1천명의 병력으로 수비(守備)하고 있었는데 그는 20일에 걸친 촉군(蜀軍)의 공격을 막아내는 저력(底力)을 보였다. 이후 조진이 낙양(洛陽)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출병하고 식량까지 떨어지자 제갈량(諸葛亮)은 한중으로 귀환(歸還)하였다. 이 때 복병전(伏兵戰)을 통해 조진군의 장수인 왕쌍(王雙)의 추격군을 격파하였다.
3차 북벌
229년 제갈량은 진식(陳式)에게 무도(武都)와 음평(陰平)을 기습하게 하였다. 무도와 음평은 옹양주(擁凉州)와 촉을 직접 잇는 메인 루트로 이곳을 점령하면 익주(益州)의 방어가 용이해진다는 장점(長點)이 있었다. 위나라에서는 옹양주도독 곽회(郭淮)가 진식의 촉군을 맞아 싸웠는데 제갈량의 본진이 건위로 진격하자 곽회는 무도와 음평을 포기(抛棄)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자 양측은 소강상태(小康狀態)에 진입하고 제갈량은 한중(漢中)으로 귀환하여 기회를 엿보게 된다. 무도와 음평을 점령(占領)한 공으로 제갈량은 승상직(丞相職)에 복직하였다.
이후 해가 바뀌어 230년이 되자 조진(曹眞)은 군세를 3로로 나누어 반격(反擊)을 시도하였다. 조진의 본진은 사곡(斜谷)에서 한중(漢中)을 공격하고 사마의(司馬懿)와 장합(張郃)의 2로군은 각각 상용(上庸)과 무도(武都)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갈량(諸葛亮)은 성고(成固)에 본진을 두고 방어하였다. 이후 계속된 여름장마로 도로가 유실되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위군은 퇴각하였다. 그해 가을 제갈량은 위연(魏延)에게 강중(羌中)으로 진출하게 하여 곽회(郭淮)의 위군을 상대하게 했다. 위연은 양계(陽溪)에서 곽회군을 대파하였다.
4차 북벌
231년 제갈량(諸葛亮)은 다시 기산(祁山)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위나라는 조진(曹眞)이 병사하고 사마의(司馬懿)가 대촉 전쟁의 메인으로 기용(起用)된다. 4차 북벌부터 제갈량은 목우유마(木牛有馬)를 사용하고 둔전(屯田)을 강화하는데 이는 매 북벌(北伐)에서 문제가 된 군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촉군은 상규에서 가을보리를 수확(收穫)하는 한편 비요(費搖), 곽회(郭淮)의 위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노성(鹵城)에서 촉군과 위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데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被害)를 입었으나 촉군의 승리로 끝난 듯하다. 노성 전투 이후 사마의(司馬懿)는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바라보며 수비만 함)로 수정하고 수비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병참을 담당한 이엄(李嚴)의 태업이 발생하였고, 촉군은 다시 군량부족(軍糧不足)으로 퇴각하였다. 사마의는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합(張郃)에게 촉군을 추격하게 하는데 장합은 목문도(木文道)에서 촉군의 매복계(埋伏計)에 걸려 전사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은 이후 조정에 복귀하여 표기장군(票騎將軍) 이엄(李嚴)과 거기장군(車騎將軍) 유염(劉琰)에게 북벌 실패의 책임을 물어 탄핵(彈劾)하여 실각시킨다. 이 와중에 상당한 마찰(摩擦)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3년 동안 북벌이 중단(中斷)되었다.
5차 북벌
234년 제갈량(諸葛亮)은 북벌을 재개하였다. 기존의 북벌이 7 ~ 8만 정도의 병력으로 이루어진데 반해 5차 북벌은 10여 만의 병력이 투입(投入)된 최대 규모였다. 촉군은 오장원(五丈原)에 둔병하여 위군과 대치했는데 위군인 총수인 사마의(司馬懿)는 견벽거수(見辟擧守) 전략을 고수하였다. 제갈량은 위군이 전투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도발(挑發)했으나 사마의는 수비로만 일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4개 월 간의 대치(對峙) 끝에 그해 8월 과로로 쓰러져 진중에서 병사(病死)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촉군은 양의(楊義)의 지휘아래 한중(漢中)으로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의(楊儀)와 사이가 나빴던 위연(魏延)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왕평(王平)과 마대(馬代)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제갈량(諸葛亮)의 영구(靈柩)는 성도(成都)로 운구(運柩)되어 유언대로 한중(漢中)의 정군산(定軍山)에 매장(埋葬)되었다. 자손들에게 남긴 재산으로는 뽕나무 800그루와 척박한 농토 15경이 있었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이때 제갈량(諸葛亮)은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북두(北斗)를 향해 기도(祈禱)한 뒤 7일간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 수명이 12년 연장된다는 의식(儀式)을 행했지만 6일째 되는 날 위군의 기습(奇襲)을 알리려고 온 위연(魏延)이 등을 밟아 불이 꺼지는 것으로 묘사(描寫)한다.
평가
제갈량(諸葛亮)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평가는 정사 “삼국지(三國志)”에 실린 진수(陳壽)의 평이다.
제갈량(諸葛亮)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提示)하고 시대에 맞는 정책을 내고 마음을 열고 공정(公正)한 정치를 행하였다. 이리하여 영토(領土)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벌(刑罰)과 정치는 엄격(嚴格)했는데도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그의 마음가짐이 공평하고 상벌(賞罰)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년 군세(軍勢)를 동원하면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건대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군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진수(陳壽)는 제갈량(諸葛亮)을 정치가 및 행정가로써 높이 평가하였지만 군사적 능력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배송지(裴松之)는 진수의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곤형(棍刑; 머리를 깎고 근신토록 하는 형벌)을 당했기 때문에 진수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제갈량(諸葛亮)을 비판한 것이라고 주장(主張)하였다. 하지만 후일 진수가 진(晉) 무제에게 올린 상소문(上疏文)에서 제갈량을 관중(管仲)과 소하(蕭何)에 버금간다고 극찬(極讚)한 것을 감안하면 배송지의 주장은 신빙성(信憑性)이 떨어진다. 또한 이를 근거로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陳式)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 역시 설득력(說得力)이 부족하다. 진서(晉書)에서 진수(陳壽)의 아버지는 가정 전투(街亭戰鬪)에서 마속(馬謖)의 부장으로 종군했다가 패전 후 곤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을 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반면 진식(陳式)은 한중공방전(漢中攻防戰)에 종군했고 유비의 동오 복수전(東吳復讐戰)에서도 수군 지휘관이었으며 제갈량의 3차 북벌에서 무도 공략(武都攻略)을 지휘한 고위급 장수였다. 진식과 같은 핵심인사(核心人士)가 마속의 부장으로 종군할 리는 없으며 패전으로 곤형(棍刑)을 당한 인사가 무도 공략전과 같은 중요한 전투의 지휘관으로 임용(任用)되는 것도 개연성(蓋然性)이 낮다.
제갈량(諸葛亮)은 새로운 법률인 촉과(蜀科)를 제정하고 신상필벌(信賞必罰)을 명확하게 하였다. 이는 제갈량의 정치관이 법가(法家)에 기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덕망(德望)이 높은 사람들을 관리로 기용(起用)했다는 점에서 유학(儒學)을 경시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가 승상에 재임한 기간 동안 촉한의 경제 규모(經濟規模)가 크게 성장했다는 점에서 경제 정책 면에서도 유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내정(內政)과 치국(治國)의 측면에서는 관중(官仲)과 소하(蕭何)에 비견될 정도의 찬사(讚辭)를 받았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기본기와 정공법(正攻法)을 중시한 지휘관으로써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책략가적(策略家的) 면모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즉 제갈량(諸葛亮)의 군사적 특기는 책략(策略)이 아닌 부대 운용(部隊運用)이었다. 이를 기록한 문헌(文獻)들은 다음과 같다.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진영이 잘 정돈(整頓)되어 있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號令)이 분명했다.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제갈량은 부대를 교묘하게 통솔(統率)하였으며 군령은 엄명(嚴明)하였다. – 진양추(晉陽秋)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제갈량을 화공(火功) 및 반간계(反間計)의 명수로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실제 역사의 제갈량(諸葛亮)은 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화공을 사용한 적이 없으며 반간계(反間計)의 활용 빈도 역시 낮았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의 화공은 주유(周瑜)가 사용한 것이지 제갈량이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위연(魏延)이 제안한 자오곡(子午谷) 계책을 거부한 것으로 볼 때 속공(速攻)이나 야습(夜襲)과 같은 위험부담이 있는 작전 역시 선호하지 않은 듯하다. 즉 전반적으로 정적(靜的) 스타일의 작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군략이 장기가 아니었다는 진수(陳壽)의 평은 상당한 설득력(說得力)을 가진다. 하지만 의외로 동적(動的)인 측면도 있다. 복병 전술을 자주 구사(構思)하였고 이를 이용해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임기응변의 책략(策略)에 능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根據)로 군사적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주장(主張)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반론(反論)이 있다. 먼저 실제 전쟁의 경우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책략 못지않게 부대운용 능력의 중요성이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1차 북벌 당시 조운(趙雲)의 별동대로 당시 위군의 총수(總帥)였던 조진(曹眞)의 본진을 유인한 점, 3차 북벌이 기습의 형태로 이루어진 점, 그리고 매복계(埋伏計)를 이용한 복병전에 능통했다는 점은 책략가(策略家)로써의 능력 역시 수준급이었다는 근거로 사용된다. 특히 당시 위나라 제일의 전략가인 사마의(司馬懿)가 4차 북벌 시 노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見辟擧守: 벽을 맞대고 수비만 함)로 수정했다는 점을 보면 제갈량(諸葛亮)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제갈량(諸葛亮)이 위연(魏延)의 자오곡 계책을 채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군사적 안목이 없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사실 자오곡(子午谷) 계책은 지금의 시각으로도 꽤 혁신적인 작전(作戰)이었고 성공했을 경우 촉한이 위나라 서부를 석권(席卷)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먼저 1만의 군사(전투병 5천, 보급병 5천)가 험준한 산악지역을 700여리나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피로 누적(累積)에 의한 전투력 저하를 감수해야 했다. 위연은 자오곡을 지나 장안(長安)을 급습하면 수비군의 사령관인 하후무(夏候楙)가 도주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장안(長安)이 요새화된 도시임을 감안하면 쉽게 함락(陷落)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특히 장안의 위군이 농성전을 벌이는 동시에 기곡(箕谷)에 있는 조진(曹眞)의 본진에서 구원군을 파견하면 위연(魏延)의 별동대는 고립되어 패퇴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기본을 중시하고 모험(冒險)을 선호하지 않는 제갈량으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작전이었다.
결국 제갈량(諸葛亮)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진수(陳壽)가 말한 “임기응변의 장략(將略)이 장기가 아니었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군사적 능력(能力)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를 제갈량의 책략 구사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반면 제갈량을 옹호하는 이들은 책략가(策略家)로써의 역량이 정치가로써의 역량과 비교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그마저도 비범(非凡)한 수준이었으며 그의 군사적 능력은 부대운용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평가(評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논란과는 별개로 당시 사람들은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이는 다음의 기록(記錄)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제갈량은 군사적 능력이 무능(無能)한 것이 맞다. 일례로 가정 전투가 제갈량(諸葛亮)의 군사적 능력이 매우 무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마속(馬謖)에 대해서는 유비(劉備)조차 “마속은 말은 그럴듯하게 잘하는데 실행력(實行力)은 없고 좋은 말솜씨에 비해 능력은 무능해서 하는 일마다 실패(失敗)한다. 마속에게는 아무 일도 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가정 전투(街亭戰鬪)를 진행하기에 앞서 지휘관을 선발해야 했는데 제장들이 한결 같이 무략이 뛰어난 위연(魏延), 관록이 많이 쌓인 오의(吳懿), 위나라에서 귀순했기 때문에 위나라 사정을 잘 아는 왕평(王平) 중에서 지휘관을 선발하라고 조언(助言)했으나 제갈량은 이 모든 조언들을 죄다 무시한 채 끝내 마속을 지휘관(指揮官)으로 임명해서 가정전투를 대패하게 만들었고 결국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결과물을 냈다. 그런데 제갈량은 객관적인 근거나 마속의 능력을 보고 선발(選拔)한 것이 아니라 마속이 자신의 친구인 마량(馬良)의 친동생이라는 점 하나만 보고 지휘관으로 선발했다. 결국 마속의 무능함으로 가정전투에서 대패(大敗)했고 이로서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함이 증명되었다.
제갈량이 위수(渭水) 유역으로 진격하자. 관중(關中)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 세설신어(世說新語)
제갈량(諸葛亮)이 병으로 죽자 제장들은 둔영을 불태우고 퇴각했다. 선제(宣帝: 사마의를 말함)께서 출병해 이를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楊儀)가 북을 치며 군사들을 되돌리니 다시 맞서 싸우려는 듯 했다. 선제는 “궁지(窮地)에 몰린 적은 몰아붙이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과연 양의는 결진(結陣)한 채 떠났다. 다음 날 선제는 제갈량이 진을 쳤던 자리에 가서 남은 흔적을 살펴보고 도서와 양곡을 많이 노획(鹵獲)했다. 그제서야 제갈량이 죽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 “그는 과연 천하의 기재(奇才)로구나.” – 진서(晉書) 선제기(宣帝記)
제갈량(諸葛亮)이 죽고 비의(費禕)는 강유(姜維)의 북벌을 반대하며 말했다. “승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겠소? 차라리 한신(韓信) 같은 영웅이 나타나기 전까지 기다림만 못하오.” – 삼국지(三國志) 비의전(費禕傳)
제갈량(諸葛亮)의 북벌은 위나라를 멸하여 한실을 회복하는 것이 명분이었겠지만 실제 현실적인 목표는 옹·양 2개주를 점령(占領)하여 국력의 신장을 꾀하고 중원 진출을 수월하게 한다는 평가가 타당하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진태전(陳泰傳)”에 그 기록이 나온다. 제갈량집에는 이엄(李嚴)이 구석을 권하자 답신을 통해 “북벌에 성공하면 십명(십석)도 받을 수 있는데 하물며 구석이야”라는 발언(發言)을 한 기록이 남아있다.
배송지(裴松之)는 제갈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신 송지가 보건데 육손(陸遜)은 손권(孫權)이 후퇴하고 위나라가 자기 쪽으로 전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걱정했는데 그가 거대한 위세(威勢)를 나타내어 적이 감히 침범(侵犯)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배를 타고 물의 흐름을 따라가면 아무런 근심도 없으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어찌 부장들을 파견해 작은 현을 급습(急襲)하고 저자에 있는 자들을 놀라 달아나게 하고 부상당하거나 죽은 자까지 나오게 하겠습니까? 천 명을 포로(捕虜)로 잡든 죽였든 위나라에 손해(損害)를 입힌 점에서는 부족한 것이므로 단지 무고한 백성을 이유도 없이 가혹(苛酷)하게 처리한 것입니다. 제갈량이 위수 유역(渭水流域)에서 전개한 군사 행동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용병(用兵)의 이치를 위배하는 일은 규율(規律)을 잃어 흉악한 일이 이에 응하는 것입니다. 이런 천벌(天罰)을 받을 행위를 하였기에 제갈량(諸葛亮) 본인은 피를 토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 첨과 손자 상이 난도질을 당해 죽은 것은 어찌 이 재앙(災殃)이 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갈충무기(諸葛忠武記)에 이르길: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였는데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생존하였을) 때 소사(小史)를 지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어 나이가 1백여 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諸葛丞相)은 지금의 누구와 더불어 비교 할 만한가?” 하니 자신과 비교(比較)할 만하다 여겨 마음으로 자못 자긍(自矜)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갈공(諸葛公)께서 계실 때에는 또한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사온데, 공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분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제갈량(諸葛亮)이 송나라에 환생하여 송나라 황제를 지략으로 보좌해 줄 슈퍼히어로의 역할을 해 주길 바라는 심정에서 천재 지략가(智略家)로 묘사되었으나 실존인물 제갈량은 그 두뇌(頭腦)가 우수하긴 하나 삼국지 전체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인물은 아니었고 ‘천재(天才)’라는 호칭에는 어울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삼국지연의와는 정반대로 주유(周瑜)가 제갈량보다 더 뛰어난 지략가이며 주유 이외에도 가후(賈詡), 곽가(郭嘉), 정태(鄭泰), 육손(陸遜), 순욱(荀彧), 전풍(田豊) 등 제갈량보다 똑똑한 사람들은 지천에 널렸다. 다만 제갈량의 행정능력 및 경영능력(經營能力)이 뛰어난 것은 맞다. 확실한 것은 제갈량의 군재는 하후돈(夏侯惇)보다 약간 뛰어난 수준에 불과할 뿐 전체최고급은 아니라는 점이다.
제갈량(諸葛亮)의 키는 8척(184 cm)에 풍모(風貌)가 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친형인 제갈근(諸葛瑾)은 말처럼 머리가 길고 못생겼다고 묘사(描寫)되어 있으므로 이 사실은 신빙성(信憑性)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제갈량(諸葛亮)의 용모에 대해 백옥 같은 피부에 흰 학창의(鶴氅衣)와 백우선(白羽扇)을 가진 모습이 신선과 같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제갈량은 깡마른 체구에 피부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았으나 눈빛에 힘이 있으며 기품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제갈량의 아내인 황씨는 ‘황두흑색(노란 머리, 검은 피부)’에 키가 8척(184 cm)이나 되어 여자로서의 매력(魅力)이 부족하였다고 전해진다.
제갈량이 유비(劉備)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제갈량은 그의 출사표(出師表)에서 삼고의 예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제갈량을 영입하자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는 불만을 품었는데 유비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水魚之交)’이라고 하여 그들의 불만이 없어졌다고 한다.
출사표에서 제갈량(諸葛亮)이 직접 언급한 뽕나무와 척박한 토지는 제갈량이 청빈(淸貧)했음을 알려주는 일화라기보다는 ‘그 정도의 땅이 있으니 자손들이 먹고 살기에는 충분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익주(益州)에 있을 때 제방을 쌓았는데 ‘제갈제’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화정(火井)을 순시하자 그 후 불길이 더 거세졌다는 일화(逸話)도 있다.
제갈량이 운남 지역(雲南地域)을 정벌하고 오는 길에 노수(瀘水)에서 심한 풍랑을 만난다. 맹획(孟獲)이 풍습에 따라 마흔아홉의 사람의 머리로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고 하자 제갈량(諸葛亮)이 사람 머리 모양의 밀가루로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시초라는 이야기가 있다.
제갈노(諸葛弩)는 열 개의 화살을 연속해서 발사(發射)할 수 있는 연발식 연노이다. 제갈량이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출처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뿐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제갈노는 명나라 때 개량(改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갈량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표시로 볼 수 있다.
군율(軍律)에 있어서는 굉장히 냉혹했다. 자신이 그렇게 아끼던 인재이자 자신의 친구인 마량(馬良)의 동생 마속조차도 가정 전투의 책임을 물어 참수시켰을 정도였다. 때문에 아무리 아끼는 인재라도 원칙(原則)에 어긋나면 처벌한다는 의미로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원준(袁準)이 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 따르면 제갈량(諸葛亮)이 평소 군사들의 무장과 무기 상태를 언제나 최고 상태로 유지했고 진채와 병기, 그외 전쟁에서 쓰는 도구도 멋있고 정교(精巧)하게 꾸몄다고 한다. 촉나라 사람이 경박해 이렇게라도 해야 군대가 유지된다고 원환의 아들은 평했지만 이는 지역감정적인 발언(發言)이라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고 병사들의 사기를 최고 상태로 유지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제갈량의 수완과 배려(配慮)의 일환으로 봄이 옳다.
이릉 대전(夷陵大戰) 당시 촉의 진형을 보고받은 제갈량(諸葛亮)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진형(陣形)을 짠 사람을 참수(斬首)하고 당장 다시 진형을 짜라고 명령했으나 그 진형을 짠 사람이 유비(劉備)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결국 촉이 패하게 될 것이라 말하면서 크게 한탄(恨歎)했다. 결국 제갈량이 염려했던 대로 이릉대전에서 유비는 육손(陸遜)의 화공에 당해 패배했다.
중국에서 무속의 신으로 숭배(崇拜)된다. 이때는 ‘와룡선생(臥龍先生)’신이라고 부른다. 족보(族譜)가 엄청났다. 채모(蔡瑁)에게는 누나가 두 명이 있었는데 큰누나는 황승언(黃承彦)에게 시집갔고 둘째누나는 유표(劉表)에게 시집갔다. 제갈량은 황승언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한편 제갈근(諸葛瑾)은 제갈량이 유비(劉備)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오나라의 중신(重臣)이 되어 있었고 제갈량의 큰누나는 괴기(蒯琪)에게 시집갔는데 괴기는 괴량(蒯良), 괴월(蒯越)과 친족이다. 또한 제갈량의 작은누나는 방덕공(龐德公)의 아들인 방산민(龐山民)에게 시집갔는데 방통(龐統)은 방산민과 사촌형제 사이였다. 또한 위나라의 장수 제갈탄(諸葛誕)은 제갈량의 친척 형제였다. 결과적으로 황승언(黃承彦), 유표(劉表), 채모(蔡瑁), 방통(龐統), 괴기(蒯琪), 괴량(蒯良), 괴월(蒯越)이 모두 다 제갈량과 친인척인 셈이다.
친족 관계
제갈량이 황승언(黃承彦)의 딸인 황월영(黃月英)과 결혼한 관계로 채모(蔡瑁)와도 친인척관계(親姻戚關係)이다. 채모(蔡瑁)에게는 누나가 두 명 있는데 큰 누나가 황승언의 아내이며 작은 누나가 유표(劉表)의 아내이다. 즉 채모는 촌수상 제갈량의 처외숙부(妻外叔父)가 된다.
또한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제갈근(諸葛瑾)은 오나라의 중신으로 손권(孫權)의 가신이며 제갈량의 큰누나는 방덕공(龐德公)의 아들인 방산민(龐山民)의 아내인데 방산민은 방통(龐統)의 사촌형제다. 제갈량의 작은 누나 역시 형주의 유력 가문인 괴씨 집안의 일원인 괴기(蒯琪)의 아내인데 괴기는 괴량(蒯良), 괴월(蒯越)과 같은 일족이다.
한마디로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 10월 8일)은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재상, 정치인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서주 낭야국 양도현(陽都縣) 사람이다.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고 후한 말 군웅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는 제업(帝業)을 이루었다. 형주(荊州) 남부 4군을 발판으로 유비의 익천(翼千)을 도왔다. 221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승상(丞相)에 취임하였고 유비 사후 유선(劉禪)을 보좌하여 촉한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27년부터 지속적인 북벌(北伐)을 일으켜 8년 동안 5번에 걸쳐 위나라의 옹·양주 지역을 공략(攻略)하였다. 234년 5차 북벌 중 오장원(五丈原) 진중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중국 역사상 지략(智略)과 충의의 전략가로 많은 이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그가 위나라 토벌을 시작하면서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出師表)는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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