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劉備)의 생애
유비(劉備, 161년 음력 6월 7일 ~ 223년 음력 4월 24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재위: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이다. 자는 현덕(玄德)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가 한나라의 대통(大統, 임금의 계통)을 계승한 정통 국가라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皇帝)로 존칭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 열전(晉書列傳)에서 유비의 묘호(廟號)를 열조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추증(追贈)한 묘호이다. 유주 황건적 평정 이후 그 세력이 한창 상승할 때에는 유예주(劉豫州), 유좌장군(劉左將軍), 의성정후(宜城亭侯)라고도 불렸다. 유비는 어릴 때 돗자리를 팔면서 지내고 다음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의병으로 싸웠다.
출생
유비는 탁군(涿郡) 탁현(涿縣; 지금의 광저우) 출신으로 ‘한나라의 황손(皇孫)’으로 기록되었으며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 유홍(劉弘)을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生計)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5길이 넘는 뽕나무가 있어 가마 덮개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預言)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비(劉備)도 이 나무에 올라가 놀면서 “나도 이러한 덮개가 달린 가마(황제의 가마)를 탈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숙부 유자경(劉子敬)은 “함부로 말하지 마라. 구족(九族)이 멸한다.” 고 주의를 시켰다고 한다.
15살 때 유학길에 올라 노식(盧植)의 문하에서 수학한다. 이때 공손찬(公孫瓚)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독서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고 개나 말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며 화려(華麗)한 의복을 걸치거나 음악을 듣는 데에 몰두(沒頭)했다. 소싯적부터 명마(名馬)를 감별할 줄 알았으며 항상 말수가 적고,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의 난 때 장각(張角)은 청주(青州), 유주(幽州), 서주(徐州), 기주(冀州), 양주(揚州), 연주(兗州), 예주(豫州), 형주(荊州) 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혼란한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天下豪傑)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깊은 관계가 ‘도원결의(桃園結義)’ 의 전설(傳說)을 낳게 되지만 실제 ‘도원결의’ 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만의 허구(虛構)이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에 황건(黃巾)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劉備)는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황건적들을 토벌(討伐)하여 그 공적으로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독우(督郵)가 공무 때문에 안희현(安熹縣)으로 왔을 때 감찰사(監察史) 독우가 유비에게 찾아오고 유비를 벌하는 것만 생각하다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은 장비가 독우를 벌한다. 그러나 이것은 연의의 서술로 실제로는 유비가 독우(督郵)를 매질한 뒤 인수를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말뚝에 묶은 다음 관직(官職)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것은 유비를 정통으로 보는 연의의 작가 나관중(羅貫中)이 유비의 이미지를 미화(美化)하기 위해 장비에게 악역을 맡긴 것으로 해석된다.
얼마 후 유비(劉備)는 단양(丹陽)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임무를 맡은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와 행동을 같이하다가 하비(下邳)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하밀승(下密丞; 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다시 관직을 버리고 만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高唐尉; 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 하지만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公孫瓚)에게로 달아난다.
공손찬의 부하시절
공손찬(公孫瓚)은 유비의 동문으로 유비(劉備)에게는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친밀한 존재였다. 공손찬은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袁紹)와 싸웠는데 그가 자주 전공(戰功)을 세웠으므로 그를 평원의 상(相)으로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曹操)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는다. 이때부터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자사(豫州刺史)에 임명된 후 소패(小沛)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주위의 권유(勸誘)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공손찬 사후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劉備)는 조조(曹操)로부터 진동장군(鎭東將軍)에 임명되어 원술(袁術)과 대치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하비(下邳)의 수장인 조표(曹豹)가 배신하여 여포(呂布)를 불러들였고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는다.
유비(劉備)가 여포(呂布)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 보내고 유비는 소패(小沛)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패로 돌아온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생각하여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敢行)하였다. 유비는 패주(敗走)하여 조조에게 귀부(歸附)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呂布)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高順)을 보내 소패를 공격(攻擊)하였고 조조는 하후돈(夏侯惇)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와 하후돈은 고순에게 패배(敗北)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진다.
10월에 이에 조조(曹操)는 친히 여포(呂布)를 정벌하여 유비(劉備)와 함께 여포를 하비(下邳)에서 포위하여 사로잡고 여포를 참형(斬刑)에 처한다. 여포가 자신을 살려 쓰도록 조조에게 말하여 조조가 의심을 품자 유비는 여포가 행한 패악(悖惡)을 조조에게 말했고 조조도 이에 동의했다.
조조의 부하시절
유비(劉備)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左將軍)에 임명되고 조조에게 후한 대우(待遇)를 받았다. 유비가 왔을 때 조조의 참모 정욱(程昱) 등은 “유비는 영웅의 자질(資質)이 있고 민심을 얻고 있으므로 남을 섬길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죽일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헌제(獻帝)의 국구(國舅)인 거기장군 동승(董承)이 조조를 주살(誅殺)하라는 밀칙을 받고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加擔)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招待)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도 똑같이 기술(記述)된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계획(誅殺計劃)이 탄로 나기 전에 원술 토벌(袁術討伐)을 빙자해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난다. 그리고 원술을 멸한 후 유비는 하비를 점거(占居)하고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인 후 관우(關羽)를 남겨 하비(下邳)를 수비하게 한 뒤 소패(小沛)로 돌아온다. 이때 군현(群賢)들 다수가 조조를 배반(背叛)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孫乾)을 원소(袁術)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對抗)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원소의 부하시절
이때 조조는 왕충(王忠)과 유대(劉岱)를 보내 유비(劉備)를 공격하나 패배하게 된다. 200년 조조(曹操)는 유비를 토벌하고 유비는 또 다시 패배(敗北)하여 청주로 달아났다. 당시 청주자사(靑州刺史) 원담(袁譚)은 유비가 예전에 무재로 천거(薦擧)한 적이 있어 군사를 보내 유비를 맞아 보내고 원소(袁紹)에게 이를 알렸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고 업(鄴)에서 2백 리(80 km) 떨어진 곳까지 가 유비를 만나는 등 유비(劉備)를 대단히 환영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온다. 이때 원소(袁紹)와 조조(曹操)가 관도(官渡)에서 대치하게 되는데 여남(汝南)의 황건적(黃巾賊) 유벽(劉辟) 등이 조조에게 반기(反旗)를 들고 원소에게 호응(呼應)하자 원소에게 파견되어 유벽 등과 함께 허 아래를 약탈하였고 이때 조조에게서 달아난 관우(關羽)가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曹仁)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원소(袁紹) 밑을 벗어나려고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劉表)와 협공하도록 진언(進言)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汝南)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公盜)의 무리와 합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어 여남에 진을 치고 조조는 채양(蔡陽)을 시켜 공격하지만 채양은 패배(敗北)하고 전사한다. 조조는 원소를 격파(擊破한 후 몸소 남하해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표의 빈객
이 후 유비는 유표(劉表) 밑에 몸을 의지한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迎接)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받았고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新野)에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이 후 형주(荆州)의 호걸 중에 선주에게 귀부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지자 유표는 그의 마음을 의심하여 은밀히 제어(制御)하였다.
배송지(裵松之)가 “삼국지(三國志)”에 주석으로 인용(引用)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비(劉備)가 주연 석상에서 변소(便所)에 가서 허벅지에 살이 찐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 자국을 본 유표(劉表)가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떠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아 벌써 허벅지에 살이 붙고 세월이 흘러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功績)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한탄(恨歎)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월(蒯越), 채모(蔡瑁) 등이 연회를 이용해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的盧)를 타고 힘을 내라며 다그치자 놀랍게도 3길이나 뛰어올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배송지는 또 이 일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는 손성(孫盛)의 비판을 뒤에 덧붙였다.
삼고초려
서서(徐庶)가 제갈량(諸葛亮)을 추천하였으며 이에 유비가 세 번 찾아가 만났고 제갈량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제갈량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유비에게 말하며 유비(劉備)는 크게 기뻐한다. 장비(張飛), 관우(關羽)는 제갈량과 유비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는 그것에 불만(不滿)을 품으나 유비는 “물고기가 물 만난 것 같다”라고 하였고 장비, 관우 도 그것을 듣고 수긍(首肯)하였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별반 차이는 없으나 위략(魏略), 구주춘추(九州春秋) 등의 내용을 보면 제갈량이 유비를 직접 찾아갔다고 나온다. 그러나 진수(陳壽)는 출사표(出師表)를 참고하여 본전에 실었다. 제갈량은 소설과 다르게 지략가(智略家)의 면모보다 정치 쪽의 역할수행(役割遂行)을 하였고 형주(荊州)를 취할 때 제갈량은 군수물자(軍需物資)를 담당하는 역할임무를 맡고 훌륭하게 수행한다.
적벽의 싸움에서 삼국성립까지
한편 조조(曹操)는 하후돈(夏侯惇)과 이전에게 유표(劉表)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劉備)가 박망지역(博望地域)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비(劉備)는 자기 진영(陣營)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伏兵)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선 제갈량이 지휘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박망파 전투(博望坡戰鬪)는 205년으로 제갈량(諸葛亮)은 없었던 시절이고 유비가 지휘하여 하후돈(夏侯惇)을 격파한 것이다.
208년 조조(曹操)가 북쪽에서 내려오니 이때 형주(荊州)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4 km) 정도밖에 행군(行軍)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劉備)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進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依支)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曹操)가 기병 5천 명을 급파(急派)했기 때문에 유비(劉備)는 당양(當陽)의 장판파(長板坡)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劉表)의 큰아들 유기(劉琦)가 있는 하구(夏口)로 도망쳤다. 그 후 유비는 손권(孫權)과 동맹(同盟)을 맺어 적벽(赤壁)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武陵), 장사(長沙), 계양(桂陽), 영릉(零陵) 등 4군을 평정하였다. 그 후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자사로 추대했으므로 손권(孫權)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부인(孫夫人)과 결혼시켜 유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 썼다.
211년 익주자사 유장(劉璋)이 조조(曹操)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劉璋)의 별가종사(別駕從事)였던 장송(張松)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張魯)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은 법정(法正)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翼州)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蜀)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推測)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劉備)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龐統)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劉璋)은 몸소 마중 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行大司馬) 겸 사례교위(司隷校尉)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駐屯軍)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張魯)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恩惠)를 베풀어 인심 장악에 힘을 썼다.
211년 조조(曹操)가 손권(孫權)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劉備)에게 구원을 요청(要請)했으므로 유비는 유장(劉璋)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늙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 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激怒)했다. 때마침 장송(張松)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형 장숙(張肅)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處刑)된다. 이때부터 유비(劉備)와 유장의 사이는 매우 악화(惡化)되었다. 유비는 백수관(白水關)을 지키는 양회(楊懷), 고패(高沛)를 참살한다. 유비(劉備)는 지름길로 관중(關中)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黃忠), 탁응(卓膺)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涪城)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占據)했다. 유장(劉璋)이 유괴(劉璝)·냉포(冷苞)·장임(張任)·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성(涪城)에서 유비(劉備)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擊破)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緜竹)을 보전했다.
유장(劉璋)이 다시 이엄(李嚴)을 보내 면죽(緜竹)의 여러 군대를 감독(監督)하게 했지만 이엄(李嚴)은 부하들을 통솔(統率)하여 유비에게 항복(降伏)했다. 유비(劉備)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派遣)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降伏)시켰고 제갈량(諸葛亮),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江州), 강양(江陽)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關羽)만이 남아 형주(荊州)를 진수(鎭守)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雒城)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劉璋)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攻擊) 당한지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雒城)이 격파(擊破)되자 유비(劉備)는 제갈량(諸葛亮), 장비(張飛), 조운(趙雲)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포위하고 유장(劉璋)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자사(益州刺史)를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켜 촉한(蜀漢)의 기반을 구축(構築)했다.
215년 유비(劉備)는 형주(荊州)를 둘러싸고 손권(孫權)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江夏), 장사(長沙), 계양(桂陽)을 오나라에 양보(讓步)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馬超)와 장비(張飛)를 시켜 무도의 하변(下辯)을 취하게 하고 그 곳 이민족(異民族)들과 연계하여 무도(武都)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조가 조홍(曹洪)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 유비는 양평관(陽平關)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定軍山)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夏侯淵)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黃忠)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하여 하후연(夏侯淵)을 무찔러 죽였다. 이에 조조(曹操)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劉備)는 한중(漢中)을 끝까지 사수(死守)하며 상용(上庸)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위왕(魏王) 조조에 맞서 한중왕(漢中王)에 오른다. 한편 형주(荊州)에 있던 관우(關羽)는 위의 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공격하다가 손권(孫權)에게 배후를 찔려 전사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荊州)를 빼앗기고 만다.
촉한 성립과 유비의 죽음
220년(위나라 황초 원년) 위왕 겸 대장군 대 승상 조비(曹丕)가 한 헌제에게 강제로 선양(禪讓) 받아 황제(皇帝)가 되었는데 이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실제론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선 상당히 와전(訛傳)되었다. 그리고 제갈량(諸葛亮)은 유비(劉備)에게 황제로 즉위(卽位)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로 즉위했다. 연호를 장무(章武)로 하고 유선(劉禪)을 황태자(皇太子)로 세웠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칭제(稱帝)를 권했지만 전부사마(前部司馬) 비시(費詩)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疑心)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고조(漢高祖)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擊破)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三國志 蜀書 費詩傳).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左遷)한다.
유비(劉備)는 손권(孫權)이 관우(關羽)를 해한 것에 분노(憤怒)하여 오나라를 정벌(征伐)하려고 했었고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를 강하게 의식한 조운(趙雲)이 간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諸將)들을 이끌고 자귀(秭歸)에서 진군하여 무릉(武陵)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어 오계(五溪) 소수민족을 회유(懷柔)하고 진북장군(鎭北將軍) 황권(黃權)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統率)하게 하여 이릉(夷陵)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正史)의 기록으로 추정(推定)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蜀漢)의 군세는 4만 ~ 8만 명 규모의 익주(翼州) 본대와 형주(荊州) 유랑군과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6월, 육손(陸遜)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소지하도록 하여 화공으로써 유비군(劉備軍)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춘 뒤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張南),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 곳의 진영(陣營)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인산에 포진(布陣)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包圍),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崩壞)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大敗)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육손(陸遜)은 군사들을 이끌고 촉군을 계속 추격하였지만 조비(曹丕)가 이를 알아채고 오나라 강동(江東) 땅이 비어있는 틈을 타 오나라 본국을 공격하였기에 육손은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8월, 유비(劉備)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武縣)으로 돌아온다. 10월, 223년 4월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사망과 이릉전쟁(夷陵戰爭)으로 인한 화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諸葛亮)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李嚴)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永安宮)에서 63살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移葬)되었다.
그 후 유비의 후손들은?
263년 촉한(蜀漢)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劉禪)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옮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安樂公職)을 이었으나 영가지난(永嘉之亂)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嫡子孫)들은 절멸(絶滅)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安樂公)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桓溫)은 성한을 공략(攻略),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孫盛)은 유비의 증손자(曾孫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劉賢)을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後孫)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蜀漢昭烈皇帝)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진수의 평가
평한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諸葛亮)에게 탁고(託孤)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魏武帝)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領土)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器量)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容納)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육손의 평가
“유비(劉備)는 교활한 적이며 말은 번잡(煩雜)하게 꾸미는데 실속은 영웅의 기재(뛰어난선비) 가없는 한심한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소, “유비는 늘 매우 많은 실패(失敗)를 겪었고 또한 유비는 계략(計略) 세우는데 조밀(稠密)치 못하고 현재는 오랫동안 출병(出兵)하여 병사 또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오. “유비의 재능은 볼 것도 없이 떨어지고 병법(兵法)을 모르며 속과 겉으론 대범(大汎)해보여도 실속은 전혀 없으니 살펴보건대 “유비는 걱정할 가치(價値)가 없다고 할 수 있소”라고 평가(評價)한적 있다. "
후한서(後漢書) 세어지서(世語之書)에서 유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유비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해 꾀를 부리곤 했다.“ “모든 일에 속과 겉이 틀리며 본심을 늘 숨기며 남을 속이고 자기의 화(禍)를 피하기 위해 서슴없이 행동하였다.”
당환통서전에서 당태종이 유비를 평가한 것이 있다.
“무릇 군자라 한다면 속임수를 쓰지 않고 당당히 군을 통솔(統率)해 싸워 이겨서 나라를 취하는 법이다. “그러나 유비는 속임수로 유장(劉璋)을 속여 나라 안으로 들어와 배신(背信)하여 나라를 빼앗았으니 참으로 군자(君子)의 도리가 아니다”
습착치의 평가
“무릇 군자는 필이 인의(仁義)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법이다. 유비(劉備)가 유장(劉璋)의 땅을 습격(襲擊)하여 빼앗고 속임수로 일을 이루니 신의를 저버리고 정에 어긋나 크게 잘못된 점이로다”
조조의 평가
조조(曹操)가 말하였다.
“현덕(玄德)께선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을 어떻게 보시오?“
유비(劉備)가 말하였다.
“영웅(英雄)이라 생각합니다,“
조조가 말하였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劉備)과 나 조조뿐이오, 본초(袁紹)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 라며 유비(劉備)를 영웅으로 칭찬하였다. -선제전(先帝傳)-
주유의 평가
“유비(劉備)는 영웅다운 자태(姿態)를 갖고 있음으로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일찍이 유비는 학문은 즐겨하지 않고 술과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 했다고 선주(劉備)전에서 나온다. 모든 이들이 유비를 좋아하고 따랐으며 유비는 이에 무리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유비는 인의(仁義)를 중시한 나머지 앞에 보이는 이익을 놓치고 포기하는 것과 결단력(決斷力)이 부족하고 판단함에 있어 또한 부족한 인물로 묘사(描寫)한다.
삼국지정사(三國志正史)에서 기록된 유비(劉備)는 인의도 중시하지만 이익을 포기(抛棄)하지 않고 결단하면 신속하고 판단함에 있어도 고민을 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하는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유비 또한 큰 포부(抱負) 이루고 싶은 야망(野望)이 있는 영웅으로서 자질(資質)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국지정사 저자 진수(陳壽) 또한 유비는 조조(曹操)보다 용병술(用兵術), 지략은 부족했어도 남들에게 꺾일지언정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이는 소설 속에 나오는 유비(劉備)와 다른 면모이고 인의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과감성(果敢性)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수차례 패배(敗北)를 격고 실패와 좌절(挫折)을 느낀 유비이지만 그의 뜻은 전혀 위축(萎縮)되는 것은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의 대업이라는 꿈도 포기하지 않고 오로지 다시 일어나며 비로소 땅은 협소(狹小)하지만 나라를 세운 유비는 그야말로 영웅(英雄)의 기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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