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미성(天微星) 구문룡(九紋龍) 사진(史進)은 화주(華州) 화음현(華阴縣) 사가촌(史家村) 출신으로 사가촌장의 외아들이다. 상반신에 아홉 마리 용을 새겨 넣어 구문룡(九紋龍)이라 불리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호남아형(好男兒型)이며 성격이 호탕하다. 벼슬길은 오르지 않고 오로지 창칼쓰기에만 열을 올렸다. 자식 걱정을 하던 그의 어미는 화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비인 촌장은 이름난 무술가(武術家)들을 모셔와 아들을 가르치는 형편이 되었다. 이충(李忠)의 봉술 제자이며 108호걸 중 제일 처음 등장하는 호걸이다.
팔십만 금군(八十萬禁軍) 창봉교두(槍棒敎頭)였던 왕진은 당시 동경(東京)의 건달이었던 고구를 혼내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구(高俅)가 휘종(徽宗)의 사람이 되어 태위(太尉)에까지 오르자 왕진(王進)은 어미를 모시고 연안부(延安府)로 피신하였다. 가는 길에 들른 사가촌(史家村)에서 왕진은 봉 쓰기에 열을 올리던 사진(史進)을 만났다. 왕진은 사진의 실력을 지적하였고 치기가 발동한 사진은 왕진과 실력을 겨루었으나 패하고 말았다. 사진은 왕진을 스승으로 모시고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를 익혔다. 6개월이 지나 왕진은 연안부로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사진의 아비도 세상을 떠났다.
사진(史進)은 생업을 종들에게 맡기고 무예수련(武藝修練)에 열중하였다. 어느 날 소화산(少華山)의 산적패 두령인 진달이 화음현(華阴縣)을 지나던 중 사진과 대면하게 된다. 사진은 마을 사람들과 도적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었고 한 자루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를 들고 진달(陳達)과 싸워 그를 사로잡았다. 진달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두령인 주무(朱武)와 양춘(楊春)은 곧바로 사진에게 찾아가 눈물을 흘리고 용서(容恕)를 구하였다. 사진은 그들의 의기에 감복(感服)하여 진달을 풀어주고 잔치를 베풀어 소화산과 자주 왕래(往來)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화산(少華山)에 다녀오던 머슴 왕사의 실수로 산채의 서신이 사냥꾼 이길의 손에 들어간다. 이길(李吉)은 곧장 관아(官衙)에 이 사실을 알렸고 얼마 뒤 소화산 두령(頭領)들이 사진의 장원에서 잔치를 하던 현장을 포위한다. 사진은 왕사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듣고 소화산 두령들과 상의한 뒤 왕사를 죽이고 장원을 불 지른다. 갑작스런 불길이 치솟은 것을 본 관군은 뒤이어 대문을 열고 쏟아져 나온 사진과 소화산 두령들에 의해 혼란에 처한다. 혼란 속에서 이길(李吉)을 죽이고 관군을 물리친 사진은 그 길로 일탈의 길을 걷게 된다. 사진은 스승 왕진을 찾기 위해 연안부(延安府)로 떠났고 위주에서 노달(魯達), 적송림(赤松林)에서 노지심(魯智深)을 만나 와관사(瓦官寺) 패거리를 물리친다. 결국 스승을 찾지 못한 사진(史進)은 소화산의 두령이 된다.
두령으로 생활하던 어느 날 화주 자사(華州刺史)가 화가 왕의의 딸을 빼앗아 신부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홀홀단신으로 화주성에 들어갔으나 오히려 붙잡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노지심(魯智深) 또한 화주성에서 붙잡혔으나 양산박군의 계책에 무사히 구출(救出)되어 양산박에 들어가게 되었다. 기병군 팔표기 겸 선봉사 중 한 명으로 진달(陳達)과 양춘(楊春)을 부장으로 하여 망탕산(芒砀山)에 출정했으나 패하였고 동평부(東平府)에선 성 내부로 들어갔으나 사로잡혔다. 관군과의 싸움에선 동관(童貫)이 이끄는 관군을 물리쳤고 요나라 정벌에서도 활약하였다.
몸에 아홉마리의 용을 새겨 '구문룡(九紋龍) 사진(史進)'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부잣집 자제이다. 타호장(打虎將) 이충(李忠)과 80만 금군교두 왕진(王進) 등에게 무예를 전수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사가촌(史家村)의 대장원(大莊園) 주인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근처의 소화산(少華山) 산적 두목인 진달(陳達)을 잡았다 놓아주면서 이들 소화산 산적패와 우정(友情)을 쌓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인연을 계기(契機)로 관군에게 쫓기게 되었다. 스승이었던 왕진을 찾아가려 했으나 결국 못 찾고 별 수 없이 소화산 산적패에 합류하게 된다. 왕의라는 화공(畵工)을 도와주려다 옥에 갇히자 양산박에서 구출해주어 합류하게 된다. 동평부(東平府)를 칠 때 전부터 알고 지내던 창기(娼妓) 이수란의 집에 숨어 있다가 밀고(密告) 당해 잡혀 옥에 갇히기도 한다.
원소절(元宵節) 때 송강(宋江)을 따라 동경에 갔을 때엔 몰차란(沒遮攔) 목홍(穆弘)과 함께 술에 취해 반역(叛逆)의 노래를 부르다가 송강에게 쫓겨나기도 하는 등 철 없는 짓을 자주 한다. 그럼에도 전투 솜씨를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獨立)된 군사행동을 지시받기도 한다.
사진(史進)은 소설의 첫 부분에 나오는 영웅이면서도 막상 양산박에 합류한 뒤엔 눈에 띄는 활약을 못한다. 아무리 사진이 용맹(勇猛)하다 하더라도 경험부족의 패기(覇氣)를 앞세운 젊은이라는 한계를 가진 탓일까. 친구를 잘못 사귀어 소화산(少華山)에 잠시 있다가 산적은 싫다고 뛰쳐나오지만 결국 독자에게 노지심(魯智深)과 이충(李忠)을 소개해주는 역할만 한 채 다시 소화산으로 들어가 버린다.
양산박에 합류한 뒤에도 망탕산(芒砀山) 번서일당(樊瑞一黨)을 혼내주려다 오히려 당하고 술 취해 노래하다 쫓겨 돌아가고 기생(妓生)을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잡히는 등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귀순(歸順) 후엔 실력을 떨쳐 한 지역을 맡기도 하지만 기대엔 못 미치는 모습이다. 죽을 때조차 싸우다 죽는 게 아닌 기습(奇襲)에 당하는 여러모로 아쉬운 인물이다.
사가촌(史家村) 장원 주인(莊園主人)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무술에 관심이 많아서 아버지가 많은 재물을 써서 사부를 여럿 초빙해 무술을 배웠다. 구문룡(九紋龍)이란 별호는 솜씨 좋은 문신장이를 불러 몸에 9마리 용 문신을 새겨서 붙은 것이다. 무술만 신경 쓰고 농사일은 신경도 쓰지 않아 사진의 어머니는 잔소리를 하다하다 화병(火病)이 나서 죽었다.
그런데 고구(高俅)에게 밉보인 80만 금군교두 왕진(王進)이 모친을 모시고 야반도주(夜半逃走)했다가 도중 사가촌(史家村)에 들러 장원에 묵게 되었다. 우연히 왕진이 무술 수련(修練)중인 사진을 보고 '제법 하지만 빈틈이 있어 진짜 고수를 만나면 털릴 것'이라고 한마디 했다가 사진이 발끈하여 "그래? 그러는 댁은 얼마나 하시는데!" 하면서 사진(史進)과 시비가 붙었고 사진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왕진에게 털렸다. 왕진이 사진의 스승이 되기 전에 스승 한 명이 있는데 바로 타호장(打虎將) 이충(李忠)이다.
비로소 고수(高手)를 만났음을 실감한 사진(史進)이 스승으로 모시길 청하고 왕진(王進) 또한 신세진 것이 있어 사진을 정성껏 가르쳤다. 이렇게 반년 동안 18반 무예 전반을 다시 배우며 진정한 고수로 거듭나고, 고구의 추적을 두려워한 왕진은 결국 사가촌(史家村)을 떠나고 얼마 뒤 아버지마저 죽는다. 하지만 사진은 여전히 가사를 돌볼 생각은 안하고 무술 수련에만 전념(專念)했는데 예기치 못한 일로 인생이 꼬여버린다.
우연히 만난 사냥꾼 이길(李吉)이 소화산(少華山)에 산적이 들어서는 바람에 사냥을 못하다고 알려주자 이들을 토벌(討伐)하기로 결심한다. 때마침 쌀과 돈이 떨어진 산적(山賊)이 쳐들어오자 사진(史進)은 사람들을 모아서 반격하고 오히려 진달(陳達)을 사로잡는다. 그러자 소화산의 두령 주무(朱武)가 고육지책(苦肉之策)을 내놓았는데 양춘(楊春)과 함께 무장을 해체하고 사진을 찾아가서 자신들은 유관장(劉關張) 삼형제를 본받아 죽더라도 같은 날에 죽기로 했으니 자신들도 진달과 함께 관가에 넘기라고 애걸복걸한다. 그러자 사진은 이들의 의기에 감복하여 진달을 풀어주고 주무 일행도 단순히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답례로 선물을 보낸다.
이후 사진(史進)과 주무(朱武) 등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이것을 수상하게 여긴 이길(李吉)이 관가에 밀고하여 도적들과 결탁(結託)했다는 누명을 쓰고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결국 금붙이를 약간 챙기고 집에 불을 지른 뒤 관군과 싸워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소화산(少華山)으로 도주하며 그 와중에 숨어있던 이길을 발견해 요절(夭折)을 낸다. 주무 등이 한패가 되기를 권유하였으나 스스로 결백(潔白)한 몸임을 내세워 사양(辭讓)하고 스승 왕진(王進)에게 몸을 의탁하러 떠난다.
이후 왕진(王進)을 찾아 떠돌아다니다 위주(渭州)에서 노지심(魯智深)을 만나 친분을 맺는다. 그런데 노지심이 정백정을 때려죽이고 도주(逃走)하자 하릴없이 위주를 떠나 연주로 갔다. 그러나 끝내 허탕을 치고 노자마저 떨어져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이때 대상국사로 가던 도중 와관사(瓦官寺)를 점령한 도적 최도성과 시비가 붙은 노지심을 만나고 둘이 힘을 합쳐 사찰에 들어와 온갖 추태를 부리던 최도성(崔道成)과 구소을(丘小乙)을 죽인다. 노지심은 다시 대상국사(大相国寺)로 떠나고 사진(史進)은 딱히 신통한 수가 없어서 소화산 도적패에 합류해 첫째 두령이 된다.
이후 등장이 없다가 노지심(魯智深)이 양산박 합류를 권하러 소화산(少華山)으로 오면서 비로소 재등장한다. 그런데 그 시점이 58회로 굉장히 늦다. 심지어 그땐 화주(華州)의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찔러 죽이려다 화주에서 붙잡혀서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분기탱천(憤氣撐天)한 노지심이 홀로 사진을 구하려 했지만 오히려 붙잡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양산박에서 두 사람을 구출(救出)하러 장병을 파견한다.
그런데 원군을 이끌고 온 인물이 누구냐 하면 표자두(豹子頭) 임충(林冲), 청면수(靑面獸) 양지(楊志), 쌍편(雙鞭) 호연작(呼延灼), 소이광(小李廣) 화영(花榮), 벽력화(霹靂火) 진명(秦明)과 그리고 애당초 노지심(魯智深)과 같이 소화산(少華山)에 온 사람은 행자(行子) 무송(武松)이다. 하나같이 수호전에서도 S급 장수들이다. 그러나 이 S급 장수들이 화주(華州)에서 활약하는 일이 없었다시피 거짓말처럼 갑자기 튀어나와 지나가던 숙원경을 납치해 위장해서 한 방에 구출작전(救出作戰)이 성공한 것은 넘어갈 이야기다.
이런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양산박에 합류하고 혼세마왕(混世魔王) 번서(樊瑞)와 싸움에서 선봉을 자처했다. 그런데 번서가 도술을 쓰는 바람에 어이없이 패하며 체면을 구겼다. 이후 양산박이 동평부(東平府)를 공략할 때 자신이 떠돌이 시절 인연(因緣)이 있었던 기생 이수란의 집을 몰래 있다 들이치려 했지만 기생을 믿을 수 없다는 오용(吳用)의 말마따나 이수란에게 배신당해 잡히는 처지가 돼버린다. 그래도 고대수(顧大嫂)를 통해서 양산박에서 성을 치는 혼란 통에 탈옥(脫獄)하기로 계획을 짰지만 감옥 안에 달력이 없기 때문에 미리 약속한 날짜를 착각(錯覺)해서 감옥 안에서 폭동을 일으켰다가 포위당한다. 다행히 이변(異變)을 눈치 챈 양산박에서 난전 끝에 동평(董平)을 생포하고 성을 공략하면서 사진(史進)을 구출했다. 하여간 이 도련님은 뭘 해도 어설픈 도련님은 동평부(東平府)를 함락시키자 사진은 자신을 팔아넘긴 이수란과 그녀의 가족들을 쳐 죽인다. 결국 108 호걸이 모두 모인 뒤 마군 8 호기(虎騎) 겸 선봉사(先鋒使) 직위를 얻는다.
사진(史進)은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의 등장하는 인물로 108성 중 23위이자 천강성(天罡星)의 천미성(天微星)에 해당한다. 용맹스러운 미남자로 상반신에 9마리의 청룡(靑龍)을 본 따 만든 멋진 문신을 하고 있어서 구문룡(九紋龍)이라는 별호로 불린다.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의 명수로 108성 중 소설 상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다.
화주(華州) 화음현(華陰縣) 사가촌(史家村)의 대장원주(大莊園主)의 아들이며 농사일을 싫어하고 매일 무예를 연마하는 데에만 매달렸다. 이에 어머니는 화병으로 죽었으며 아버지는 사진에게 농사일을 시키는 것을 포기(抛棄)하고 7 ~ 8여명의 봉술(杖術) 스승을 찾아 주거나 등에 청룡 무늬 문신을 새겨주었다. 어느 날 밤 언제나처럼 정원에서 봉술 연습을 하고 있던 도중 고구(高俅)에게 쫓겨 도주 중이던 금군교두(禁軍敎頭) 왕진(王進)에게 "소질은 있지만 빈틈이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사진(史進)은 왕진에게 한 수 시합을 제의했지만 단번에 패하고 말았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왕진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自請)해 왕진에게 무예십팔반(武藝十八般)을 배웠으며 6개월 뒤 왕진은 사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친 뒤 연안부(延安府)로 길을 떠났다.
그 뒤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잠시 가업(家業)을 이었으며 주변에 있던 소화산(少華山)의 산적인 주무(朱武), 진달(陳達), 양춘(楊春)이 사가촌(史家村)을 습격해오자 진달과 일대일 승부에서 승리해 진달을 붙잡았다. 이후 주무와 양춘이 아무런 무기 없이 단 둘이서 사진(史進)에게로 가 진달의 석방을 요청하였고 사진은 이들의 의협심(義俠心)에 반해 진달을 석방한 뒤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관원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인 뒤 자신을 산적의 두령으로 삼으려는 세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고 방랑(放浪)의 길에 나섰다.
이후 스승인 왕진(王進)을 만나러 가는 도중 들른 위주(渭州)에서 제할(提轄)을 맡고 있던 노달(魯達)과 의기투합(意氣投合)했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그 뒤 와관사(瓦官寺)에서 노달과 다시 만나 와관사를 거점으로 노상강도를 하고 있던 최도성(崔道成)과 구소을(丘小乙)을 퇴치했으며 이후 노달(魯達)과 다시 헤어져 전국을 방랑한 끝에 소화산으로 들어가 두령이 되었다.
몇 년 뒤 화주(華州)의 태수(太守)가 북경(北京)의 화가인 왕의의 딸과 강제로 혼인하려 하자 이에 분노해 태수를 죽이려 하였으나 반대로 잡혀 버렸다. 그 때 노지심(魯智深) 등 양산박(梁山泊)의 호걸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했으며 노지심의 추천으로 소화산(少華山)의 산적들과 함께 양산박으로 들어갔다. 이후 탕산(碭山)의 번서(樊瑞) 일당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나섰으나 패배했고 동평부(東平府) 전투 당시에는 성 내부로 잠입(潛入)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08성 집결 이후에는 기병군(騎兵軍) 팔호장(八虎將) 겸 선봉사(先鋒使)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며 관군과의 싸움에서 동관(童貫)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수많은 장수를 상대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 뒤 방랍(方臘)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석수(石秀) 등 5명의 두령과 함께 정찰에 나섰으나 적에게 발각되어 궁술(弓術)의 명인인 방만춘(龐萬春)이 날린 화살에 목을 맞고 사망했다. 즉 조정에 귀순(歸順)한 후엔 요의 초명옥, 조명제, 경요납연을 죽이고 방납의 장수 심강, 진성을 살해하는 등의 공적(功績)을 세웠다. 하지만 방납 토벌 중에 욱령관에서 소양유기 방만춘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한다. 방납 토벌때 흡주(翕州) 욱령관을 치기 위해 석수(石秀), 이충(李忠), 설영(薛永), 진달(陳達), 양춘(楊春)과 함께 정탐(偵探)하던 중 적장 방만춘(方萬春)이 쏜 화살에 혼절(昏絶)했다. 다른 장수들이 그를 구해 말에 태워 달아났으나 매복하고 있던 뇌형과 계직의 군사들이 쏜 쇠뇌에 맞아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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