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암성(天暗星) 청면수(靑面獸) 양지(楊志)의 별명은 푸른 얼굴 짐승이라는 뜻의 청면수(靑面獸)이다. 얼굴엔 푸른 반점(斑點)이 있고 붉은 머리칼에 누리끼리한 눈자위를 가졌다고 묘사(描寫)되어 있다.
개봉(開封)의 금군교관(禁軍敎官)이었는데 전국 각지의 수석을 관찰하기 즐겼던 송나라 황제 휘종(徽宗)의 취향에 맞추어서 돌과 바위를 운반하는 일을 주로 맡았었다. 그러다가 바위를 운반한 배가 침몰(沈沒)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도망가 전국을 떠돌다가 사면령(赦免令)이 내리자 수도로 돌아오는데 이 때 양산박(梁山泊)을 지나가다가 마침 임충(林冲)과 한 판 붙게 된다. 임충이 탈옥(脫獄)해서 양산박에 신세를 지려 하자 당시 두령이었던 왕륜(王倫)이 임충을 시샘해서 '양산박에 들어오려면 사람 한 명의 목을 가져 오슈'라고 명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양지(楊志)가 걸린 것이다. 둘 다 명색이 전직 금군교관이라 승부가 나질 않게 되고 이를 본 왕륜은 양지를 산채로 끌어들여 임충을 견제(牽制)하려 하지만 벼슬자리를 다시 얻는 게 급했던 양지는 이를 거절(拒絶)하고 수도로 돌아온다.
수도로 와서 가산을 다 털어 뇌물(賂物)을 바쳤지만 윗선은 빼먹고 아랫선에만 기름칠을 하는 실수를 범해 복직(復職)은 실패한다. 차라리 양산박(梁山泊)에 남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잣돈 마련하려고 가보인 검을 팔려다 시장의 아주 악질 건달 몰모대충(沒毛大蟲) 우이(牛二)라는 놈과 시비가 붙게 된다.
우이(牛二)는 양지(楊志)의 칼이 왜 이렇게 값이 비싸냐고 시비를 걸자 양지는 '쇠를 자를 수 있으며 날이 나가지 않고 머리카락을 날에 대놓고 훅 하고 불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고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우이는 사기(詐欺)를 치지 말라며 1번과 2번을 시험해보는데 다 그대로 되었다. 하지만 3번을 시험하려고 하자 양지는 사람을 벨 수 없으니 개를 끌고 오라고 하자 우이는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다고 했는데 개를 끌고 오라니 사기가 아니냐!"면서 되지도 않는 시비를 걸어댔다. 결국 열 받은 양지는 인내심(忍耐心)이 끊어져 우이의 목을 베어 죽이고 자수를 하는데 양지의 말마따나 그때 칼에는 정말로 피가 묻지 않았다. 결국 3번도 사실이었고 실험하고 보여줬으나 당사자(當事者)는 못 본 것이다.
근데 얼마나 우이(牛二)라는 놈이 악질이었는지 주민들이 서로 양지(楊志) 편을 들어주었고 현령(縣令)도 오히려 매우 좋아하며 가벼운 귀양형벌만 내리고 만다. 귀양 간 대명부(大名府)에서 그의 성실성과 무예를 눈여겨 본 실력자 양중서(梁中書)의 눈에 들게 되어 대명부의 무술대회에 참가하도록 허락을 내렸고 자신의 명마를 빌려주었다. 여기에서 양지는 삭초와 무승부로 겨룰 정도의 실력을 자랑했다. 이렇게 하여 양지(蔡京)는 죄인에서 관군제할사(管軍提韓使)로 등용되었으며 양중서가 당시의 권력자 채경에게 보내는 10만금의 생일 선물(賂物)을 운반하는 책임을 양지에게 맡기게 된다.
양지(楊志)는 운반원들을 죄다 허접한 장돌뱅이로 위장하고 일반적으로 사람을 피해 밤에 이동하는 대신 허를 찔러서 낮을 택해 이동하는 치밀함을 보였지만 황니강(黃泥岡)을 지날 때 이미 소식을 들은 탁탑천왕(托塔天王) 조개(晁蓋) 일당의 몽혼약(曚昏藥)이 섞인 술을 마시고 죄다 털리고는 운 없는 인생에 좌절(挫折)하며 사건 현장을 떴다. 게다가 그동안 운반원들을 다그치는 바람에 부하들의 원한을 사서 조개 패거리와 한 일당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어 피해 다니다가 초정(焦挺), 노지심(魯智深)을 만나게 되고 조정의 계략으로 이룡산(二龍山)을 탈취해 산적의 두령이 되었다. 호연작(呼延灼)의 양산박 토벌 과정에서 양산박에 합류하였으며 지난 날 임충(林冲)을 만났던 일과 황니강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8표장 중 한 사람이며 검을 들면 그 검술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하여 상대가 없었다고 묘사된다. 급선봉 삭초와의 필마단기(匹馬單騎)에서도 잘 드러났고 두령 중에서도 무력으로는 탑을 다투는 표자두(豹子頭) 임충(林冲), 정예부대 지휘관이었던 쌍편(雙鞭) 호연작(呼延灼)과도 무승부를 낸 적이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지날수록 대규모 전쟁신이 주를 이루는 수호지에서 검수가 활약하기란 어려웠던 모양이다. 마지막 방납(方臘) 토벌전 초반에 덜컥 병에 걸려 단도현(丹徒縣)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끝내 사망했다. 천암성(天暗星)의 화신인 인물인데 별 이름에 어두울 암(暗)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글자 그대로 상당히 암울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다.
3대 장군가의 후손으로 오후(五候) 양영공(楊令公)의 손자이기도 하다. 제사관(制使官)으로 지내다가 황제의 화석강(花石綱)을 운반하는 도중 난파(難破)를 당해버렸다. 떠돌던 그는 다시 복직하려 했으나 태위 고구(高俅)의 노여움을 사서 실패한다. 생활고 끝에 할 수 없이 가보인 보도를 팔다가 시비가 붙어 몰모대충(沒毛大蟲) 우이(牛二)라는 건달을 죽이고 자수한다.
북경(北京)으로 유배를 간 양지(楊志)는 안면이 있던 채태사(蔡太師)의 사위이자 북경 대명부(大名府) 유수사인 양중서(梁中書)의 눈에 들어 제할(提轄)로 승격하여 그의 밑에 지내게 된다. 채태사의 생일예물(生日禮物)을 호송하다 조개(晁蓋) 일행에게 강탈당하고 오히려 일행들에게 공범으로 고발까지 당하자 노지심(魯智深)과 함께 이룡산(二龍山) 산적패에 들어간다. 관군의 장수 호연작(呼延灼)이 공격을 해오자 양산박의 힘을 빌릴 것을 제안하고 양산박(梁山泊)에 합류한다.
양산박에 합류하는 과정이었다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죽을 때까지 되는 일이 없었던 불우(不遇)한 일생이었다. 처음엔 큰 역할을 할 것 같은 인물로 보이지만 이룡산(二龍山)에서는 노지심(魯智深)과 무송(武松)에 가려진 느낌이며 양산박 합류 후엔 더욱 그렇다.
마군 팔호기(馬軍八虎騎)에 임명되어 팔방위의 하나를 맡았지만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진 못하며 방납(方臘) 토벌 중에는 느닷없이 병에 걸려 그대로 죽고 만다. 얼굴의 반점은 오타반점이라는 병인 것 같다.
양지(楊志)는 관서 출신으로 북송(北宋)의 명장 양업(楊業)의 후손이다. 집안이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명문가(名門家)로 자신도 무관이 되기를 희망했다. 키가 7척 6촌이고 얼굴에 푸른 반점이 있어 청면수(靑面獸-푸른 얼굴의 짐승)라고 불린다. 칼 쓰는 솜씨가 뛰어나고 어릴 적부터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를 익혀 무과에 급제하여 전사제사를 지냈다.
북송 때 운하를 통해 기이한 암석과 나무를 실어다 나르는 일을 '화석강(花石綱)'이라 불렀다. 양지도 이 화석강을 운반하였으나 강을 건너던 중 풍랑을 만나 모두 잃고 도망자 생활을 했다. 이후 전국에 사면령(赦免令)이 내려지자 복직을 위해 동경(東京)으로 폐물을 가지고 가던 중 양산박 근처에서 임충을 만난다. 폐물(幣物)을 지고 가던 짐꾼을 임충(林冲)이 습격했기 때문이다. 양지와 임충은 50합이 넘도록 겨루었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결국 이를 지켜보던 양산박 두령 왕륜(王倫)이 둘을 말린 후 산채에 들였다. 왕륜은 임충을 견제하기 위해 양지를 들이려 했으나 양지(楊志)는 이를 거절하였고 곧바로 동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경에 도착한 양지는 태위 고구(高俅에)게 폐물을 바치며 복직을 희망하였으나 폐물의 양이 적다는 이유로 양지를 복직(復職)시키지 않았다.
며칠 동안 방황하던 양지(楊志)는 묵고 있던 여관의 방값도 내기 힘들어지자, 가문 대대로 전해오는 보도(寶刀)를 팔기위해 거리로 나선다. 천한주교 다리 근처에 이르자, 동경 시내를 어지럽히는 무뢰배인 몰모대충(沒毛大蟲) 우이(牛二)를 만난다. 우이는 양지의 칼을 보고 시비를 걸었다. 여러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양지는 우이를 죽이게 되고 곧바로 자수(自首)하여 북경 대명부로 유배된다.
북경에서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던 중 북경의 실세인 유수사(留守使) 양세걸(梁世傑)의 눈에 띄어 연무대회(演武大會)에 출전하게 된다. 양지는 북경의 장수인 주근을 쓰러트리고 삭초(索超)와 호각(互角)을 이루었다. 양세걸은 양지의 무예실력을 높이 사 관군제할사(管軍提韓使)에 봉한다. 양세걸은 장인인 태사 채경(蔡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각종 금은보화(金銀寶貨)가 담긴 생신강(生辰綱)을 양지에게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개 패거리에 의해 생신강을 강탈(强奪)당하고 또다시 도망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재기에 실패한 양지(楊志)는 자살을 하려 했으나, 청주에서 주막을 하는 조정을 만나 이룡산(二龍山)을 추천받게 된다. 산 아래에서 쉬고 있던 중 노지심과 합세하여 이룡산 보주사(寶珠寺)의 주지인 등룡(鄧龍)을 죽이고 산채를 차지한다. 후에 호연작(呼延灼)의 도화산 토벌을 계기로 양산박에 합류하여 기병군 팔표기 겸 선봉사 중 한명이 되고 양림(楊林)과 주통(周通)을 부장으로 하였다.
양지(楊志)는 중국의 사대기서(四大奇書) 중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의 등장하는 인물로, 108성 중 17위이자 천강성(天罡星)의 천암성(天暗星)에 해당한다. 얼굴에 커다란 푸른 점이 있다 하여 청면수(靑面獸)라는 별호로 불린다. 북송(北宋) 초의 영웅인 양업(楊業)의 후손이며 무예는 양산박(梁山泊) 인물들 중 최고급의 실력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무관의 자손이며 양지(楊志) 또한 무관으로서의 길을 택했다. 젊은 나이에 무과(武科)에 합격해 근위대장(近衛大將)격인 전사제사(殿司制使)에 임명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화석강(花石綱) 운반 도중 거센 풍랑을 만나 화석강을 실은 배가 침몰(沈沒)했으며 고구(高俅)에게 책임을 추궁(追窮)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후 전국에 사면령(赦免令)이 내려지자 다시 복직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고구에게로 가던 도중 임충(林冲)과 만났으며 임충을 단순한 노상강도로 생각하고 일대일 대결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양산박(梁山泊)의 두령 왕륜(王倫)은 양지를 임충과 경쟁시키면 자신의 지위를 지키면서 동시에 양산박의 전력이 강화(强化)될 것이라는 계산으로 양지와 임충에게 동시에 양산박에 들어올 것을 권했지만 자신의 죄를 사면 받고자 고구에게 가려는 양지를 설득(說得)하는 데 실패해 임충만이 양산박(梁山泊)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 동경(東京)에 도착한 양지(楊志)는 뇌물을 써서 고구를 만나 사면을 요청했으나 고구(高俅)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목숨을 부지해 준다는 조건으로 양지에게 동경(東京)을 떠나게 했다. 그러나 양지는 가진 돈을 다 써버린 상태였고, 결국 자신의 가보인 취모검(吹毛劍)을 팔기 위해 시장으로 갔다. 그 때 양지가 장사하는 것을 방해(妨害)하러 온 건달이 행패를 부렸고 결국 양지는 보검(寶劍)으로 건달을 살해했다. 이후 바로 관에 자수했으며, 살해당한 건달이 평판이 좋지 않았던 덕에 보검을 몰수당한 뒤 북경(北京)에 유배되는 가벼운 형벌(刑罰)을 받았다.
이후 유배지에서 양세걸(梁世傑)의 마음에 들어 다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다른 무관들의 반대로 인해 무술 시합을 하게 되었다. 양지(楊志)는 주근(周謹)과 싸워 승리한 뒤 삭초(索超)와 무승부를 이루었고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 제할사(提割使)로 임명되었다.
그 뒤 양세걸(梁世傑)은 양지(楊志)에게 자신의 장인인 채경(蔡京)의 생일 선물로 보내는 생신강(生辰綱)의 운반 역할을 맡겼으며 양지는 도적에 대한 대책을 충분히 강구했다. 하지만 생신강을 운반하는 수하들이 지쳐 어쩔 수 없이 조개(晁蓋)의 계략으로 약을 탄 술을 마셔 조개(晁蓋) 일당에게 생신강을 빼앗겼다. 또다시 임무에 실패한 양지는 자결을 시도했으나 다시 생각한 뒤 무뢰한(無賴漢)이 되기로 결의했다.
이후 정처 없이 전국을 방랑하던 양지(楊志)는 임충(林冲)의 제자였던 조정(曹正)과 임충의 의형제인 노지심(魯智深)을 만나 이룡산(二龍山)에서 산적 노릇을 했다. 그 뒤 이룡산의 산적들은 무송(武松), 시은(施恩), 장청(張靑), 손이랑(孫二郎)을 받아들여 양산박에 버금가는 세력을 자랑했으며 호연작(呼延灼)이 도화산(桃花山)을 공격하자 도화산의 산적들의 구원에 나서 양지는 호연작과 치열한 일대일 승부(勝負)를 벌였다. 이후 백호산(白虎山), 양산박이 구원에 가세했고 호연작이 패배하자 양지는 양산박에 합류했다. 이 때 과거 생신강 운반을 방해한 조개(晁蓋)와 다시 만났으나 호탕하게 한 번 웃고 그냥 넘어갔으며 그 뒤에는 양산박 군의 중추적(中樞的)인 역할을 맡아 주력(主力)으로 활약하였다.
108성 집결 이후에는 기병군(騎兵軍) 팔호장(八虎將) 겸 선봉사(先鋒使)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며 관군과의 계속된 전투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후 조정에서 양산박(梁山泊)의 귀순을 권하자 고구(高俅)를 죽이기 위해 임충(林冲)과 함께 반대했지만 결국 양산박은 조정에 귀순(歸順)하였다. 하지만 그 뒤에도 양지의 활약은 계속되었고 방랍(方臘)의 난을 평정한 뒤 병에 걸려 사망(死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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