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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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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108명 중 누가 송강의 최측근 심복이며 양산박 두목은 왜 송강인가?

108명 두령의 지휘 아래 관군과 대결을 펼쳤던 양산박(梁山泊) 사내들의 이야기를 다룬 중국 4대 기서(奇書) <수호전(水滸傳)>의 영상물 선전 포스터.


표자두(豹子頭) 임충(林沖, 천웅성, 제6위)이 백의수사(白衣秀士) 왕륜(王倫, 양산의 제1대 천왕)과 싸운 이후 탁탑천왕(托塔天王) 조개(晁蓋)는 임충, 지다성(智多星) 오용(吳用, 천기성, 제3위)등의 지지 하에 양산박(梁山泊)의 제2대 천왕(天王)이 된다. 그러나 조개가 사문공(史文恭)의 독화살에 목숨을 잃은 후에 양산의 두목(頭目)은 산동의 급시우(及時雨) 송강(宋江, 천괴성, 제1위)이 된다.

심복(心腹)은 중국의 여하한 조직에서도 존재하는 인맥현상(人脈現象)이다. 그리고 특수 환경 하에서 특수문제(特殊問題)를 해결하는 경로(徑路)의 하나이다. 하나의 울타리에는 세 개의 말뚝, 사나이 한 명에는 도와주는 사람이 3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두목(頭目)은 두목대로 어려운 점이 있고 일부 특수한 일은 심복들이 처리해주어야 한다. 고대에는 모사(謀士), 사야(師爺)가 있었고 현대에는 비서(祕書), 판공실주임(辦公室主任), 연락원(連絡員) 등등이 있다.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고나 할까.

송강(宋江)이 양산박의 두목으로 있을 때 심복(心腹)이 없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송강을 제외한 107명의 양산박영웅(梁山泊英雄)들 중에서 송강의 심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당연히 양산(梁山)의 여러 영웅들 중에서 대부분은 송강(宋江)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關係)가 있다고 볼 수 있고 대부분이 송강과 교분(交分)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복은 좁은 범위(範圍)여야 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어서는 곤란(困難)하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골라내야 한다.

만일 전략(戰略)을 짜고 인재를 망라하며 거시적(巨視的)인 측면에서 기획하고 조정하는 능력으로 따진다면 양산에서 지다성(智多星) 오용(吳用)에 비견(比肩)할 자가 없다. 입운룡(入雲龍) 공손승(公孫勝, 천한성, 제4위)과 신기군사(神機軍師) 주무(朱武, 지괴성 제37위)는 비록 능력이 있지만 송강을 대신하여 넓은 범위(範圍) 내에서 근심거리를 나누어 담당(擔當)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모두 송강의 각종 일들을 직간접으로 기획(企劃)하였으니 송강의 심복으로 이들을 꼽지 않을 수는 없다. 위치나 역할이 특수(特殊)하므로 이들은 제1그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전투를 하고 싸우는 것으로 강호(江湖)에 이름을 날린 사람을 들자면 대장 중에서는 행자(行子) 무송(武松, 천상성 제14위)이 책에서 정식으로 호보의(呼保義) 송강(宋江)과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은 형제이다. 벽력화(霹靂火) 진명(秦明, 천맹성 제7위)은 송강이 거둔 첫 번째 장수이다.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 천살성, 제22위)는 송강이 도산화해(刀山火海)로 들어가더라도 함께할 맹장(猛將)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송강의 심복(心腹)이라 할 수 있으니 제2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정보(情報)를 전달하고 곁에서 머무르는 사람을 든다면 신행태보(神行太保) 대종(戴宗, 천속성, 제20위)이 양산의 총책임자(總責任者)이다. 소온후(小溫候) 여방(呂方, 지좌성 제54위), 새인귀(賽仁貴) 곽성(郭盛, 지우성 제55위)은 송강의 곁을 따르고 있으니 빼서는 안 될 인물들이다. 당연히 송강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제3그룹이다.

만일 친하기로 따진다면 철선자(鐵扇子) 송청(宋淸, 지준성 제76위)이 송강의 친형제이다. 모두성(毛頭星) 공명(孔明, 지창성, 제62위)과 독화성(獨火星) 공량(孔亮, 지광성, 제63위)은 송강의 제자이다. 이들 세 사람은 당연히 송강의 심복이다. 제4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비록 이 4개 그룹에 속하지 않지만 송강에 대한 영향력이 이들 4그룹이상인 경우가 있다. 심지어 송강의 제일심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소이광(小李廣) 화영(花榮, 천영성, 제9위)이다.

어찌하여 송강(宋江)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4개 그룹에서 이름을 찾을 수도 없는 소이광(小李廣) 화영(花榮)이 송강의 제일심복(第一心腹)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하자면 아주 간단(簡單)하다. 송강이 아내 염파석(閻婆惜)을 살해 후에 갈 곳이 없던 송강(宋江)을 집안으로 받아들여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화영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이다. 송강으로 하여금 도적이 되도록 권유(勸誘)하고 끝까지 그를 따른 사람도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화영이다. 송강에 최초의 무장 세력(武裝勢力)을 준 사람도 화영이다. 송강이 자리에 없을 때 무리를 이끌고 양산(梁山)으로 오른 사람도 역시 화영이다.

즉 송강이 양산박(梁山泊)의 두목자리에 오르는 데는 화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송강(宋江)이 반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에 있어서는 화영이 핵심적(核心的)인 추진자일 뿐 아니라 유일한 협조자(協助者)이다. 오용(吳用), 공손승(公孫勝), 주무(朱武) 등의 역할은 송강이 양산에 가입한 이후의 일이다. 화영(花榮)은 송강과 연원(淵源)이 가장 깊은 인물이다. 이 점에서 다른 수호전(水滸傳)의 영웅들은 비길 수가 없다.

여하한 조직(組織)도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흑사회(黑社會)도 마찬가지이다. 송강은 비록 강호에서 광범위하게 존경(尊敬)을 받고 있었지만 강호에서 행세하는데 송강에게는 두 가지 약점(弱點)도 분명히 있었다. 하나는 은량(銀兩) 즉 돈이고 하나는 대오(隊伍), 즉 따르는 무리였다. 그에게는 집안재력(財力)이라는 것이 없었다. 즉 진정으로 반란(叛亂)을 일으키려면 송강은 가장 기본적인 돈과 사람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것은 맨손으로 집안을 일으킨 사람들이 공동(共同)으로 부닥치는 문제이기는 하다.

먼저 자금을 얘기해보자. 비교하자면 송강의 부친(父親)은 지주계급이다. 좋은 밭도 있었고 일꾼도 있었다. 작은 부자라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송강의 부친은 편안히 생활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반란을 일으키려면 턱도 없었다. 그래서 송강이 강호(江湖)에서 처음으로 찾아들어간 곳이 바로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 천귀성, 제10위)의 집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조달(資金調達)이었다. 시진의 집에서 송강은 반년을 머문다. 시진과 계속 얘기를 나누다가 두 사람이 합의(合意)를 달성하는데 여기에는 시진의 자금제공약속(資金提供約束)이 포함된다. 그리고 나서야 송강이 비로소 청풍채(淸風寨)로 화영(花榮)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 사람을 얘기해보자. 송강(宋江)이 화영(花榮)을 찾은 것은 한편으로는 확실히 화영이 여러 번 서신을 보내어 송강에게 피난(避難)할 것을 권유한 것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송강도 확실히 화영의 힘을 빌어 최초의 무장 세력(武裝勢力)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필경 화영은 청풍채(淸風寨)의 부채주이고 수중에 약간의 병력(兵力)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발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송강의 이 노선은 아주 정확(正確)했다.

시진(柴進)과 마찬가지로 화영(花榮)도 송강(宋江)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특히 청풍채(淸風寨)의 채주인 유고(劉高)가 송강을 체포(逮捕)하자 화영은 앞뒤를 생각지 않고 송강을 구해주고 자기의 병사를 이끌고 자기의 상사(上司)와 칼을 맞댄다. 직위를 잃는 것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간뇌도지(肝腦塗地)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수호전(水滸傳)의 영웅의 서열을 매길 때 화영이 제9위에 오른데 의문(疑問)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송강과 화영의 관계내력(關係來歷)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서 송강을 쫓아온 것을 제외하고도 화영(花榮)은 적극적으로 송강(宋江)을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진명(秦明)에게 항복을 받아 수하로 끌어들여 송강이 무장 세력을 건립(建立)하는데 대한 믿음을 강화시킨다. 진명을 받아들인 후 진명의 제자인 진삼산(鎭三山) 황신(黃信, 지살성, 제38위)도 곧장 가담한다. 송강의 대오는 금방 화영 1명에서 3명의 대장 화영, 진명, 황신과 3명의 보조 장수, 청풍산(淸風山)의 세 대왕 금모호(錦毛虎) 연순(燕順), 왜각호(矮脚虎) 왕영(王英), 백면낭군(白面郎君) 정천수(鄭天壽)가 공동으로 지지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이 소규모의 대오는 심지어 도화산(桃花山)의 타호장(打虎將) 이충(李忠), 소패왕(小覇王) 주통(周通)과 같은 산채에 도전할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송강(宋江)은 어떻게 진명(秦明)의 항복을 받아냈는가? 책에는 상세히 적어놓았다. 송강과 화영(花榮)이 계책을 내서 청풍산(淸風山)의 병력을 빌고 화영의 궁술(弓術)에 의지해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방법으로 진명의 부대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함정(陷穽)을 이용하여 진명을 생포(生捕)한다. 그리고 진명(秦明)이 청주(靑州)에 가서 도살(盜殺)한 것처럼 꾸며서 진명의 퇴로를 철저히 차단(遮斷)한다. 그리고 나서 송강은 진명의 복속(服屬)을 받아낸다. 중간에는 피비린내 나는 도살도 있고 암산(暗算)도 있다. 송강이 나중에 영웅들을 끌어들이는 수법(手法)은 먼저 진명을 다루면서 성숙된 것이다. 그 안의 기본적인 틀에는 화영의 피와 땀이 섞여 있다.

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명이 무고한 백성을 살해한 것으로 위장하였으므로 청주지부(靑州知府) 모용언달(慕容彦達)이 급한 나머지 진명의 일가를 살해한다. 심지어 진명의 처의 머리를 성벽(城壁)에 걸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진명은 처를 잃은 고통을 안고 송강(宋江)의 부대에 들어온다. 그리하여 송강(宋江), 화영(花榮)이 중매를 서서 화영은 친여동생을 진명(秦明)과 연결시켜준다. 화영의 용모(容貌)를 기준으로 추리해보면 화영의 여동생도 분명히 미인(美人)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철저히 진명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진명은 송강을 위하여 영웅(英雄)처럼 싸우는데 누가 화영의 용심양고(用心良苦)를 이해할 것인가?

여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나중에 공로(功勞)에 따라 서열(序列)을 정할 때 화영은 제9위에 오른다. 매부인 진명(秦明)은 제7위에 오른다. 이에 대하여 화영은 그저 웃어넘기고 만다. 송강에게 서열을 매기는데 있어서 고민(苦悶)하지 않도록 해준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경지(境地)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 하나의 일이 있다. 그런데 이는 다만 추측(推測)일 뿐이다. 도대체 누가 조개(晁蓋)를 살해하였는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疑問)을 품고 있다. 책에서는 증두시(曾頭市)의 교사인 사문공(史文恭)이 쏜 화살에 조개가 맞아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사문공(史文恭)은 강호의 유명인물(有名人物)인데 암전(暗箭, 몰래 쏘는 화살)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렇게 화살로 암살(暗殺)하는 것은 강호(江湖)에서 멸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이 소문나면 강호에서 발붙이기 힘들다. 둘째, 조개를 맞춘 화살은 사문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이 곳에 은 삼백 냥이 묻혀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문공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 만일 사문공이 몰래 조개(晁蓋)를 기습하려 했다면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셋째, 암전(暗箭)에 이름을 새겨두고 게다가 독화살이라는 것은 너무나 상식(常識)에 어긋난다. 논리적으로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 넷째, 조개가 죽기 전에 송강(宋江)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중에 누구든지 사문공을 붙잡으면 그를 천왕(天王)으로 삼으라고 유언한다. 이전에 여러 번 송강에게 천왕의 지위를 양보(讓步)하려했던 상황에 비추어보면 조개가 송강을 아주 신임(信任)해서 언제든지 천왕의 지위를 넘겨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죽기 전에 이렇게 이상한 유언(遺言)을 남긴 것일까? 조개가 혼미(昏迷)한 상태에서 한 말이기 때문일까? 다섯째, 노준의(盧俊義)가 나중에 사문공을 잡은 후에도 독화살에 관하여 심문(審問)을 하지 않고 급히 그를 죽여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뒤로 어떻게 된 일인지 언급(言及)이 없다. 이치대로라면 양산의 노영웅들 특히 임충(林冲) 같은 사람들은 독화살에 관하여 관심(關心)이 많았다. 임충은 아예 독화살을 조개의 신위 앞에 놓아두고 나중에 조사할 때 증거(證據)로 삼겠다고 까지 하였다. 아쉽게도 사문공(史文恭)을 붙잡은 것은 임충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일을 이렇게 끝이 난다. 사실 임충이 사문공을 붙잡았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임충의 무공(武功)은 사문공보다 약간 약했다. 아마 이 일을 추궁(追窮)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시간이 흘렀고 이 일은 이미 더 이상 주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조사(調査)한다면 골치 거리만 증가(增加)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상황(狀況)에서 누가 조개를 죽이고자 했을까? 첫째는 작자인 시내암(施耐庵)일 것이다. 축가장(祝家莊)을 세 번 치고 삼산이 다 모였는데 책을 쓰는 입장에서 당연히 송강을 제 자리에 갖다 놓아야 했고 노천왕을 물러나게 해야 했다. 둘째는 화영(花榮)이다. 송강의 비서실장(祕書室長)으로써 화영은 고심을 해서 송강을 양산박(梁山泊)의 두목으로 만들어야 했다. 목적(目的)을 위하여 그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일은 화영이 양산박(梁山泊)의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가능성(可能性)이 컸다. 그는 백발백중(百發百中)의 궁술을 지니고 있고 그 당시에 화살은 가장 유용한 공격수단(攻擊手段)이었다. 양산박에서 노(弩)를 잘 쏘는 낭자 연청(燕靑, 천교성, 제36위)와 돌맹이 던지는데 대단한 물우전(沒羽箭) 장청(張淸, 제16위)은 아직 양산에 오지 않은 때였다.

당연히 화영(花榮)이 이 일을 하고자 하더라도 난점(難點)은 있다. 화영이 어디서 사문공(史文恭)의 화살을 구했을까? 시천(時遷)이 훔쳤을까? 김대견(金大堅)과 소양(蕭樣)이 공동으로 해냈을까?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겠다. 어쨌든 음모(陰謀)였다.

양산박의 두목은 왜 송강인가?
수호지(水滸志) 70회본을 만든 김성탄(金聖歎)은 송강(宋江)을 최하로 평가했다. 그 이유는 첫째, 주인공 송강을 욕하게 하고 임충(林冲), 이규(李逵), 노지심(魯智深), 무송(武松) 등을 ‘허수아비 아닌 인물’로 띄우기 위해서이며 둘째, 송강의 이중성(二重性)을 보여줌으로서 반란(叛亂)과 전복적(顚覆的)인 내용을 담고 있는 수호지(水滸志)의 가치를 낮게 보이려는 의도에서다. 물론 김성탄이 진짜 송강을 싫어했을 수도 있고 지배층(支配層)을 의식한 정치적 인소(因素)일 수 있다.

김성탄(金聖歎)의 해석은 해석대로 두고 양산박(梁山泊)의 주인은 108명 중 송강(宋江)이어야 한다. 송강이 두목(頭目)이 되어야 양산박이 돌아간다. 송강의 성격이 ‘이중적이고 권력 지향적(權力志向的)이다‘라는 비판은 정치(政治)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조조(曹操)나 유비(劉備)는 송강보다 더한 후흑학(厚黑學)의 달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조조와 유비의 지도능력(指導能力)을 본받지만 욕하지는 않는다. 송강의 흠이야 얼굴이 검다든지 무술실력(武術實力)이 낮다든지 찾으면 많지만 거기에만 주목한다면 두목은 못 된다. 송강의 능력을 못보고 나쁜 점만 보면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나 될 뿐이다.

송강(宋江)이 왜 두목인가? 양산박 그룹은 2가지로 나뉠 수 있다. 이규(李逵), 노지심(魯智深), 무송(武松), 유당(劉唐) 등 밑바닥 도적떼 출신과 관승(關勝), 호연작(呼延灼) 등 관군 출신으로 구분(區分) 할 수 있다. 이 두 그룹을 통제(統制)할 수 있는 사람은 송강뿐이다. 송강은 압사시절(押司時節)에 고위급이 아닌 중간급 위치를 맡아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조율(調律)하는 능력을 터득(攄得)했다. 관승처럼 태어날 때부터 귀족(貴族)인 사람은 절대 부하들과 마음으로 소통(疏通)할 수 없다. 이규나 노지심처럼 태어날 때부터 밑바닥인 사람은 절대 윗사람에게 승복(承服)하지 않는다. 이 두 그룹은 평행선(平行線)을 걸을 수밖에 없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호걸(豪傑)들과 사귀기 좋아하는 송강만이 두 그룹을 통솔(統率)할 수 있다.

송강(宋江) 전에 1인자로 탁탑천왕(托塔天王) 조개(晁蓋)가 있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다. 조개는 역시 송강을 돋보이기 위한 인물(人物)에 불과하다. 두목은 조직 내 자기사람을 만들고 정치든 사업이든 시작해야 하는데 조개는 자기사람이란 황니강 사건(黃泥岡事件)을 함께한 유당(劉唐)과 완소3형제(阮小三兄弟)들 뿐이다. 이후 양산박에 들어오는 인재(人才)는 조개가 아닌 송강을 보고 들어왔다. 조개는 명목상 1인자 자리에 앉아 송강의 꼭두각시 짓만 했지 최측근 인맥(人脈)을 못 만들었다. 게다가 명분(名分)만 앞세워 투항한 양웅(楊雄)과 석수(石秀)를 양산박의 위상을 팔아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했을 정도로 사람들과 소통(疏通)이 안 된다. 조조(曹操)나 유비(劉備)는 인재라면 흠이 있어도 받았다. 곽가(郭嘉)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날라리였으나 미래를 보는 식견(識見)이 있어 조조가 무시하고 썼다. 법정(法正)은 성질이 불같아 과거 자기를 밉보이는 이는 찾아 죽였으나 유비는 최측근 참모(參謀)로 기용했다. 인재 하나가 아까운 양산박(梁山泊)에서 양웅과 석수 정도면 B급 정도 되는 인재인데 조개는 죽이려 든 거다. 두목 자격(資格)이 모자란다.

그럼 오용(吳用)이 두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용은 머리가 똑똑할 뿐이다. 일단 사람들은 뒤에서 계략(計略), 음모(陰謀)를 꾸미는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용이 송강(宋江)보다 똑똑하지만 인간적(人間的)이고 소탈한 매력(魅力)에서 송강에 밀린다. 한마디로 사람을 끄는 애교(愛嬌)가 없다. 뒤에서 조종(操縱)하고 양산박 전체 살림을 맡는 2인자 역할이 오용의 최대치(最大値)다. 이규(李逵)나 노지심(魯智深) 무송(武松)은 자기 성격 꼴리는 대로 사는 인간이라 두목이 되는 게 불가능한 건 당연(當然)하다. 임충(林冲)은 100만 금군(禁軍)을 지휘한 상 남자긴 하지만 아내를 잃은 뒤 세상에 대한 의심(疑心)이 많아졌다. 예를 들면 관승(關勝)이 투항 한 뒤 적을 설득(說得)하러 갈 때 임충이 적을 못 믿고 관승을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관승은 대인배(大人輩)라 적을 믿고 당당히 가지만 임충은 의심한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임충의 인지도(認知度)가 1개 군단을 통솔(統率)할 순 있을지언정 108명 전체를 통제(統制)하기엔 그릇이 작다는 얘기다. 관승은 너무 자신만만하고 의심이 없어 오히려 두목으로서 탈이다. 두목은 원칙(原則)을 지키면서 뒤로는 음모와 계략을 적절히 구사(構思)할 줄 알아야 하는데 관승은 그런 일에 적합(適合)하지 않는 개성(個性)이다. 그 외에 양산박 호걸(梁山泊豪傑)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물들이라 역시 두목에 적합하지 않다.

진명(秦明)과 주동(朱仝), 노준의(盧俊義)를 영입하는 과정을 보면 확실히 송강(宋江)은 욕먹을 만하다. 그런데 조직은 인격(人格)보다 통제(統制)가 우선이다. 선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론 부하(部下)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을 알아주고 체험(體驗)을 나누고 체면(體面)을 세워주고 이럴 때 말을 듣는다. 개인으로 치면 노준의(盧俊義)는 별명이 ‘옥기린(玉麒麟)‘일 정도다. 하지만 노준의와 한 솥밥 먹은 양산박 호걸은 없다. 양산박 안에서 노준의는 그냥 굴러들어온 인재 중 1명이다. 노준의를 비롯 인재를 모은 것은 송강(宋江)이다. 양산박 호한(好漢)들 대부분은 송강이 데려왔기에 양산박 108명은 어떤 식이든 송강(宋江)과 마음, 체험, 등 전부가 연결(連結)되어 있다.

즉 송강(宋江)이 노준의(盧俊義) 보다 잘난 거 없지만 다만 송강이 명령(命令)하면 모두 따르지만 노준의가 명령하면 아무도 안 따른다. 그래서 송강이 두목(頭目)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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