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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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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의 사자성어는 과연 역사적 진실의 배경에서 온 것인가?

图片信息 画家钱晔画《三国演义》插图——孔明挥泪斩马谡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진상
마속(馬謖)의 죽음을 얘기하자면 역대이래로 사람들은 마속이 가정(街亭)의 패배이후 제갈량(諸葛亮)의 본영으로 돌아와 부형청죄(負荊請罪)한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벤다. 경극 ‘실가정(失街亭)’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

이런 인상은 기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왔다. 그중 95회에서는 마속이 군령장(軍令狀)을 쓰고 왕평을 부장으로 하여 병력 2만5천을 이끌고 가정(街亭)으로 가서 지킨다. 가정에 도착한 후 병법에 이르기를 "거고임하(居高臨下), 세여파죽(勢如破竹)" 즉,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면, 그 기세가 파죽지세이다‘라는 말 및 "사지에 놓아두어서 산다(置之死地而後生)" 등의 이유로 제갈량(諸葛亮)이 길 입구에 군영(軍營)을 설치하라는 분부를 따르지 않고 왕평(王平)의 "위군이 우리의 수원(水源)을 끊을 수 있다"는 경고도 귓등으로 흘려듣고 병력을 산위에 주둔(駐屯)시킨다. 나중에 왕평이 계속 간언(諫言)하자 병력 5천을 왕평에게 주어 산을 내려가 군영을 설치(設置)하라고 한다.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와 장합(張郃)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후 처음에는 한편으로 왕평을 견제(牽制)하며 다른 한편으로 마속을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으며 수원을 끊어버린다. 마속이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혼란(混亂)에 빠지면서 항복(降伏)할 자는 항복하고 도망갈 자는 도망간 후 사마의가 마지막에 화공을 펼친다. 마속은 참패(慘敗)하고 돌아온다. 왕평은 이때 병력이 적어 장합의 맹공(猛攻)을 견디지 못하고 마속과 함께 퇴각한다.

가정(街亭)을 잃은 후 전방 촉군(蜀軍)은 거점을 잃게 되어 물러나서 지킬 곳이 없게 된다. 부득이 이미 점령(占領)한 농우3군을 포기하고 한중(漢中)으로 물러나서 지킨다. 이에 제갈량(諸葛亮)은 상소를 올려 스스로 3등을 강등(降等)당하고 마속(馬謖)은 대영에서 자수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참수(斬首)할 때 전체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고 제갈량도 실성통곡(失性痛哭)한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읍참마속(泣斬馬謖)"이다.

다만 이는 모두 소설가(小說家)의 예술적 가공이다. 역사적 사실은 이런 내용과 차이가 크다. 진(晋)나라 때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및 그 후에 배송지(裴松之)가 달아놓은 주석(註釋)에는 이 일에 대한 묘사가 여러 열전(列傳)에 흩어져 있다. 그것들을 종합해보면 사서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진상을 알 수 있다.

먼저 ’향랑전(向朗傳)‘에는 이런 기술(記述)이 있다. 당시 향랑(向朗)은 승상장사이며 부대를 따라와서 전투에 참가했다. 향랑은 마속(馬謖)과 잘 지냈는데 "마속이 도망치고 향랑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량(諸葛亮)은 그를 미워하여 관직을 박탈(剝奪)하여 성도로 돌려보낸다." 이 내용은 의미가 명확(明確)하다. 가정(街亭)의 전투이후 마속은 스스로 자수(自首)한 것이 아니라 죄를 받을까 두려워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향랑은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량에 의하여 면직(免職)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제갈량의 사후에 향랑은 다시 관직(官職)에 나왔다고 한다. 그동안 수십 년을 놀면서 보낸다.

두 번째는 ’마속전(馬謖傳)‘에 붙은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이다. ’양양기(襄陽記)‘의 기록(記錄)을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마속은 죽기 전에 제갈량(諸葛亮)에게 서신을 보낸 바 있다고 한다. "공께서 나 마속을 아들처럼 여겨주었고 나 마속도 공을 부친처럼 여겼다. 원컨대 곤이 죽어 우가 흥한 뜻을 깊이 살려 평생의 교분(交分)을 여기에서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 마속(馬謖)은 비록 죽지만 땅에 아무런 여한(餘恨)이 없다." 그 후에 제갈량은 마속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겼다. 이 내용을 보면 마속이 죽기 전에 제갈량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서신(書信)을 적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곤(鯀)을 죽이고 우(禹)를 기용(起用)한 이야기를 들어 제갈량에게 자신의 자식을 부탁(付託)한 것이다.

그리고 뒤에는 다시 "십만의 무리가 눈물을 흘렸고 제갈량(諸葛亮)은 제사를 지내준다. 그리고 마속(馬謖)의 자식을 평생 돌봐준다." 마속은 확실히 죽었다. 다만 이상에서는 마속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언급(言及)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제갈량이 "육속이사중(戮謖以謝衆)"이라고 하여, 마속을 죽였다고 한다. ’왕평전(王平傳)‘에는 다시 이렇게 기록한다. "승상 제갈량은 마속 및 장군 장휴(張休), 이성(李盛)을 주살했다" 이 두개의 전을 보면 마속은 확실히 제갈량에 의하여 처형(處刑)당했다. 다만 도대체 어떻게 실시(實施)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이는 ’마속전‘에서 명확히 기재(記載)되어 있기 때문이다. "속하옥물고(謖下獄物故)" 마속은 옥(獄)에서 병사(病死)한 것이다.

이상의 사료를 종합(綜合)하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속(馬謖)은 가정에서 군율(軍律)을 어기는 행동을 한다. 제갈량(諸葛亮)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참패(慘敗)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직접 이번 출격에서 얻은 소득(所得)인 농우3군을 얻었다가 다시 빼앗기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대군은 한중(漢中)으로 돌아간다. 마속은 자신이 실패한 결과가 얼마나 엄중(嚴重)한지 잘 알았다. 그래서 죄가 두려워 도망친다. 그리고 승상장사(丞相長史)인 향랑(向朗)은 그와의 안면 때문에 혹은 그의 재주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를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다. 일이 누설(漏泄)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이십년간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한량으로 지낸다. 마속은 결국 체포되어 제갈량에 의하여 극형(極刑)에 처해진다. 그러나 형을 집행(執行)하기도 전에 마속은 옥중(獄中)에서 병사한다. 이것이 바로 사서(史書)에 기록된 마속의 죽음이다.

그 후 제갈량(諸葛亮)은 친히 제사(祭祀)를 지내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십만의 병사들도 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마속(馬謖)의 자식을 평생 돌봐준다. 이렇게 그를 참하면서 그를 안타까워하는 방법은 복잡(複雜)한 원인이 숨어 있는 것이다. 먼저 마속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慧眼혜안)을 지녔던 유비(劉備)가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 크게 쓸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여겨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하고 매번 그를 불러 얘기를 하면 밤을 새우곤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상소(上訴)를 올려 스스로 강등당한 것이다. 첫째는 마속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유비의 당부(當付)를 중시하지 않은 것이며, 이로 인해 기산을 나서서 한 전투의 공로(功勞)를 모조리 헛수고로 만들고 아무런 공도 없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의 법집행은 상벌(賞罰)이 분명하여 신명과 같았다. 그를 극형(極刑)에 처한 것은 필연적이다.

다만 마속(馬謖)은 제갈량(諸葛亮)이 남정하여 맹획(孟獲)을 얻을 때 일찌기 출병전(出兵前)에 제갈량에게 "마음을 공략(攻略)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마음을 싸우는 것이 상책(上策)이고, 병력으로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라는 전략방침(戰略方針)을 제시한다. 제갈량도 이 전략방침을 충분히 실행한다. 결국 남강(南康)은 촉이 망할 때까지 다시 전투(戰鬪)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마속의 공로(功勞)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씨형제는 형양(荊襄)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다. 그중 "백미(白眉) 즉 눈썹이 흰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바로 이 백미라 불리는 마량(馬良)은 제갈량과 교제(交際)하는 중에 제갈량을 '존형(尊兄)'이라 부른다. 배송지(裴松之)는 '마량이 아마도 제갈량과 결의형제(結義兄弟)일 것이다, 혹은 친인척관계(親姻戚關係)일 것이다. 제갈량의 나이가 많으므로 마량이 제갈량을 '존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마씨형제는 제갈량과의 교분(交分)이 남달랐다. 그리고 모두 재능(才能)이 있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비록 마속을 '주살(誅殺)'했지만 어쨌든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는 깊이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읍참마속(泣斬馬謖)'한 것이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부합(符合)한다. 이는 그가 마속의 자식들을 잘 보살핀 일에서도 그의 마속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단지 소설가의 가공과정(加工過程)에서 마속이 죄를 두려워하여 도망쳤던 일은 언급(言及)하지 않고 약간의 가공을 거친 것이다. 예술적인 각도(角度)에서 보자면 역사적 시실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호소력(呼訴力)이 있다.

중국의 사대명저(四大名著) 중 하나인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영향력은 아주 크다. 현재는 이미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판본(板本), 유형의 게임 및 영화 드라마가 있다.  단지 이들은 대부분 ’삼국연의‘를 기초로 한다. 역사적 원인으로 소설에서 유비(劉備)를 높이고 조조(曹操)를 낮추는 경향이 심각했고 또한 많은 인물 사건에 대하여 예술적(藝術的)으로 가공하여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크다. ’삼국연의‘와 ’삼국지‘를 비교대조하면 아마도 더욱 완벽(完璧)하고 진실되게 이 대목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역사적 사실인가?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은 명청(明淸) 장회소설(章回小說) 삼국연의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중 하나이다. 여기에 앞의 '실가정(失街亭)'과 뒤의 '공성계(空城計)'까지 합쳐서 3부분을 합치면 희곡(특히 경극) 무대에서 가장 많이 공연(公演)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제갈량(諸葛亮)이 대군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나가 북벌을 시도하는데 의도(意圖)는 관중(關中) 등지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마속(馬謖)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정(街亭; 지금의 감숙성 진안의 동북쪽)을 지키겠다고 하고 군령장(軍令狀)을 쓴다. 당시 제갈량(諸葛亮)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서 일찌기 유비가 그에게 말해주었던 "마속(馬謖)은 말하는 것이 실제보다 과장되니, 크게 쓸 수는 없다"는 말을 잊고 마속을 가정(街亭)이라는 중요한 군사요새(軍事要塞)를 지키는 주장으로 삼는다. 마속은 가정에 가서는 오만(傲慢)하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 제갈량의 지시도 어기고 부장인 왕평(王平)의 권고도 듣지 않고 산꼭대기에 군영을 차리는 전략적(戰略的)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산 아래의 강을 버려둔다. 그리하여 위나라의 맹장 장합(張郃)이 기회를 틈타 공격하지 참패(慘敗)하고 가정을 잃고 만다. 그리하여 대군은 어쩔 수 없이 한중(漢中)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촉국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수세(守勢)에 몰리게 된다. 제갈량은 한편으로 임시로 각종 조치(措置)를 취하여 적군을 막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군기(軍紀)를 엄중히 하고 조야(朝野)를 다독이고 민심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마속을 참한다. 다만 어쨌든 마속은 장수(將帥)의 인재였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자신이 선제 유비(劉備)의 당부를 잊고 사람을 잘못 쓴 잘못을 저질러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하여도 회한(悔恨)이 밀려왔다. 그래서 눈물을 흘렸고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했다.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의 이야기는 소설 ’삼국연의‘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諸葛亮)이 서현(西縣)의 천여가(千餘家)를 데리고 한중(漢中)으로 돌아온다. 마속을 죽여서 사람들을 달랬다.(亮拔西縣千餘家,還於漢中,戮謖以謝衆)". 이렇게 보면 읍참마속(泣斬馬謖)은 분명한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같은 사서(史書)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마속(馬謖)이 하옥된 후 사망하니, 제갈량이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謖下獄物故, 亮爲之流涕)"(’삼국지. 촉서. 마량전(馬良傳)‘). 즉, 마속은 옥중에서 병사(病死)했다는 말이다. 제갈량이 죽인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제갈량은 역시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 촉지. 향랑전(向朗傳)‘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마속(馬謖)이 도망갔고 향랑(向朗)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량(諸葛亮)은 그리하여 향랑을 미워하여 관직을 파면하고 성도(成都)로 돌려보냈다."(謖逃亡, 朗知情不擧, 亮恨之, 免官還成都)" 즉 가정(街亭)의 전투이후 마속은 자수한 것이 아니라 도망쳤고 장사관인 향랑은 이를 알고서도 마속과 관계가 좋아서 보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향랑을 파직(罷職)시키고 그 후 이십년 동안 조정에 등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제갈량이 마속을 참수(斬首)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쓰고 있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내용(內容)이다. 같은 작자가 같은 저작에서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다.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기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합쳐서 볼 수도 있다. 즉 마속(馬謖)이 당초 패배한 후 확실히 벌 받을 것이 두려워 도망을 친 바 있다. 다만 나중에 촉한의 장병(將兵)들에게 붙잡힌다. 혹은 스스로 자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갈량은 확실히 그를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아니면 제갈량이 고의로 형 집행을 늦추었을 수도 있다. 마속은 감옥(監獄)에서 병사하고 만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가정(街亭)에서 패배한 후 마속은 아예 제갈량(諸葛亮)을 다시 보지도 못했고 왕평(王平)이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고도 한다.

어찌되었건 마속(馬謖)은 제갈량(諸葛亮)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다. 즉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읍참마속의 고사성어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군령(軍令)이 서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좋은 고사성어(故事成語)이다.

일을 하다 보면 능력이 뛰어나서 윗사람으로서 일하기 편한 사람도 있고 조직원(組織員)들의 활기를 북돋우는 윤활유(潤滑油)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지시를 자주 어기거나 전략적 방향에 동승(同乘)하지 못하거나 공유(共有)가 되지 않는다면 빨리 서로 갈 길을 갈라서는 게 좋다.

특히 주변 상황이 위태(危殆)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정신을 집중(集中)하고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가볍고 걸음이 빨라야 하는데 전략적 방향에 혼선(混線)이 생기고 업무지시가 자꾸 누락(漏落)이 된다고 한다면 효과적인 행보(行步)를 할 수 없다.

서로 마음의 상처가 커지기 전에 헤어지는 게 낫다고 본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사업의 세계에서 칼날 같은 원칙(原則)들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이다.

삼국지에서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이 스케일 크게 벌이는 인간드라마는 정말 흥미진진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제갈공명이 울면서 마속을 베어 나라의 기강과 법질서(法秩序)를 잡는 장면이다.

제갈공명의 출사표 : 27세의 젊은 나이에 촉(蜀)나라 1세 군주 유비(劉備)의 간곡한 청을 받아 그 진영에 합류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오랫동안 나라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국력(國力)이 약한 촉으로선 북쪽의 위(魏)와 동쪽의 오(吳) 사이에서 버텨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인구는 위나라가 촉의 4배, 오나라가 2배나 되었다. 인재 층도 매우 얇아 공명이 이것저것 다 챙겨야 했다. 장기전(長期戰)으로 가다가는 불리하다고 판단한 공명은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2세 군주 유선에게 올리고 위나라 정벌에 나선다.

2세 유선(劉禪)은 그릇이 좀 모자라 공명도 다소 애를 먹었다. 출사표는 나라를 생각하는 공명의 애끓는 충정(忠情)과 아울러 2세에 대한 걱정도 배어있다. 1차 북벌이 처음에는 잘 나가 상당한 전과(戰果)를 올린다. 이 때 촉의 맹장 위연(魏延)이 장안(長安; 위의 서울) 기습작전을 제안(提案)한다. 신중한 공명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통적인 공격작전(攻擊作戰)을 편다.

북벌의 중요한 패전 : 북벌전에서 가정(街亭)이란 곳이 전략적 요충(戰略的要衝)이었다. 위나라 군사가 반드시 거쳐 나오게 되어 있는 곳이다. 매우 중요한 그쪽 지휘관은 위연(魏延) 같은 역전의 장수가 갈 것으로 모두 예상하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39세의 새파란 마속(馬謖)이었다. 모두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마속(馬謖)은 이론에 밝고 머리가 좋아 공명(孔明)의 참모로서만 활약했을 뿐 실전경험(實戰經驗)이 전혀 없었다. 공명도 마속을 떠나보내면서 단단히 당부를 한다.

“가정 확보(街亭確保)가 이번 전쟁의 관건이 된다며 길목을 지키되 높은 곳은 피하라는 주의사항(注意事項)까지 일러준다.” 전장에 도착한 마속은 공명의 당부를 무시하고 “산 위에 진을 친다.” 경험 많은 부하들이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고집(固執)을 부렸다. 군사이론을 들먹이며 두고 보라고 했다.

그러나 노련한 위군(魏軍)의 대장이 물을 끊고 화공책(火攻策)을 쓰자 대패하고 말았다. 주위의 도움으로 마속은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군사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이 때 조운(趙雲), 위연(魏延) 같은 노장들의 활약(活躍)으로 전선이 완전 붕괴(崩壞)되는 것은 겨우 수습(收拾)했지만 위나라 정벌은 물 건너간 뒤였다.

군령을 세우다 : 한중(漢中)으로 서둘러 후퇴(後退)한 공명은 패전의 뒤처리에 착수(着手)한다. 맨 처음 마속(馬謖)을 끌어내어 군령위반(軍令違反)으로 참수형에 처한다. 공명(孔明) 자신도 최고의 지휘자로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3계급 강등을 자청했다. 공명은 마속을 높이 평가(評價)하여 동생같이 아꼈다. 주위에서 전란(戰亂) 중이니 인재를 아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는 권고도 있었으나 이럴 때일수록 나라의 기강(紀綱)과 법을 세워야 한다면서 울면서 마속의 목을 잘랐다. 공명은 법을 집행(執行)할 땐 “나는 저울 같아서 사람에 따라 무게가 다를 수 없다” 고 했다. 공명의 심경(心境)을 잘 아는 병사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렇게 공명은 법가(法家)의 엄격함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것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하여 모두 두려워하면서고 경애(敬愛)했다.

한계를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 : 가뜩이나 인재 부족(人才不足)에 허덕이던 공명으로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1세 유비(劉備)가 임종 시에 “마속(馬謖)은 실력보다 말이 앞서니 조심해서 쓰라”고 한 특별당부가 생각나서 더 슬피 울었는지 모른다. 유비라는 인물은 인재를 알아보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천부적 재능(天賦的才能)을 보인다. 그릇이 크고 덕성이 높은 유비와 머리 좋고 칼날 같은 공명이 좋은 콤비를 이뤄 나라를 다스렸는데 유비가 죽고 난 후 한쪽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역사의 평가 : 읍참마속(泣斬馬謖)을 두고 대부분 공명의 공평무사(公平無私)함을 칭송(稱頌)하지만 한쪽에선 공명의 한계(限界)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을 잘 알아서 그에 알맞게 써야지 감당(堪當)할 수 없는 자리를 주어 일도 망치고 사람도 망치고 나서 슬피 울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인데 지금(只今)이라고 그런 일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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