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글을 쓰려 해도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내 생각을 담은 나의 글을 쓰는 게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 생각을 어떻게 하면 글로 잘 표현(表現)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문장은 내가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이나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나 느낌도 단어에서처럼 단편적으로만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통일된 뜻을 체계적으로 완결(完結)지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문장을 써 나가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 글을 쓰다보면 문장(文章)을 짓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생각에 꼭 들어맞는 단어를 선택하는 일, 단어를 우리글의 문법에 맞게 배열(排列)하고 결합시키는 일, 자기의 집필(執筆) 의도나 자기가 쓰고자 하는 글의 성격에 맞게 표현하는 일, 심지어는 맞춤법, 띄어쓰기에 어긋나지 않게 문장을 작성(作成)하는 일 등에 이르기까지 내가 관심(關心)을 두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토박이 화자(話者)이기 때문에 문법적 직관(文法的直觀)에 의해서 문장의 정ㆍ오에 대한 판단 능력(判斷能力)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최소한 12년 이상 학교에서 국어공부를 했기 때문에 우리말과 글의 특성 또는 법칙(法則)에 대해서 어느 정도 체득(體得)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부정확(不正確)하고 비문법적(非文法的)인 문장을 쓰고 있습니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바르고 좋은 문장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要件)이 무엇인가를 정립(定立)하도록 합니다.
단어가 부적절하게 쓰인 문장: 단어 선택의 기준을 모든 문장에 일률적으로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문장은 필자(筆者)가 의도한 생각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적확(的確)하게 단어가 선택되어야 합니다. 단어가 지니고 있는 사전적(辭典的)인 뜻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강 짐작하여 단어를 골라 쓰다보면 결국 애써 놓은 문장이 비문(碑文)이 되고 맙니다. 다음 문장들이 그러한 예입니다.
1)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들은 이미 석기문화를 가졌던 것으로 추상되며
2) 산림자원은 인류가 필요로 하는 산소를 지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
3) 사실 대학신문사들이 대학언론의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학우들의 상황, 사고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4) 지금까지 우리 회사의 상반기 영업실적을 가름하고자 한다.
5) 작년 동안 일어났던 사고유형을 정리해 보자.
6) 그다지 인심이 후하던 그도 세태의 변화에 마음이 달라졌다.
7) 플리츠의 형태, 위치, 수 등에 따라
예문 1)에서 ‘추상’은 ‘추정’으로 바꿔 쓰는 것이 더 적절(適切)합니다. 이 두 단어는 ‘미루어 생각함’이란 뜻을 공통적(共通的)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상’은 단순히 ‘생각함’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인데 비해 ‘추정’은 ‘판단함’의 뜻이 부가(附加)된 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필자가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견해(見解)를 드러낸 것이라는 점을 감안(勘案)할 때 ‘추정’이 더 적합합니다.
예문 2)에서 ‘지급’은 금품(金品) 따위를 ‘내어줌’, ‘치러줌’이란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공급’으로 써야 적확(的確)한 표현이 됩니다.
예문 3)에서 ‘선구자’는 비유적(比喩的)인 표현을 하기 위해 쓴 단어일지라도 사전적(辭典的)인 뜻으로 볼 때 잘못 쓰인 말입니다 ‘대표격’으로 고치면 문맥적(文脈的)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예문 4)의 ‘가름하고자’는 ‘가늠하고자’를 혼동(混同)해 쓴 말입니다.
예문 5)에서 ‘동안’은 ‘시간적인 사이’를 뜻하는 말로 앞에 일정한 기간(期間)을 뜻하는 단어가 와야 합니다. 즉, ‘작년 한 해 동안’이라고 해야 정확(正確)한 문장이 됩니다. 단어는 문장 속에서 다른 단어들과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제 본래의 뜻을 비로소 살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문 6)은 필자가 ‘그다지’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썼기 때문에 성분(成分) 간의 호응(呼應)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다지’는 ‘못하다’, ‘않다’ 따위의 부정(否定)의 의미와 함께 쓰이는 부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후하던’과 호응을 이루고 있어 문장 자체가 비문(非文)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다지’ 보다는 ‘그토록’, ‘그렇게’ 등의 부사어(副詞語)를 써야 옳습니다.
예문 7)의 ‘수’는 ‘수효’로 고쳐 써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폴리츠’라는 사물(事物)의 낱낱의 수를 가리키는 뜻으로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비문학적(非文學的)인 글에서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가 중시됩니다. 일반적으로 설명문, 논설문 등이 이에 해당(該當)합니다. 이러한 글들은 어떤 사실이나 사물의 실체를 정확하게 지시하고 설명하는 데 그 목적(目的)이 있습니다.
다음 예문들은 글의 성격(性格)에 맞지 않는 단어가 쓰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의 내용도 선명하지 않고 추상적(抽象的)입니다. 역시 단어 선택이 잘못된 예입니다.
1) 면의 성질 또한 피복재료 중 가장 융통성을 갖고 있다.
2) 슬리브리스인 것은 매개인들이 소매의 의의를 느끼지 못하여 팔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경우
3) 그러나 생산비가 높아서 그 생산량은 비스코스 레이온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4) 대담하고 큰 무늬가 나타나면서 복잡한 무늬는 사라지며 부드러운 질감의 옷감이 나타나면 빳빳한 옷감은 자리를 사양한다. 오래 입어도 우아하게 낡아져서 새것이 아니라도 보기가 좋다.
5)우리 정부는 소련에게 상당액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6) 나 아니라도 누군가가 하겠지 아니면 내 가정이 더 소중하다 하여 업무보다는 가정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등, 여성 스스로 사회에서의 무덤을 파는 일을 자행하기도 한다.
각 예문의 밑줄 친 부분은 문장 전체의 의미를 분명(分明)하게 드러내는 데에 오히려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문장의 내용으로 볼 때, 글쓴이가 이 문장을 작성한 목적은 어떤 사실이나 대상들에 대해 설명(說明)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의 주요 성분이 한결 같이 막연한 뜻의 단어 또는 어구(語句)로 되어 있습니다.
예문 1)에 쓰인 ‘융통성’은 ‘실용성’ 또는 ‘신축성’ 등의 구체적인 의미(意味)를 나타내는 단어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예문 2)도 예문 1)과 유사(類似)한 용법입니다. ‘의의’를 ‘필요성’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문 3)의 ‘보잘 것 없다’는 지시전달(指示傳達)을 목적으로 한 글의 서술어(敍述語)로서는 부적절합니다. 지나치게 막연하기 때문입니다.
예문 4)의 ‘자리를 사양한다.’, ‘우아하기 낡아져서’등의 서술부(敍述部)도 마찬가지로 결함(缺陷)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문 5)에서 ‘상당액’은 구체적인 금액(金額)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예문 6)의 ‘업무’, ‘자행’ 등도 글의 내용에 어울리지 않는 단입니다. ‘업무’는 일반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문맥(文脈)에 맞게 ‘직장의 일’ 정도로 구체적인 어구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자행’은 그 사전적 의미가 이 문장 전체의 내용(內容)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생각을 표현(表現)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유는 간단(簡單)합니다.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어렵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수업부터 계속 국어(國語)를 배웠지만 쓰는 수업(授業)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우리의 교육체계는 듣기, 읽기 중심으로 구성(構成)되어 있어서 말하고 쓰는 건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력을 들여 글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고 ,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방법에 대해 공부(工夫)해야 합니다. 글을 쓰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글쓰기 과정(過程)에 대해 배워보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저처럼 아직 배워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지만 이미 베스트셀러를 쓰신 분들이나 오랫동안 글쓰기 코칭을 진행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을 추천(推薦)합니다. 제가 추천하는 작가는 김동인(金東仁)이나 이효석(李孝石)작가님입니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피천득(皮千得)님의 수업은 제가 들어본 적 없습니다. 다만 독자들의 평가(評價)가 좋기 때문입니다.
꼭 돈을 주고 글쓰기 수업(授業)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영상이나 음성으로 배포되는 무료 글쓰기 교실도 많습니다. 그것들을 활용(活用)해서 글쓰기 공부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결국 글쓰기는 자기 생각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참 모자란 내가 몇 번 방황한 끝에 생긴 고민입니다. 내 글쓰기는 형편없이 모자라고 또 글 쓴 경험이 짧습니다. 그 만큼 나는 가야할 길이 멀고 많이 배워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자면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기는 뭐하고 그냥 어휘를 나열(羅列)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과감한 결론(結論)을 내리기가 두렵습니다. 내일의 내가 이 글을 보고 비웃을까 두렵고 세상의 문필가(文筆家)들이 이 글을 보고 어이없다고 할까봐 두렵습니다. 글을 쓸 수도 점점 더 자신감(自信感)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을 잠시 내려둔 채 이렇게 과감(果敢)하게 적어보고 싶습니다. 글쓰기는 결국 내 생각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重要)합니다.
내가 글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 화려한 수사(修辭)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공부했습니다. 관련서적(關聯書籍)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책에서, TV에서 멋진 문장이 있으면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아직은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원인(原因)을 캐보니 글의 짜임새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개요 작성(槪要作成)을 또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글쓰기의 8할에 개요(槪要) 만들기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도 뭔가 빠져 있고 또 설득력(說得力)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문장 짓기를 연습하면서 글에는 읽을거리가 풍성(豐盛)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자료를 찾았고 단락 편폭(篇幅)을 늘려 보았습니다. 계속 쓰다 보니 글은 무엇보다 먼저 퇴고를 잘하는 것이 중요(重要)하다고 다시 체험(體驗)했습니다. 시간나면 퇴고하고 또 퇴고 했습니다. 자주 지웠고, 열심히 고쳤고, 어떤 때는 고생스레 쓴 글을 죄다 지워버렸습니다. 그렇게 해도 내 글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막막(寞寞)하기만 합니다.
특히 화려(華麗)하게 장식된 문장, 긴 글, 충분(充分)한 자료, 짜임새 있는 글. 그래도 마음에 흡족(洽足)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술적(記述的)으로 괜찮다 생각했건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표현력에 열중(熱中)했습니다. 더 좋은 자료, 더 좋은 짜임새, 더 멋진 표현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런데도 글은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자료를 가져오고, 잘 배치(排置)하고, 잘 꾸민 문장을 사용하기를 여러 번 거듭하던 어느 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理由)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습니다. 내 글에는 나다운 혼(魂)이 없었습니다. 내 글은 문장의 나열(羅列)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 글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 생각이 비어있었습니다.
나는 이 글을 어떤 짜임도 없이 쓰고 있습니다. 문체(文體)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퇴고(推敲)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올리기 전 글을 여러 번 수개(修改)하고 보니 이제야 마음에 듭니다. 내가 부족(不足)한 점이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表現)하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런 글을 더 많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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