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이 호객하는 수단(手段)이고 독자를 유치하는 요인(要因)입니다. 첫 문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문장가들은 언제나 첫 문장에 승부수를 던집니다. 결국 한 문장의 성패는 첫 문장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첫 문장이 이렇고 저렇고 말을 건네옵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가 두서없고 뒤죽박죽되어 나는 그만 참다못해 야박(野薄)하게 쐐기를 박았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걷어치우고 결론부터 말하시오.” 여기서 그 사람이 참괴(慙愧)한 건 더 말치 않겠습니다.
참으로 첫 문장이 엉망이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면 그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글쓰기에서 첫 문장이 아주 중요한 역할(役割)을 합니다. 그래서 흔히 첫 문장을 ‘호객행위(豪客行爲)’라고 말합니다. 어떤 장르이던 간에 첫 문장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처음 몇 초 안에 독자를 붙잡지 못하면 그 글은 이미 실패(失敗)했습니다.
성공한 글 역시 첫 문장이 관건입니다. 또 글 잘 쓰는 비결도 첫 문장이 이외의 효과를 거둡니다. 글 한 편 완성한 후 첫 문장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다시 꺼내 큰소리로 읽어보아야 합니다. 첫 문장이 흡족(洽足)해야 독자의 심금을 사로잡습니다. 첫 문장쓰기를 거듭 반복해야 합니다. 첫 문장에 목숨을 걸라는 말로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첫 문장이 중요하다는 이유를 재차 반복해서 강조(强調)하고 싶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첫 문장은 나의 글에서 절실합니다. 절실하기 때문에 무한한 생명력(生命力)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왜 첫 문장이 중요한지를 심중하게 정돈(整頓)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에 일여덟은 무턱대고 ‘남과 대화하려고’ ‘글이나 서평을 쓰는 데 도움이 되려고’ ‘연애 중 연인과 좋은 감정을 공유하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첫 문장을 잘 쓰지 못하면 그 문장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치(理致)를 거의 모르고 글을 씁니다.
글쓰기에 취미가 없는 지인에게 꿈이 있다면 그걸 문장으로 써보라 했다가 곤혹(困惑)을 당한 적 있습니다. 짐짓 아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장래의 꿈을 물어 보았습니다. 몇몇은 당혹스러워했고 몇몇은 ‘있는데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한둘은 사생활을 침해(侵害)당했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글로 쓸 수 없는 꿈은 절대 꾸어지지 않는다는 내 지론(至論)을 권유하려다가 괜히 우정에 금이 갈 번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글은 왜 중요한가? 나는 ‘자아적인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證明)하기 위해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자아적인 개인’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회적인 포로(捕虜)입니다. 나는 내가 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離脫)해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급속한 인터넷 문화와 팽팽한 긴장관계(緊張關係)를 유지하고 늘 깨어 있는 내가 되기 위해 글쓰기를 필요로 합니다. 글을 쓰는 순간에 나는 글을 읽고 글을 생각하는 시간만큼 다시 나는 이 우주(宇宙) 안에서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첫 문장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 문장을 잘 쓸 수 있게 영감을 줍는 것’입니다. 산업문명(産業文明)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도시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기생(寄生)의 존재가 도시를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참여해야 합니다. 야생동물조차도 인간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과학적 보고서가 있는 터에 함부로 도시의 바깥을 상정(想定)하는 것도 유치하게 보입니다.
글을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證明)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감히 한마디의 말을 권합니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입니다. 만일 이 책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의향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닙니다. 글쓰기 지도전문가(指導專門家)인 나탈리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꿈에 대해서 5분 동안 써 보십시오.’
첫 문장은 내적 감각(感覺)입니다. 그러므로 첫 문장은 어떻게 써야 할지를 많이 고민(苦悶)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인 작가나 기자에게도 첫 문장은 아주 어려운 과제(課題)입니다. 그렇지만 첫 문장을 잘 쓰면 뒤이어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일이 훨씬 쉬워집니다. 요약 문장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글의 핵심 주제를 요약하여 첫 문장으로 쓰는 방법입니다. 주제(主題)를 요약해 첫 문장을 쓰고 그 주제를 뒷받침할 사례나 근거를 들어 논증하거나 구체적인 설명(說明)을 더하면서 글을 전개합니다.
인용(引用)으로 시작하면 글쓰기의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일단 누군가의 말을 빌려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인용해서 쓰기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논설문(論說文)이나 연설문, 칼럼 등을 쓸 때 자주 활용합니다.
명제(命題)로 시작하면 누가 봐도 참 멋진 명제 또는 상식수준(常識水準)의 명제를 첫 문장으로 쓰고 뒤이어 이에 긍정(肯定)하거나 부정하는 내용을 쓰는 방법입니다. 첫 문장의 내용에 반대되는 생각이나 주장(主張)을 펼칠 때 특히 효과적입니다. 명제를 첫 문장으로 제시(提示)하면 이후 그 내용을 풀어쓰기가 훨씬 쉽습니다. 명제의 내용과 대립하는 주장을 펼 수도 있고 단순히 상황(狀況)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감각적인 글을 선호(選好)하는 편입니다. 감각 없는 배우가 연기효과가 별로인 것처럼 감각적 형상화(形象化)가 서툰 글은 감명을 주지 못합니다. 감각(感覺)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가벼운 감각이 가벼울 따름입니다. 감각에는 깊이가 없다는 지적(指摘)도 마찬가지입니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입니다. 감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架橋)입니다. 화자는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글과 교감(交感)합니다.
실존은 감각의 실존(實存)입니다. 감각의 실존 가운데 가장 앞서 가 있거나 높이 있는 것, 그러니까 감각의 극단(極端)이 글입니다. 감각의 세계에서 실존은 단연 시각(視覺)입니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지(認知)할 때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거나 비켜갑니다. 보통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입니다.
글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염려(念慮)하는 화자의 눈은 감각의 눈입니다. 그 감각의 눈은 ‘산 너머 그리운 여인’의 마음까지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자(話者)는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감각의 눈으로 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시각이 감각의 전부는 아닙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시각은 대량 소비시대, 대중문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혹사(酷使)당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광고와 매체를 통해 인간의 눈을 포섭(包攝)해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轉落)시키고 있습니다. ‘시각 패권주의(視覺覇權主義)’ 시대입니다. 글은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글은 저 왜곡(歪曲)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소비자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보통 초보자들은 시각에 의한 감각과 시각에 의한 인지(認知)와 소통을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서 배제(排除)하거나 왜곡합니다. 시각 과잉(過剩)은 인간을 인간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分離)시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救援)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각 패권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을 복원(復原)하는 것입니다.
시각을 제외(除外)한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라야 활발해집니다. 깊은 어둠 속에 누워 있어 보면 압니다. 얼마나 다양한 소리가 들리는지를 말입니다.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을 음미하는 미식가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식가(美食家)는 눈을 감고 ‘음~’하는 탄성(歎聲)을 내지릅니다. 손가락도 촉감(觸感)에 충실하고자 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습니다.
첫 문장은 될수록 짧은 글로 써야 맛을 냅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응원(應援)도 많습니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격려를 받아 볼 높은 위치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문학 신동 꿈을 많이 꿨기 때문에 글쓰기에 각별히 애착(愛着)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다 동료와 선후배 지인들이 ‘성원(聲援)’을 많이 보태주어 제법 좋은 글도 썼습니다. 지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은 것이 ‘찬란한 빛’으로 빛납니다. 그래서 좋은 글을 펴내려고 수많은 노력과 심혈(心血)을 부어 놓고 한나절 넘게 ‘감사의 글’을 써봅니다. 그동안 지인들에게 밀린 ‘빚’을 갚는 것입니다.
상상으로 글을 많이 쓰다 보니 몇 가지 요령(要領)이 생겼습니다. 첫 문장의 작성에 정열을 쏟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문장 맨 처음에 힘을 불어 넣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글의 맨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마무리를 봅니다. 그 다음에 눈여겨보는 중간 글들은 내용을 요약(要約)한 글들입니다. 글의 맨 처음과 맨 나중에 위치하는 문장에 신경(神經)을 쓰지 않는 작가는 거의 없습니다. 첫 문장에 실린 내용은 글 전체의 성격(性格)과 무관하지 않지만 분위기는 완전 달라집니다. 마지막 마무리는 이른바 ‘앞으로의 계획’ 쯤에 해당(該當)합니다. 이렇게 한 편의 글을 쓰고 나서 짧은 구절들을 골라 읽어봅니다. 그러니까 서너 구절 정도 일별(一瞥)하면 문장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測定)할 수 있습니다.
왜 짧은 글인가라고 묻는다면 짧은 글 쓰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짧은 글에는 작가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壓縮)되어 있습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直觀力)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와 장악력(掌握力)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짧게 쓰지 못했다라고 말한다면 흔히 장문을 쓰는 데 시간과 공력(功力)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장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구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글을 쓰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짧은 글을 많이 읽어보아야 합니다. 짧은 글은 서너 번 읽으면 외어집니다. 그렇게 외운 글은 삶의 여러 국면과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接點)을 가지면서 글의 의미가 부풀어 오릅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해 보아야 합니다. 큰 것, 힘센 것만을 추구(追求)하는 선배가 있다면 어둠과 벗이 되어 주는 초승달 이야기를 꺼내 보아야 합니다. 좋은 글은 짧은 시이고 짧은 시는 우리들 구체적인 삶의 안쪽에 들어와 있습니다.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띄울 때 외우고 있는 짧은 글을 전송(傳送)해 보면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불꽃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한마디로 짧은 글은 무한한 매력(魅力)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또한 유혹적인 함의(含意)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첫 문장이 호객하는 수단(手段)이고 독자를 유치(誘致)하는 요인이고 성패 가르는 승부수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종당(從當)에는 멋지고 흡인력 있는 걸작 같은 문장이 탄생(誕生)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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