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책 중에 언어가 나타내는 뜻의 의미와 내용이 완전 다른 글에서 남다른 감동의 너울을 느껴보고 싶은 것은 수많은 독자들 누구나 다 갖게 되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요즘 천편일률로 획일화(劃一化) 되는 글에 대해 몹시 권태(倦怠)롭고 의욕심이 상실됩니다. 그야말로 저자는 달라도 내용이 엇비슷한 종류의 글들이 차고 넘칩니다. 글을 자기 취향(趣向)대로 골라 읽던 재미는 이미 까마아득한 먼 기억(記憶)으로 가물거립니다.
그래서 산책로를 따라 산에 가면 나무가 우거진 숲 속 길의 안내표시판(案內標示板)이 유달리 눈에 띕니다. 6월의 뙤약볕에 가장 어울려 적시 적소(適時適所)인지라 기분도 아주 상쾌합니다. 안내표시판이 구역둘레길 표시내용(標示內容)을 상세히 알려줍니다. 한 장 한 장 도표의 여백(餘白)에는 기묘한 자연의 풍경들이 무한한 인생여정(人生旅程)을 오롯이 품고 있습니다.
길지 않게 풀어 놓은 여정이 함의(含意)를 적어 짧은 문장의 전달은 함부로 묵과(默過)하지 못하게 합니다. 길고 긴 수려한 문장들이 꾸며놓은 화려(華麗)함보다는 여백이 많은 간단 명료(簡單明瞭)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습니다. 계속 명상(瞑想)을 즐기라고 하기 때문에 사진첩 같은 공간으로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을 찾아서 온몸을 던집니다. 산만(散漫)하면 들리지 않고 집중(集中)하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느끼기 위해서 정신을 고도로 집중합니다.
각 표지판의 도표(圖表)마다 직결된 자연사(自然史)가 나오고 울창한 숲 속 내밀(內密)한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감동의 울림으로 메아리칩니다. 그 작은 구조(構造)는 씨앗, 뿌리, 속삭임, 구름, 지도, 길, 등반, 공기, 햇볕, 그늘 등 둘레 길로 이루어진 큰 구조를 만들어서 숲 안의 작은 씨앗에서 큰 숲으로 커가고 있습니다.
숲은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들이 함께 모여 사는 숲 동네입니다. 사람들은 숲을 푸르게 가꾸기 위해 나무를 심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등 많은 노력을 합니다. 숲이 인류에게 많은 혜택(惠澤)을 줍니다. 숲은 공기를 깨끗이 해줍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化石燃料)를 태우면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의 양이 점점 많아집니다.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흡수(吸收)하여 생물에게 꼭 필요한 산소로 바꾸어 줍니다.
또한 숲은 물의 양을 조절(調節)해서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줄여 줍니다. 흙 속에는 풀이나 나무의 뿌리들이 촘촘히 뻗어 있습니다. 이런 뿌리와 흙 사이에는 작은 공간(空間)들이 많습니다. 여름에 한꺼번에 많은 비가 내릴 때에는 이 공간에 물이 스며들어 흙속에 물이 저장(貯藏)됩니다. 저장된 물은 계곡(溪谷)으로 천천히 흘러나오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가뭄의 피해(被害)를 줄여 줍니다.
따라서 나뭇잎은 공기(空氣) 중에 떠다니는 미세 먼지나 이산화황 등의 오염물질(汚染物質)을 빨아들입니다. 이런 오염물질은 비가 내릴 때 빗물에 녹아 땅에 떨어졌다가 숲 속을 흐르면서 정화(淨化)됩니다. 침엽수(針葉樹)들이 많이 내뿜는 피톤치드는 살균작용(殺菌作用)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이럴 듯 숲이 인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므로 앞으로 우리 숲을 더욱 푸르게 보존(保存)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한 가지 관점(觀點)에만 올인 하면 모든 것이 다른 국면이고 제각각의 고유한 특성(特性)으로 그때그때만의 다른 특성이 모래알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 속에서 귀를 기울여 마음의 이야기에 전체적(全體的)으로 보려고 합니다. 아주 멋진 한 폭의 그림이 펼쳐 보입니다. 삶은 고정(固定)된 것이 아니라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시작되어서 외부로 타인과의 관계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거대한 산을 향해서 여러 갈래의 모든 길들이 집중해서 수렴하고 있습니다. 비록 삶의 목적지나 경로는 아니어도 손전등 하나를 쥐어 주는 이야기 속에는 온몸을 간질거리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철학들은 아니어도 일반인의 철학으로서 절망의 순간, 변화가 필요한 순간에 삶에 손전등을 되어 줄 삶의 지혜들이 뿜뿜 풍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덤인 ‘숲 속의 마을’은 20세기 모더니스트 화가의 첫 세대 중 한 사람인 페르낭 레제(1881-1955)의 회화 형성기(形成期)를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1910년대 레제는 인상주의(印象主義)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 프랑스 아방가르드와의 양식적 교류(交流)에 토대를 둔 회화를 탄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의 마을’에는 입체주의(立體主義)의 정신적 지주였던 폴 세잔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레제가 이 그림을 부분을 이루는 연작(聯作)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형태의 대비'에 몰두(沒頭)해 있던 레제의 특징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제가 "자연은 원통, 구, 원뿔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세잔의 강령(綱領)을 실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딱딱하고 건조한 집 표면(表面)은 둥근 나무와 떨기나무를 발판삼아 사다리를 오르듯 수직(垂直)으로 상승해 나갑니다. 검은 목탄으로 격렬(激烈)하게 스케치된 두 개의 기본 형태는 서로를 정의하고 구명(究明)합니다. 일차 색과 이차색의 거침없는 배열에서 유발(誘發)되는 또 다른 대비 층은 전통적 풍경장면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초록 언덕과 빨간 집의 소란스러운 대비 탓에 우리는 화면 가장자리에 미묘하게 보충(補充) 적용된 색채를 쉽게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색채대비는 캔버스에 생기를 불어넣을 뿐 아니라 형태에 부피와 입체감(立體感)을 불어넣습니다. 레제는 점차 색채와 형태의 파삭함을 부각(浮刻)시키는 쪽으로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후기작 중 회화의 형식요소(形式要所)에 대해 이와 같은 대담한 실험을 선보인 예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씨앗은 진실의 새싹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目的)을 부여해 주는 씨앗은 삶의 에너지를 부여하며 소명의식(召命意識)이며 인생 여정의 시작이 됩니다. 일정한 절차를 자신의 모든 ‘의도(意圖)’가 담긴 인생 여정에 이르는 ‘숲’은 예쁜 집이 아니라 그 숲 안의 행복입니다. 그 숲은 내 가슴 속에 있는 것이고 결국 시작과 끝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젊음의 한창을 지나서 삶의 원숙(圓熟)함을 거쳐 노년에 이르는 길에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한 인간이 살아가는 여정의 모든 것은 나 자신에게서 출발(出發)하여 나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치 인생 여정은 숲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기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합니다. 씨앗을 땅에 심고 관리하고 폭풍우(暴風雨)와 뙤약볕을 지나서 수확하고 인생 겨울이 와서 다시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계(四季)’가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理由)는 매일 성장해서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모습을 더 닮고 더 드러내기 위해서랍니다. 언제나 어디에나 길은 열려져 있습니다. 길을 잃어 앞길이 간절(懇切)한 사람에게 이보다 더 가슴 설레게 하는 말이 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 인생길에는 언제 어디서 예상을 빗나가며 막다른 곳이 나타난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表現)이기도 합니다. 그 막다름은 경험적으로 귀납적(歸納的)으로 때로는 절망의 쓴맛도 주고 때로는 극복(克服)의 꿀맛을 준다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막힘은 제약(制約)과 기회의 공간이 만들어 준 공간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부족해서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운(運)이라는 것은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저 얻어걸리는 막연(漠然)한 그 어떤 것이라는 것으로 치부하였기에 슬픔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해답은 이미 나의 골수에 있습니다. 새벽 3시에 잠에서 깬 적이 있습니까? 길목에 두려움이 최대의 장애물(障碍物)이 되어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본능이 걱정과 두려움에 밀리는 것은 희귀(稀貴)한 광경은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모두가 미래를 찾고 긍정적 변화를 원합니다. 반면에 현재의 흐름에는 소홀(疏忽)히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의 변화(變化)만 찾다가는 내일이 오늘이 되어서도 내일을 찾을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산사람(山人)’처럼 현재의 상황(狀況)보다는 즐김에 지나치게 관심을 부여(附與)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 중간(中間)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양 끝단의 중간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추락(墜落)의 순간 좌절의 순간에 멀리 보지 말고 내 자신을 보라고 합니다. 삶의 성패(成敗)는 이미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직관(直觀)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 챙김을 통하여 나의 패턴을 알아내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보이고 삶의 목적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내 안의 믿음과 두려움은 작용과 반작용(反作用)의 관계를 이루어서 삶의 역사에 성장(成長)과 변화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의지(意志)가 시험에 들 때 모든 게 길을 잃은 것 샅을 때 나는 조언합니다. 멈추고 고요 속에서 귀를 기울이면 드디어 가슴이 올바른 다음 단계(段階)를 알려줄 거라고 굳게 믿으면 좋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피조물(被造物)이고 우리는 삶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에게는 삶은 두 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고 있지 않은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다양(多樣)한 길을 모두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選擇)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2019년에는 ‘꽃길만 걸읍시다’라는 유행어(流行語)도 있었습니다.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해 주며 동시에 자기가 선택한 길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길일 가능성(可能性)이 얼마나 낮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선택한 길에 이성과 감성을 어떻게 조합(調合)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노력만 한다는 것은 현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옛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처럼 오로지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기회비용(機會費用)이 너무 크다는 생각입니다. 이 기회비용을 최소화(最小化) 하는 길에 삶을 너무 복잡하지 않게 보는 것이 지금에는 최선이라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굳이 허리에 실 메어 못 쓰는 바늘의 귀 구멍을 키우는 것보다는 나 자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삶의 용기(勇氣)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4차 산업혁명(4次産業革命)이 절정을 향해 가는 시점에 뒤집어 쓴 인생 선배(先輩)들이 보여 주는 길은 하염없이 작아지며 소심하게 되는 존재들에게 삶의 의미를 느끼며 내일의 발걸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저 커브만 지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은 내공이 모자라서 긴 문장을 쓸 수 없다면 위에서 말한 산책로(散策路) 둘레 길 표지안내판 같은 간단명료한 글쓰기에 숙련되어야 합니다. 고도로 함축(含蓄)된 글을 쓴다는 자체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내용을 압축(壓縮)하여 필요한 부분만 표현하려면 그만큼 기교가 요구됩니다. 사실 글과 글 사이에 난 여러 갈래의 길을 찾는 긴 글쓰기도 어렵고 단문쓰기도 힘듭니다. 오로지 습작요령(習作要領)을 터득하려는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뜩 이런 싯구가 떠오릅니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裡學(거거거중지,행행행이학)"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알게 되고, 걷고 걷고 걷는 속에서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경구(驚句)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强調)하는 철리를 다분히 담고 있습니다. 또 글쓰기에서 "물 따라 가노라면 해돋이를 보게 된다"는 명담(名談)을 신조로 삼고, 따라서 소원성취(所願成就)를 바라며 외우는 명언(名言)이 있습니다. "산도 막히고 물도 막히어 길 없는가를 생각했는데, 버들방초 지나니 또 한 마을이 보이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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