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차·비행기 천국’의 고속철 프로젝트
이동보다 대기시간 더 긴 비행기
도로 막혀도 막대한 비용에 발목
바이든 친환경 관심에 자금 숨통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4월 22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미국 철도업체 브라이트라인 웨스트 고속철도 건설 공사 기공식의 참석자들이 행사를 기다리는 가운데 모니터를 통해 사업이 소개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AFP 연합뉴스
“우리는 오늘 미국의 진정한 첫 고속철도(America’s true first high-speed rail line)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 네바다에 있다.”
지난 4월 22일(현지시간) 미국 교통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에 이렇게 밝혔다. 미국 철도업체 브라이트라인 웨스트가 서부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LA) 옆 샌버너디노카운티의 랜초쿠카몽가에서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남쪽까지 이어지는 351㎞ 길이 고속철도 공사에 공식 착수했다고 알린 날이었다.
업체에 따르면 이 철도 위를 달리는 고속열차의 최대 시속은 322㎞(200마일)가 될 전망이다. 아직 미국 열차의 속도는 시속 250㎞ 아래다. 2028년 7월 LA에서 열리는 하계올림픽에 맞춰 해당 구간을 개통한다는 게 업체 목표다. 지금은 도로가 안 막혀도 차로 4시간 30분가량 걸리는 거리를 그때쯤이면 항상 2시간 남짓 만에 오갈 수 있게 된다.
시간 절약만이 아니다. 피터 부티지지 미국 교통부 장관은 당일 성명을 통해 △수천 개의 일자리 △더 나은 경제적 기회 △교통 체증 감소 △대기오염 완화 등도 기대 효과로 거론했다.
이르면 202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리스(LA) 인근 랜초쿠카몽가와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남부 구간을 달리게 될 고속열차의 가상도. 브라이트라인 웨스트 제공
고속철로 불리려면 적어도 시속 250㎞ 정도로는 질주해 줘야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20개 넘는 나라가 보유한 고속철이 미국에는 아직 없다. 수도 워싱턴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을 잇는 735㎞ 길이 구간 암트랙(Amtrak·미국철도여객공사) 열차 어셀러의 속도가 그나마 빠르지만, 시속 241㎞ 수준이다. 낡은 선로를 느린 화물 열차와 공유하느라 대부분 구간에서 그마저도 내지 못하기 일쑤다.
지금껏 수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여론조사업체 레드필드앤드윌턴스트래티지스에 의뢰해 6월 11일부터 이틀간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더니 응답자의 60%가 신규 고속철 건설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 비율은 7%에 불과했다.
비행기를 타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불만이 많았다. 미국 지식 공유 플랫폼 쿼라에 닉네임 ‘데미안’이 올린 글을 보니, 차로 가기에는 다소 먼 800㎞ 거리를 비행기로 갈 때 얼마나 걸리는지가 도심 간 이동을 전제로 계산돼 있었다. 공항 왕복, 탑승 수속, 보안 검색대 통과, 대기, 이·착륙, 수하물 회수 등에 걸리는 시간을 셈해 보니 비행 시간(시속 900㎞) 자체는 54분밖에 안 됐으나, 총소요시간은 5시간 4분이나 됐다.
4월 23일 미국 워싱턴 기차역 유니언 스테이션 플랫폼에서 암트랙(Amtrak·미국철도여객공사) 열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걸어가고 있다. 워싱턴=권경성 특파원
이에 비해 시속 300㎞ 고속철로 동일 구간을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열차 탑승 시간은 2시간 40분으로 더 길어도,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걸리는 총시간을 따질 경우 3시간 35분으로 비행기보다 훨씬 짧았다. 교통편이 지연되거나 짐을 분실할지 모른다는 염려도 열차가 적다고 데미안은 부연했다. 미국 정부기관에서 협상가로 일하는 제러미는 본보에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할 때는 고속철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속철의 진짜 경쟁 상대는 자동차라는 게 전문가와 업계의 인식이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통·물류 프로그램 책임자인 이언 새비지 교수는 뉴스위크에 “미국인의 고속철 지지는 갈수록 포화 상태에 가까워지는 고속도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스티븐 가드너 암트랙 최고경영자(CEO)도 미국 경제 매체 포천 인터뷰에서 “자동차 시장이 우리의 최우선 경쟁 시장”이라고 말했다.
미국 수도 워싱턴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을 왕복하는 암트랙(Amtrak·미국철도여객공사) 고속열차 어셀러. 올 1월 암트랙은 최고 속도가 현재(시속 241㎞)보다 시속 16㎞ 빠른 신형 어셀러의 시험 운행에 착수했다. 암트랙 제공
이렇게 수요가 있는데도 미국에서 고속철 공급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투자금 환수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정도로 막대한 구축 비용 때문이다. 고성능 열차만 갖춘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열차가 속도를 내려면 철로가 얼마간 반듯할 필요가 있다. 전용 철로가 필요한 이유다. 게다가 고속철은 전기로 움직인다. 지난해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아시아·유럽 철도의 전철화 비율은 60%를 웃돈다. 가장 비중이 높은 한국은 85%다. 반면 북미는 5%에도 못 미친다. 전력 공급 시스템 구비까지도 갈 길이 멀다.
여간한 수요로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수익 구조인 만큼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다. 모든 고속철도망은 각국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결과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애초 여건이 정부가 적극 나서기가 까다롭다. 우선 국토가 방대하고 인구 밀도가 낮다. 고속철로 연결하기에 수요가 충분한 구간이 드물다. 아무리 빠른 열차로도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은 항공기의 대안이 없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휴스턴 고속철도 구간에 투입되는 일본 고속열차 신칸센. 배경은 일본 후지산이다. 텍사스 센트럴 제공
이미 굳어진 ‘자동차·항공기’ 연결 패턴의 관성도 강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자동차가 다진 입지는 탄탄하다. 승전에 기여한 제대 군인에게 보상으로 지급한 주택 보조금이 도시 주변에 중산층 교외를 형성했고, 이런 도시 구조는 자동차 급증과 차 중심 교통망으로 이어졌다.
화물 운송 위주 철도 인프라(기반시설)와 제도도 걸림돌이다. 미국 철로의 71%가 화물 철도 회사 소유다. 그러다 보니 속도가 빠른 여객 열차에 우선 통행권을 주는 연방 철도법이 무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화물 열차가 지나가도록 여객 열차가 대기하는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차체를 한계 이상 가볍게 만들지 못하는 것도 선로를 공유하는 무거운 화물 열차와의 충돌 상황을 감안해 당국이 설정한 내구성 규제 기준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견과 이해 충돌이 화물 열차와 상대할 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미국 보수 싱크탱크들은 기본적으로 고속철 보조금에 연방 예산이 쓰이는 것을 반대한다. 데이비드 디치 헤리티지재단 선임정책분석가는 지난 1월 재단 홈페이지 글에서 “매몰 비용 때문에 정치인들이 끝을 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워싱턴은 완성되지 못할 철도 사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납세자를 속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당장 긴요하지 않은 곳에 세금을 너무 많이 쓴다는 얘기다. 농지 파괴는 안 된다는 토지 소유주의 저항, 경쟁자인 항공사의 로비도 고속철 측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 요소다.
주요 5개 미국 고속철도 프로젝트.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러나 전반적 분위기는 고속철에 희망적이다. 앤디 바이퍼드 암트랙 고속철 부문 수석 부사장은 6월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미국이 ‘고속철 클럽’ 가입 호기를 맞았다”며 “노선 하나를 성공시키면 대중의 요구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돌파구는 ‘고속철 맞춤형 대도시 조합’ 발굴이다. 바이퍼드 부사장은 “200~600마일(322~966㎞) 떨어진 적당한 거리의 미국 도시들을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이어 주는 게 현실적 미래”라고 했다.
댈러스와 휴스턴이 바이퍼드가 꼽은 모범적 ‘도시 짝’이다. 올 4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미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두 도시 간 고속철로 ‘일본 신칸센’ 도입을 합의했다. 노선 길이 380㎞인 이 사업은 차로 3시간 30분 걸리는 도시 간 이동 시간을 90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막히는 도로와 함께 고속철 사업을 추동하는 강력한 명분이 기후변화다. 암트랙에 따르면 워싱턴과 뉴욕 사이의 비행은 열차 이동보다 1인당 온실가스를 최대 3.7배 더 많이 배출한다. 자동차는 5.8배까지 늘어난다. 항공기의 탄소 배출과 이로 인한 기후변화가 난기류를 악화시켜 항공 교통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는 분석도 있다.
2008년 9월 16일 당시 미국 민주당 부통령 후보이자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 델라웨어주 윌밍턴 기차역에 도착해 암트랙(Amtrak·미국철도여객공사) 열차에서 내리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의원 시절 암트랙 열차를 자주 이용해 ‘암트랙 조’로 불렸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기약 없이 붙잡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국 고속철 구상을 재출발시킨 것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의지였다. 부티지지 장관이 2021년 취임과 더불어 일찌감치 “미국에 고속철 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고, 연방 상원의원 시절부터 기차를 꼬박꼬박 타 ‘암트랙 조’로 통하던 바이든 대통령은 그해 초당적으로 통과시킨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 법안’에 철도 현대화 예산으로 660억 달러(약 90조 원)를 편성했다.
이렇게 자금 조달에 숨통이 트이며 다시 활기를 찾은 미국의 굵직한 고속철 프로젝트는 대략 5개다. 가장 적극적인 주는 캘리포니아다. 브라이트라인 웨스트가 공사를 맡은 LA~라스베이거스 구간 외에 주정부 주도로 LA~샌프란시스코 구간을 최고 시속 354㎞ 열차로 2030년대 중반까지 연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민간업체인 텍사스 센트럴이 암트랙과 협력해 짓는 텍사스 고속철은 댈러스~휴스턴 구간을 시속 322㎞ 열차로 2026년까지 잇는다는 게 애초 설계다. 암트랙은 워싱턴~보스턴 구간에 연내 시속 257㎞로 달리는 새 어셀러를 선보일 예정이고,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시애틀·포틀랜드를 2035년까지 연결하는 국가 간 고속철 건설 계획도 검토되고 있다. |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그렇지”, “자신 있게 해” 2024 파리 올림픽 남자 태권도 80㎏급에 출전한 서건우(한국체대)가 경기를 펼치는 내내 그랑팔레 경기장에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송 중계에서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 서건우의 경기 운영을 도왔던 이는 한국 태권도 대표팀의 오혜리(36) 코치다. 그는 제자 서건우가 동메달 결정전까지 올라가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서건우는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린 남자 80㎏급 16강전에서 칠레의 호아킨 추르칠과 대결했다. 서건우는 이 경기를 라운드 점수 2-1(6-8 16-16 14-1)로 이겼다. 이 경기는 서건우의 올림픽 데뷔 무대였다. 최종 승자는 서건우였으나 오 코치의 발 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서건우는 올림픽 데뷔 무대에서 짐을 쌀 뻔했다. 2라운드가 막 끝난 시점 승자가 추르칠로 선언됐다. 1라운드를 내준 서건우는 2라운드 종료와 함께 회심의 뒤차기를 성공한데다 상대 감점까지 끌어내 16-16을 만들었다. 이 같이 라운드 동점인 경우 회전차기로 딴 점수가 더 많은 선수, 머리-몸통-주먹-감점의 순으로 낸 점수가 더 많은 선수, 전자호구 유효 타격이 많은 선수 순으로 승자를 결정한다. 오 코치는 서건우가 두 차례, 추르칠이 한 차례 회전 공격을 성공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추르칠이 승자가 된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오 코치는 바로 코트로 뛰어 들어와 이의를 제기했다. 오 코치는 약 10초간 코트의 심판과 본부석을 오가며 강하게 항의했다. 양손 검지손가락을 흔들며 판정에 문제가 있다고 거듭 강조한 오 코치는 양팔을 치켜들며 항의의 뜻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에 경기 관계자들이 한데 모여 각 동작과 장면을 따져보며 동점 상황에서 판정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재검토했고, 결과가 번복됐다. 최초에 회전 공격보다 감점 빈도가 더 우선순위로 설정된 채 판정이 이뤄졌음이 뒤늦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오 코치의 신속하고 강력한 항의로 운영 시스템상의 오류가 밝혀졌지만, 오 코치는 규정 위반에 따른 경고를 피하지 못했다. 세계태권도연맹(WT)의 대회 규정을 보면 판정에 대한 항의는 심판이 아닌 기술 담당 대표(Technical Delegate)에게 해야 한다. 또 경기 운영과 관련, 장내의 관중들을 상대로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는 등 행동도 자제해야 한다. 이에 WT는 오 코치에게는 '경고 및 공개 사과'를 적용했다. 첫판부터 패배의 쓴맛을 볼 뻔했다가 기사회생한 서건우는 오 코치의 빠른 대처로 3라운드를 압도하며 8강으로 올라섰다. 다만, 서건우는 3위 결정전에서 '덴마크 복병' 에디 흐르니치에게 라운드 점수 0-2(2-15 8-11)로 패하며 아쉽게 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경기 후 오 코치는 제자 패배의 아쉬움에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였다. 오 코치는 16강전을 돌아보며 "심판 대신 기술 담당 대표에게 말해야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뒷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대로 끝나면 뭘 해도 뒤집을 수 없다"고 말했다. WT의 '경고 및 공개 사과’에 대해 오 코치는 "내가 사과해야 한다"면서도 "선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뭐든지 해야 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체대와 대표팀에서 서건우를 지도한 오 코치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67㎏급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오 코치는 "건우가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며 "좋아하는 콜라도 끊고, 탄산수를 먹으면서 운동했는데…"라고 아쉬워했다. 서건우도 "나 때문에 코치님이 정말 많이 힘들어하셨다. 보답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16강에서 그렇게 해주시지 않았으면 졌을 수도 있다. 발 벗고 나서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열심히 하겠다. 주신 만큼 보답하는 선수가 되도록, 더 나은 제자가 되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세계 랭킹은 실력순이 아니었다. 숫자에 불과했다. 여자 태권도 57㎏급 세계 24위 김유진(울산광역시체육회)이 올림픽에서 대반란을 일으켰다. 세계 5위부터 4위, 1위, 2위를 차례로 꺾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김유진은 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여자 태권도 57㎏급 결승전에서 2위 나히드 키야니찬데(이란)를 2-0으로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앞선 16강에서 5위 하티제 일귄(튀르키예), 8강에서 4위 스카일러 박(캐나다), 준결승에서 1위 뤄쭝수(중국)를 잇달아 격파해 세계 랭킹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랭킹 파괴자’가 된 김유진은 세계 랭킹의 의미에 대해 “진짜 별거 아냐”라고 힘줘 말했다. 한국 태권도는 당초 금메달 1개를 목표로 잡았지만 남자 58㎏급 박태준(경희대)에 이어 김유진이 이틀 연속 ‘금빛 발차기’를 날려 3년 전 도쿄 대회 노골드 수모를 제대로 씻었다. 아울러 2008 베이징 대회 임수정 이후 여자 57㎏급 올림픽 금메달을 16년 만에 수확했다. 태권도가 종주국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한국 선수단은 금메달 13개로, 역대 최고 성적을 찍은 2008 베이징 대회, 2012 런던 대회 금메달 개수와 동률을 이뤘다. 1976 몬트리올 대회 이래 48년 만에 최소 규모로 꾸려진 선수 144명이 만든 대반전이다. 한국 선수단에 13번째 금메달을 선사한 김유진은 랭킹이 낮아 파리 올림픽 전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태권도 대표팀 가운데 김유진만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모두 5위 이내였기 때문이다. 박태준이 3위, 남자 80㎏급 서건우(한국체대)와 여자 67㎏ 초과급 이다빈(서울특별시청)은 나란히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실제 올림픽을 앞둔 충북 진천선수촌 태권도 미디어데이 때도 김유진을 향한 관심은 크지 않았다. 밀려오는 서러운 감정은 독기를 품게 만들었다. 김유진은 자신을 지도하는 손효봉 대표팀 코치에게 “선생님, 저 진짜 자존심 상해요. 제 기사가 뒤에 한 줄 나오는데, 깍두기인가 봐요”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이에 손 코치는 “고생할 만큼 했으니까 무조건 일 낼 수 있다. 자신만 믿어라”라고 힘을 실어줬다. 안 그래도 모든 초점이 운동에 맞춰진 일상인데, 김유진은 더 독해졌다. 하루에 발차기 연습만 1만 번 할 정도로 훈련, 또 훈련을 했다. 유럽 전지훈련을 갔다 온 당일에도 시차 적응 대신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김유진은 “정말 관두고 싶을 정도로 훈련했다”며 “훈련 나갈 때마다 지옥길에 가는 것처럼 했다”고 밝혔다. 손 코치는 “단 하루도 안 쉴 만큼 진짜 독하다”며 “훈련을 같이 나가느라 내 몸무게가 10㎏ 빠졌다”고 덧붙였다. 올림픽 무대에 서기까지 겪었던 우여곡절도 김유진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2022년 무릎 인대 부상으로 1년간 재활에 매진하느라 세계 랭킹이 계속 떨어져 세계 1~5위에 주어지는 올림픽 출전권을 미리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태권도협회가 올해 1월 내부 회의를 통해 여자 57㎏급에서 한 장 더 올림픽 티켓을 따기 위해 도전하기로 했고, 김유진은 2월 진행된 자체 선발전을 통과했다. 그리고 이후 관문인 3월 아시아 선발전에 나가 상위 2명에게 주어지는 파리행 티켓을 따냈다. 먼 길을 돌아 올림픽 무대에 오른 김유진은 오히려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지난 과정을 돌아보면서 ‘내가 이까짓 거 못하겠냐’라는 생각을 했다”며 “너무나도 힘들게 준비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금메달을 획득한 뒤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할머니다. 김유진은 8세 때 호신술을 배우라는 할머니의 권유로 태권도를 시작했다. 또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사람도 할머니라고 했다. 김유진은 할머니를 향해 한마디 해달라는 말에 “할머니, 나 금메달 땄어. 태권도 시켜줘서 너무 고마워”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체중 관리를 혹독히 하느라 식단 조절을 했던 김유진은 “삼겹살과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 그리고 맥주”라며 환하게 웃었다. 대회 후반부를 향하는 한국 선수단은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금메달 13개를 따냈다. ‘금빛 레이스’는 양궁(5개), 사격(3개)이 주도했고 펜싱(2개), 태권도(2개)가 뒤를 받쳤다. 배드민턴도 1개를 보탰다. 11일 폐막 전까지 남은 일정을 볼 때 분위기를 탄 태권도, 근대5종 등에서 추가 금메달도 기대할 수 있다.
'배드민턴 레전드'로 불리는 방수현 MBC 해설위원이 2024 파리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이 대한배드민턴협회를 상대로 불만을 드러낸 데 대해 "협회가 안세영을 얼마나 특별 케어했는지 밝혀질 것"이라며 연일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방 해설위원은 9일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배드민턴협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안세영한테 개인 트레이너를 허용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안세영이 힘들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는 건 2022년에 열렸어야 할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2023년에 열렸는데 결승에서 부상을 당했고, 그걸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제대회 출전과 파리올림픽을 준비했다"며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협회에서) 안세영의 몸 상태 회복을 위해 많은 걸 배려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뛸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이라면 병원 진단서를 제출하면 해결되지만, 대부분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점수를 따야 올림픽 시드를 배정받을 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대표팀 선수로 뛴다는 게 얼마나 어렵나. 안세영만 힘든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모든 선수들이 그런 환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 나도 어린 나이에 대표팀에 들어가 그 시간들을 다 겪었다"라며 "대표팀을 누가 등 떠밀어서 들어간 게 아니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방 해설위원은 안세영의 '작심발언'에 대해 "안세영으로선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자신의 말에 힘이 실렸을 때 협회의 부조리나 대표팀의 선수 보호 문제를 터트리려고 했겠지만 그를 도운 연습 파트너들, 감독, 코치들, 트레이너들의 수고가 간과된 것 같아 안타까웠다"며 "그 인터뷰로 인해 올림픽에 출전하는 다른 선수들과 이슈, 성적이 묻혔다"고 했다. 또 "개인적으로 협회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선수가 있겠냐. 나도 선수 시절엔 협회의 운영에 불만이 있었을 것"이라며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 섰고, 그 무대에서 어렵게 금메달을 획득했다면 그 금메달의 가치와 영광의 여운을 안고 귀국한 다음에 자리를 만들어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전달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지난 7일 YTN 라디오 '슬기로운 라디오생활'과의 인터뷰에서도 "배드민턴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며 "안 선수가 유망주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협회에서 지원이 가서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방 해설위원은 1996년 제26회 애틀란타 올림픽 배드민턴 국가대표로 출전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28년 뒤 후배 안세영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순간에는 해설자로서 함께 금메달의 기쁨을 누렸고, 기념 촬영을 하며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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