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어머니의 기억 속 외할머니의 텃밭은 그 시절 다른 텃밭과는 조금 달랐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다 보니 그 시절 대부분은 텃밭(혹은 텃밭이라고 불리우기 민망한 작은 공간에서도)에서 감자, 고구마부터 고추, 상추 등 오밀조밀 온갖 농작물을 키웠다. 하지만 할머니의 텃밭은 여름엔 봉선화 수국, 가을엔 코스모스, 아름다운 꽃들이 계절마다 흐드러지게 피었다. 혹자는 어차피 한 철 보는 꽃들인데 꽃밭을 일군 할머니가 생활력이 없다 거나 철이 없다고 말했더란다. 하지만 그 꽃들은 한 철이 아니었다. 예순이 넘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 육남매를 악착같이 키워낸 할머니의 꽃밭은 생생히 살아있었다.
<식물에 관한 오해>(이소영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는 <식물의 책>, <식물과 나> 등의 전작을 통해 식물의 세계, 그리고 식물과의 관계 맺음을 누구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본 식물세밀화가이자 원예학 연구자인 이소영 저자가 식물을 마주하는 시선을 이야기한 책이다. 저자가 16년간 식물을 관찰하고 기록해온 시간 동안 맞닥뜨린 식물에 관한 크고 작은 오해와 편견을 모은 책으로, 식물을 향한 기존의 시선에서 벗어나 식물의 다채로운 모습과 강인한 생존력에 집중했다.
'꽃밭'으로 인한 할머니에 대한 오해때문일까. 저자가 책을 쓰게 된 계기부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한 기관으로부터 식물 기록 프로젝트를 제안 받고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관의 상부에서 식물의 '약하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기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 때문에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저자는 그 프로젝트가 중단되어서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참 마음에 들었다. 식물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저자에게서도 식물의 생명력에서 느낀 기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곳 정원의 식물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이내 실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물을 연약하고 수동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식물이란 생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방증이며, 그렇다면 그 기관은 애초에 식물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기대할 자격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가 만나온 식물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며, 땅에 고정되어 있을 뿐 빠르게 형태를 변화시키고, 번식을 위해 누구보다 삶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었습니다."
독립 후 살던 작은 나의 첫 자취집에도 베란다와 부엌 창틀 곳곳에 화분이 몇 개 있었다. 외할머니처럼 식물을 사랑한 어머니 덕이었다. 아파트 베란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덩굴 식물을 키울 정도로 어머니의 베란다 정원은 다양한 식물들로 가득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식물이 있어야 한다면서 아끼던 식물들을 독립한 내게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식물을 제대로 돌본 적이 없던 나는 때로는 물을 많이 주거나, 때로는 적게 주어서 식물 여럿을 죽이고 말았다.
어머니는 가끔 나의 집에 와 식물들을 둘러보고는 "이렇게나 키우기 쉬운 식물을 어쩌다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라고 혼잣말인 듯 아닌듯한 핀잔을 건네며 죽은 식물들을 데려갔다. 놀라웠던 것은 죽은 줄 알았던 식물들이 어머니와 몇 개월만 지내면 되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식물들은 쉽게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고,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고 말했다. 저자 역시 "제가 만나온 식물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며, 땅에 고정되어 있을 뿐 빠르게 형태를 변화시키고 번식을 위해 누구보다 삶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었다"고 식물이 지닌 생의 의지를 설파했다.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올 초 힘든 시기를 보냈다. 마음은 불안했고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겨우내 죽은 줄 알았던 베란다의 무화과 나무에서 작은 이파리가 난 것을 보았다. '봄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불안했던 마음에 무화과 싹과 함께 안도감이 찾아왔다. 매일 아침 조금씩 자라나는 무화과 잎사귀를 보며 왠지 모를 용기를 얻었다. 지금은 잎들이 손바닥만한 크기로 자라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 남았던 무화과 나무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기를 띠고 있다. '꽃'이 없는 무화과지만 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며 '꽃이 없으면 어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오해였다. 무화과는 '꽃'이 있었다.
"무화과는 한자로 '꽃이 없는 과일'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착각에서 빚어진 오류다. 무화과를 초기에 발견한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들여다봐도 꽃이 보이지 않으니 꽃이 피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무화과에도 꽃은 있다. 심지어 수도 없이 많은 꽃이 핀다. 이 꽃은 열매 이전의 꽃주머니 안에서 우리 눈에 띄지 않고 자잘하게 피어날 뿐이다. 무화과를 먹을 때 씹히는 수많은 씨앗이 꽃의 존재를 증명하니, 우리는 식감으로 꽃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무화과 열매 끝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이것을 무화과 눈이라고도 부른다. 무화과 나무의 수분을 돕는 무화과 말벌은 이 구멍을 통해 꽃주머니 안팎을 드나들며 꽃가루를 옮긴다."
저자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식테크'(식물과 재테크의 합성어)가 식물 문화의 확대를 꾀한다는 오해를 반박했다. 살아 있는 생물을 재테크에 이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부터, 식물을 보존하려는 노력의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저자는 "원예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식물을 많이 이용하고 문화를 확산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과 인간이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 데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식테크를 하는 이들은) 다들 식물 문화가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식물 문화의 확대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문화의 확산은 과정일 뿐, 내 방 화분의 식물을 사랑하고 내 정원을 아끼려는 마음이 널리 퍼져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이후의 목표는 내 소유의 식물만이 아닌 더 넓은 숲의 식물종 보존으로 향해야 한다… 식물을 수단으로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현재의 식테크와 같은 문화가 과연 식물과 사람의 조화로운 행복에 맞닿아 있는지, 꼭 필요한 일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늦가을에 핀 벚나무, 봄에 핀 단풍나무를 보고 혹자는 '기후위기'라며 걱정을 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이 또한 오해라고 말했다. 저자는 "춘추벚나무와 장미가 가을에 꽃을 피운 게 이상해 보인 것은 가을에 꽃 피우는 장미와 벚나무가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를 의심하기 이전에 우선 우리의 무심함부터 돌아볼 일이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생소해보이는 자연현상의 원인을 모두 '기후위기'로 돌리는 것은 "지구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산을 깎아 도로와 아파트를 짓고, 생태계 교란의 위험이 있는 외래 생물을 들여오는 인간이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틈새 식물에 관한 편견, 능소화 꽃가루에 관한 오해, 생존을 위해 잎과 꽃을 여닫는 식물의 전략, 동물을 이용한 도깨비바늘의 이동력 등을 들어 저자는 사람들이 식물에 관해 갖고 있는 오해나 편견을 되짚고 번식을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식물의 강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매 장마다 아름답고 정밀한 식물세밀화도 수록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의 모든 문제의식에 동의하긴 어렵지만, 식물의 생명력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고민해볼 수 있게 되는 책이다. 식물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 편견은 잠시 내려놓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식물의 진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