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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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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군주 곁엔 모사가 있고 훌륭한 모사를 둔 제왕은 치국에 능합니다

图片信息 : 魏徵斩龙王的故事是真的吗?

우리는 ‘모략(謀略)’이라는 단어와 함께 권모(權謀)와 술수(術數)를 떠올립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모략이라는 낱말은 부정적이며 음습(蔭襲)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사정(事情)이 달랐습니다. 역대로 많은 훌륭한 모사(謀士)들이 당면한 문제를 풀어야할 때 당연히 그에 따르는 해결책을 간언(諫言)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役割)을 맡아왔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4대 기서(奇書) 중에서 민간의 상상력이 가장 풍부하게 가세(加勢)한 작품이 있습니다. ‘서유기(西遊記)’입니다. 소설 줄거리는 서역(西域)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얻으러 먼 길을 떠나는 현장법사(玄奘法師)와 싸움 잘 하는 원숭이 손오공(孫悟空)이 두 축을 이룹니다.

손오공 없으면 현장은 ‘요괴들 먹잇감’덕이 높은 고승(高僧)과 그 밑을 받쳐주는 행자(行者)의 구조입니다. 현장이 ‘얼굴’을 상징한다면 손오공(孫悟空)이 ‘몸체’를 형성하는 그림입니다. 현장은 거룩한 부처의 말씀, 진리(眞理)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테면, ‘명분’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그에 비해 손오공은 진리 추구를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현장법사(玄奘法師)의 조력자입니다. 따라서 그는 ‘명분(名分)’에 부합하는 현실의 ‘방도’를 상징합니다. 명분만 거창하다고 해서 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온갖 풍파를 헤쳐 나가지 못하면 진리의 구도자 현장법사는 요괴(妖怪)들의 ‘맛난 고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서유기’의 현장법사와 손오공(孫悟空)은 각각 명분과 실제, 이상과 현실을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손오공’의 범주에는 그의 동료 저팔계(猪八戒)와 사오정(沙悟靜)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손오공을 핵심으로 하는 행자의 구도에 들어갑니다.

이런 그림은 중국의 모략(謀略) 세계에서 매우 돋보이는 설정입니다. 겉으로 내거는 명분도 그럴 듯해야 하고, 그 속을 채우는 현실의 방도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아남고, 또 그래야만 승리를 쟁취한다. 두 요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 우리가 살펴야 할 항목이 책사(策士)·모사(謀士)·모신(謀臣)의 전통입니다. 편의상 아래 글에서는 이들을 묶어 ‘모사’로 적습니다. 앞서 두 회에 걸쳐 들여다 본 제갈량(諸葛亮) 또한 강력한 모사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중국 역대 모사(謀士)를 꼽는 자리에서 윗자리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이미 설명했듯, 주군(主君)을 향한 변치 않는 충정(忠情)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의 전쟁터에서 내세울 만한 전적(戰績)을 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훨씬 웃도는 중국 역대 모사는 수두룩합니다. 우선 먼저 소개한 강태공(姜太公)은 중국 모략 정신세계의 큰 흐름을 열었다는 점에서 늘 1위로 꼽힙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도와 춘추시대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인물이 바로 관중(管仲)입니다. 그 또한 모략이라는 정신세계의 가장 충실한 구현자(具現者)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선 포숙(鮑叔)과의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오늘날의 중국인이 결코 잊지 않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흐름을 중국 초기 역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펼쳐 보인 인물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습니다. 공자(孔子)도 “논어(論語)”에서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오랑캐의 옷과 차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극찬(極讚)했을 정도입니다. 그의 치적(治績)을 일일이 열거(列擧)하는 일은 번거롭습니다. 그래도 뚜렷한 몇 업적을 소개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공자의 언급처럼 초기 중국 역사에서 중원(中原)이라는 공동체를 주변 이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낸 인물에 해당합니다. 이름만 남아 있는 주(周)나라 왕실을 대신해 중원 공동체의 구심점(求心點)을 이뤘고, 그에 부합하는 강력한 국력을 쌓아 공동체 구성원들을 한 데 묶었습니다.

제나라의 환공(桓公) 또한 한때 자신을 저격해 죽이려고 했던 관중(管仲)을 기용했습니다. 뛰어난 안목과 포용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눈앞의 작은 은원(恩怨)에 얽매이지 않고 큰 국면을 살피면서 숱한 제후국 사이의 이해를 조율(調律)하며 중원의 공동체를 한 묶음으로 만들어낸 관중의 공로가 없었다면 환공은 그저 평범한 군주(君主)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중은 우선 내치(內治)에 온 힘을 기울여 국가의 경제와 재정·국방을 크게 다집니다. 백성이 잘 살고 사회가 부유해야 군대의 힘을 키울 수 있다는 ‘부국강병(富國强兵)’에 관한 논리는 지금의 동양사회에서도 여전히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들립니다.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에게 걸출한 참모이자 희대의 군사전략가 장량(張良)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한나라 세력을 크게 압도했던 항우(項羽)로부터 유방의 목숨을 건진 사람일 뿐 아니라, 한나라 건국 전 여러 차례에 걸쳐 닥쳤던 위기(危機)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유방의 에너지원에 해당했습니다.

요즘도 중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황제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입니다. 그에게는 위징(魏徵)이라는 강직한 모사가 있었습니다. 황제가 얼굴을 찌푸릴 정도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나라 초반의 혼란기(混亂期)를 내정과 민생의 안정으로 극복코자 했던 사람입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위징이 죽은 뒤에 고구려 정벌(征伐)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의 완강한 저항으로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로써 당나라 국운(國運)은 크게 기울고 맙니다. 말년의 이세민은 “위징이 있었더라면 고구려 정벌을 말렸을 것”이라며 통탄(痛嘆)을 금치 못합니다.

마오저둥(毛澤東)은 사회주의 새 중국 건국의 ‘얼굴’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던 인물입니다. 그 밑에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과의 교섭(交涉)을 정밀하게 이끌고, 압도적인 상대였던 국민당 속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심어놓고 노련한 이간(離間)의 계책을 주도했던 사람이 저우언라이(周恩來)입니다.

마오저둥(毛澤東)이 없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생각할 수 없고,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없는 마오저둥(毛澤東) 역시 상정하기 힘듭니다. 명분과 실제, 이상과 현실의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중국의 문명은 명분(名分)보다 실제, 이상보다 현실에 더 기운다는 느낌을 줍니다. 유비보다는 제갈량(諸葛亮)이 더 유명하고, 현장법사보다는 손오공(孫悟空)이 더 이름을 떨쳤기에 품어보는 생각입니다.

마오저둥(毛澤東)와 저우언라이(周恩來)? 물론 마오저둥(毛澤東)가 더 유명하다. 그러나 마오저둥(毛澤東) 자체가 모략에 관한 한 최고수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모략은 전략(戰略)과 동의어일진대, 도대체 중국 역사의 전개과정(展開過程)에서는 어떤 살풍경이 벌어져 이렇듯 깊고 어두운 모략의 전통으로 이어진 것일까요. 우리는 그것이 참 알고 싶을 뿐입니다.

따라서 당 태종 밑에서는 위징(魏徵)이 맹활약지금까지 훑어 본 군주와 모신의 구도입니다. 주나라 문왕과 강태공, 제나라 환공과 관중(管仲), 월나라 구천과 범려(范蠡), 한나라 유방과 장량(張良), 당나라 태종과 위징입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현장법사와 손오공(孫悟空)을 필두로 한 행자 그룹의 구도를 빼닮은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군주와 모신의 이야기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의 흉내를 내서 열전(列傳)으로 작성해 이 중앙의 지면을 아주 오래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큰 시각에서 중국 인문의 풍경을 감상해야 하는 게 우리의 일이니까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모사들이 많았지만 여기서 언급(言及)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중국 모사들에 대한 이야기에 우리나라 모사들을 소개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마디 부언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모사가 많아 정국(政局)을 잘 이끌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기대할 뿐입니다. 

앞의 어느 대목에서 잠시 소개했듯이 유방(劉邦)은 건국 뒤에 “전략의 구성으로 천리 바깥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는 장량(張良)이 큰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말을 남깁니다. 실제 한나라 건업(建業)의 과정에서 전략의 구성에 관한 한 유방이 장량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했음을 시사(時事)하는 대목입니다.

현대말로 제 아무리 똑똑한 논객(論客)이라 할지라도, 모든 방면을 전문가 수준으로 깊이 있게 파악(把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논객의 특성상 다방면에서 의견을 개진(改進)하다가 자신의 전문분야(專門分野)가 아닌 부분에서 헛소리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말하는 부작용 사례도 많습니다. 

분명 이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대한 관심의 원동력(原動力)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사회적인 기여(寄與)가 있다고 할 만하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도 아는 척 해야 함은 물론 그때그때 신속하게 반응(反應)해야 하는 만큼 지식이나 사유(思惟)가 부족할 수 있는 발언(發言)이나 텍스트를 생산하는 경우가 아주 많으므로 논객들의 말은 항상 걸러들어야 하겠습니다.

말(言)이 생명인 직업이기 때문에 뛰어난 언변과 자질(資質)을 갖추는 것이 필수입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소양(素養)과 깊은 통찰력, 언변, 능력을 모두 갖춘 논객(論客)들은 각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유명세(有名稅)를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논객은 그 자체를 본업으로 삼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논객은 고정적인 수입내원(收入来源)이 없고 전공분야(專功分野)가 있다고 보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객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다양한 입장의 의견(意見)을 접하고, 자신의 입장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사회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이슈를 두고 찬반양론(贊反兩論)이 있을 때, 찬성 측 논객과 반대 측 논객이 맞붙는 것을 보고 국민들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合理的)인지 가늠하고 자신의 입장을 결정(決定)할 수 있습니다. 수준 높은 논객들은 그만큼 민주주의의 수준(水尊)을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회진보와 국정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모사들은 우리 국민들은 언제나 대환영(大歡迎)할 것입니다. 아쉬운 심정으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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