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이롭게 하는 게 나에게도 이롭다(自利利他).
"저의 인생, 저의 사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말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롭다는 뜻이죠. 불교에서 나온 말이지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의 황금률과도 통한다.”메일로 전하는 경영어록 ‘행복한 경영 이야기’를 7년째 ‘배달’하고 있는 조영탁(45) 휴넷 사장은 “휴넷이 벌이는 교육 사업이 ‘행복한 경영 이야기’의 덕을 보는 것도 자리이타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교의 최대명절인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연등 달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고현시장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는 보살님이 와서 연등접수를 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새해 첫날에 다리가 부러져서 버려진 강아지를 이웃사람의 소개로 키우게 되었는데, 동물병원에서 수술하고 정성을 들여 키웠더니 예쁘게 자라서 재롱을 떠는 모습에서 매우 흐뭇하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이 예상외로 잘된다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마치, 고대소설 ‘흥부전’에서 부러진 다리를 고쳐준 흥부에게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주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자신의 교통비와 용돈을 아껴서 매달 일정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돕고 싶으니까 스님이 대신 맡아서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보살님이 직접 하는 것이 좋을텐데요’라고 말을 해보니, 부끄럽다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라는 그 보살님에게서 무주상보시(無住想布施)를 느끼게 되었다. 보시(베품)를 하면서도 무주상(베풀었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음)할 때, 참다운 보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성경말씀에서도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알게 해준다.
불교의 기본정신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下化衆生 上求菩提)이다. ‘위로는 보리(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말로서, 자신이 수행을 통하여 먼저 도를 이룬 연후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상구보리는 자리행(自利行)을, 하화중생은 이타행(利他行)을 말한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관계에서 순서와 방법의 문제가 있을수 있다. 자리즉이타(自利卽利他)는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고, 자리후이타(自利後利他)는 나를 이롭게 한 이후에 남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며, 이타즉자리(利他卽自利)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나를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각자의 근기(조건이나 상황 등)에 따라서 자리(自利利他)에 대한 해석과 순서와 방법의 문제를 달리 선택하게 되겠지만, 자리이타는 건전한 삶의 잘 갖춰진 윤리이며,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지혜의 정신이다.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이다.’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자신의 삶을 올곧게 잘 사는 것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하며, 내 모습이 교훈이 되어 그들이 잘 살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향을 싼 종이에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내가 행복해지면 내 주변을 행복하게 할 수가 있으며, 내가 불행해지면 내 주변도 불안하게 되어 불행해지는 것이다.
공덕론(功德論)으로 보면, 이타행을 통해서 남을 이롭게 해주게 되면 ‘보람’이나 ‘행복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삶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람을 느끼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기에 이타행을 통해서 자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구하라.’는 하나남의 말씀처럼,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나를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자리이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사회 전체를 위한 희생적인 책임감으로도 표현될 수도 있겠고, 서로서로가 ‘윈(Win)-윈(Win)'하는 의미도 포함된다.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살다보면, 남도 좋고 나도 좋아지면서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수가 있게 되고, 이 세상은 불국정토가 될 수 있다.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이 있습니다.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을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해탈열반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대승불교의 보살심(菩薩心)을 표현한 말이다. 자기와 타인이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와 상통한다. 경쟁보다는 상생의 삶을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점점 각박해지는 현실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다.
돈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힘들게 번 돈일수록 애착은 더 강하다. 돈을 기부하면 도움 받는 사람들을 좋겠지만 자신은 뭐가 좋을까. 바로 보람(뿌듯함)이라고 한다. 자원봉사자들도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자신이 받는 기쁨이 더 크다고 한다. 지난10월 홍천에서 헬멧이 녹는 불길을 뚫고 세 살짜리 아이를 구한 소방관들의 감동 스토리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좋은 사례다. 이들은 1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아기 엄마 목소리를 듣고 반드시 아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좋은 일을 하면 행복감이 상승한다.
새해는 밝았지만 현실은 녹녹하지 않다. 경제가 더 어려워지면서 연 초부터 살벌한 이야기들이 들린다. 이럴 때 일수록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이 요구된다. 나눔은 고소득자 등 가진 자 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소액이지만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개인들이 늘고 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을 믿고 싶다. 올해는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궁지로 모는 자리해타(自利害他)는 없었으면 좋겠다.
붓다의 가르침 중에서 현대인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얼른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치열한 경쟁을 치르도록 조직되다 보니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보다 많은 재물을 모아야 하고, 심지어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되면 그만인 세상에서, 자리이타는 먼 나라 남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이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듯이, 얼음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물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변화한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지금이 아무리 좋더라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힘들고 어렵다고 희망까지 버려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차피 변할 것이고 생겨난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깐 동안 빌려 쓰고 가는 것이다. 사용할 때는 가능하면 많이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돌아갈 때에는 원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고 가야한다.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물려줘야 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다. 되돌려 놓지 못하면 고스란히 빚이 되고 만다. 빚을 지면 당연히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려면 그만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기왕에 이 세상에 나왔고 그리고 배역을 맡았으니, 한바탕 잘 놀아보고 가야 하는데, 어찌하는 것이 잘 노는 것인가? 바로 이타행(利他行)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관객 중심이어야 한다. 관객이 만족하면 배우도 만족하듯이, 관객이 만족하도록 하는 것이 나에게도 이로운 것이기 때문에, 관객이 만족할 때까지 부모, 스승, 아라한처럼 받들어 모시고 공양해야 한다.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이라면 고객만족(利他)이 기업을 번창(自利)하게 하는 것이다.
고객이 만족하면 단골이 되고 다른 고객을 추천하여 새로운 고객이 늘어나고, 결국엔 판매가 늘어나게 된다. 또 어떤 고객은 기업에 귀중한 정보나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이 쌓여서 기업이 번창하게 된다. 고객을 진심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마음으로 대하고, 고객에게 이로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기업을 경영하면 그 공덕으로 기업이 번창하는 것이다.
아직도 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인가? 싶다면, 농사짓는 일을 생각하면 쉽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식량을 준비하려면 농사를 지어야하고, 농사를 지으려면 밭이 있어야 하듯이, 이타행(利他行)의 대상인'남'들이 모두 나의 '복밭(福田)'이기 때문에, 복 농사를 지을 복 밭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굳이 남을 이롭게 한다고 할 수도 없다. 오히려 밭이 돼 주어서 고맙다고 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항상 변하지 않고 머물러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이 제행무상의 이치를 따라 고해(苦海)를 헤쳐 나가는 뗏목이 바로 '나'가 없는(無我) 베풀음이자 배려로서의 이타행이다. '나'를 고집하지 않는 이타행이 곧 나를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쉽게 말해서 내 복(福) 짓는 일이다. 지어 놓으면 남 주는 게 아니라 내가 거둔다. 결국엔 공업중생(共業衆生)으로 나와 남이 모두 다 같이 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잘 사는 사람,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병든 이에게,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에게, 가난한 이에게, 어두운 밤에 등불이 되어 항상 모든 중생들을 위해 평등하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 설을 보내면서 올 겨울은 유난히도 동장군이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절기를 거스르지는 못하는 법, 보리농사처럼 찬 기운 듬뿍 받아 봄이 오면 알찬 수확을 올릴 것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자리이타(自利利他)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남자는 문을 열고 그냥 나왔다. 그런데 뒤에 여자가 나오다가 자동으로 닫히는 문에 부딪히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걸 보고 뒷머리를 긁적이는 남자의 모습 위로 엑스(X)자가 그려진다. 몇 년 전 공익광고의 장면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이해했지만 내가 자주 들리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그 광고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떻게 배려를 강요하는 광고를 만들 수 있는지 어이없어 한 것이다.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사람들에겐 너무 올드한 광고였던 것이다.
지금 어른이라고 규정된 범주에 해당하는 세대들은 공동체의 중요성, 이타적 희생의 강요를 교육으로 배운 사람들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우선해야 하고, 내 이익을 포기해야 좋은 사람이라는 교육을 받고 산 것이다.
지금의 세대를 보자. 매체에서는 민지(MZ)세대라고 한다. 민지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자리(自利)주의이다.
이타(利他)주의를 강요하고 교육하였지만 그다음 세대들은 자리(自利)주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모두 중요하다. 이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도 없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있겠는가. 인식하는 나가 있어야 세상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이익은 아주 중요하다.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의 전부인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민지(MZ)세대의 개인주의, 자리주의는 욕을 할 것도 없고, 존중해 주어야 할 일이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은혜이다. 은혜는 갚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전 세대의 이타적 희생, 공동체 주의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상이며 존중받아야 할 일이다.
문제는 어느 것 하나만을 강조했던 분위기이다.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한데 한 가지만 강요한다면 자연스럽게 대중의 시선은 다른 한 가지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이제는 두 가지 모두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두 가지를 어떻게 공유하며 조화시킬 수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함께 강조해야 한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대종사는 사은(四恩) 중 동포은을 설명하며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자리이타(自利利他)로써 은혜를 주고받았기에 그 은혜를 갚는 방법 역시 자리이타(自利利他)로써 해야 한다고 했다. 원불교에서는 이미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한 단어로 쓰인다.
원불교의 3대 종법사이신 대산 종사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과 인류가 영세토록 다 같이 잘 살아갈 생활 표준은 대종사께서 밝혀 주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라, 이 표준대로만 살고 보면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고 일체 동포가 이롭고 현생도 좋고 내생도 좋으리라. 그러나 부득이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되지 않을 때에는 내가 해를 차지하는 자해타리(自害他利)의 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보살의 생활이니라.”
불보살의 생활은 우리 원불교 교도들이 지향하는 삶이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우리가 잘살아갈 표준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영세토록 다 같이 말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불교 심리학적 의미
본 논문은 ‘자리이타’가 생겨나는 보살의 심리과정을 살펴보고, 현대사회에서 ‘자리이타’가 구현되고 있는 양상을 불교 상담사의 심리에 초점을 두고 분석한 연구이다. 대승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변모했지만, 보살은 지금도 불교에서 이상적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본 논문은 보살수행 5위를 분석하여, 보살의 이타심이 통달위에서 ‘후득지’를 증득하면서 생겨나며, 보살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이타적인 행위를 하지만 보살도 해탈로 가는 과정에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불교 심리상담사의 역할을 ‘자리이타’의 현대적 모습으로 파악하고, 불교 심리상담사의 이타적인 마음이 내담자에 대한 존중, 내담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통찰력, 내담자에 대한 정확한 공감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특히 상담자는 교육분석을 통해 자신을 점검함으로써 내담자와 함께 상호성장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밝혔다.
佛法认为,生命可以分为三个阶段:一个是纯粹利己的,这就是我们凡夫的阶段;还有一个是既利己又利他的,是菩萨的阶段;最后一个,是纯粹利他的,是佛的阶段。
凡夫的所思所想都是为了利己;菩萨已经能够利他,但还有一些利己的事情没有完全放下;而佛陀则是全然利他,哪怕呼出的一口气都会利益到很多的众生。对于佛陀来说,仅仅是呼吸这样一个简单的动作都无不在利益众生,更何况其他。
而对于我们凡夫来说,毕竟处在一个纯粹利己的阶段,所以只能是造作地去利他,刻意地发愿利他。
凡夫天生就是利己的,我们的自私与生俱来,不需要受教育,自然而然就会对自己好。
凡夫利益自己,这是很正常的事,所以佛法并没有一来就要求我们舍己利人。很多大德、很多伟大的修行人都说:我不要求你们利益他人,但却要求你们不伤害他人。
通过接受佛法的教育,比如看了《修心七要》,学习了《修心八颂》以后,我们会慢慢建立这样的观念:他人也像自己一样地追求快乐,也像自己一样地不愿意遭受痛苦,所以我们在利益自己的同时,做任何事都应该站在别人角度进行思维。
本来自己很想做的一件事情,站在他人的角度思考之后,我们也许就不做了;又或者某件事情已经在做的过程中了,但发现它影响到了别人,打扰到了别人,甚至是伤害到了别人,我们于是不再继续。这就是我们修行的一种进步。
但是现在很多人是反过来的,还没有做到停止伤害他人,心里就想要利益他人,嘴上也说着我要利益他人。
我们常常认为自己已经利益了很多人,解决了很多人的问题,但实际上,我们的很多快乐和幸福却都建立在别人的痛苦之上。
所以为什么大德们要求我们说,你不用利益他人,但是必须要停止伤害他人,就是因为我们的这些所思所想、所作所为,他们看得很清楚。
真正的利他一定是利己的,或者说利益自己也是为了更好地利益他人。
利益自己和利益他人的一个界限在哪里呢?
就是行为上利益自己,但心里要发愿利益他人。
行为上是不得不利益自己,因为我们还处在凡夫的阶段嘛。如果是佛,他不利益自己没事,菩萨不利益自己也没事,因为佛菩萨已经完全脱离了业烦恼的障碍,初地菩萨之上就不会再受这个五蕴色身的影响,已经脱离了生老病死的这些事情,所以不照顾身体也没关系。
但是我们凡夫不一样,我们即使心里很想利益他人,但如果行为上不利益自己的话是不行的,这个五蕴和合的血肉之躯是必须得好好照顾的。你爱自己也好,不爱自己也好,都得照顾它啊。
以前生活比较艰难的时候,有些父母因为很爱孩子,就把自己碗里面的肉都给孩子吃,时间久了,他的这个血肉之躯就因营养不良而虚弱,自然也就不能好好地照顾孩子了。
再比如有些人,儿女生病、父母生病的时候,特别体恤他们,好好照顾他们吃药、休养,但自己生病的时候却不当回事,不去医院,也不好好吃药,认为忍着就没事了。
如果你总是这样不爱自己的身体,同样身体也就不爱你,就可能罹患各种疾病,这就等于你不是在利他了。因为当你生病的时候,不仅不能服务他人,还会给他人增添很多麻烦。
所以说,我们在行为上不得不利益自己,同时内心则要发愿:我要照顾好自己,这样才能更好的利益他人。
有这样的心愿,那么利益自己也就是利益他人了。打个比方,我们对待自己的身体,要像对待车子一样:可以不爱它,但该维修就要好好维修,该加油就要加油,车子外观需要装饰漂亮的地方就装饰一下。
总之,我们可以把身体当成一个生存的工具来对待,需要吃早餐的时候就吃;需要营养的时候就给它营养;需要睡觉的时候就睡觉;需要治疗的时候就治疗。
如果连自己都没有照顾好,却想着利益他人,这个顺序就搞反了,是吧。你对他人有爱心这很好,但同时也要清楚自己的身体是有一个局限的,对它的使用不能超过它的能力。
我们在生活上不能过于极端,佛教主张保持中道。
过于不爱惜自己,也不是一种智慧的生活方式。
就像车子一样,它能承载多少,加的油能跑多远,轮胎需不需要换,刹车、油门需不需要检查,这些你都要考虑。不能说轮胎爆了还接着开,油没有了还要用空档,这不行吧?
真正照顾好自己,体现在生活的方方面面。
比如,你可以不爱自己,但是一定要打理好着装;你可以不爱自己,但是一定要梳理好头发;你可以不爱自己,但是该剪指甲的时候还是要剪,需要涂指甲油的时候也要涂,让人看到后感觉你的手指很漂亮,这也是一种利他。如果自己的手指甲长了、脏了都不管,别人看到后就觉得“哦,这个人是不是不会照顾自己呀”。
还有些人在生活中,昨天甚至前几天的剩菜还留着今天吃,吃完饭餐桌也不收拾,碗筷几天都没有洗,头发也是好几天没有梳理,等等。
修行人如果这样,不但没有利益到他人,而且还会招致他人的轻蔑或歧视。这时,你说的话就不会有什么力量,因为别人会觉得:“这个人连自己都照顾不好,那他说的话对我会有什么用呢?”
相反,如果自我管理得很好,不论有钱没钱都有良好的生活习惯,哪怕是放一个杯子、看一本书,都让人家一看就留下好的印象。别人看到你这样有规律地生活,发现自己的生活太乱了,于是想要向你学习,这时,你就自然而然地利益了他人。
现在这个时代,外表的影响力很大,一个学佛的人有多慈悲,别人看不出来;内在有什么样的境界,别人也看不出来;但是你有什么样的外表和气质,却是人人都会关注的。
如果你的气质特别好,大家就会赞叹:“哇!你看他学佛之后气质更好了,佛真有加持力!”这也是一种慢慢让他人学佛的善巧方便,只要对那些物质没有特别的执著就行了。
这就是为什么我说“为了利益他人而要利益自己”,或者我们不用“利益自己”这个词,改成“为了利益他人而要照顾好自己”。
你我现在处于完全是利益自己的一个生命阶段,我们不能模仿菩萨,更不能模仿佛。
不要今天皈依了,明天就炫耀自己是学佛人,马上好像一切都不执著了,穿得破破烂烂,吃别人吃剩的,这不是什么好的进展,这是快要发疯了。
学佛是一条很漫长的路,刚开始的时候,黄金可以戴,天珠、玛瑙、珊瑚,等等这些都可以戴;随着修行的进步,10年、20年、30年以后,你一件件地放下这些东西;最后,在去世之前,什么都不执著了,身上什么都没有了,这才是学佛的一个正确的过程。
相反,如果一开始就好像什么都不执著了,结果学佛越久越放不下,那就麻烦了。所以,大家一定要记住,学佛必须要循序渐进。
修持菩提心也是这样,我们不要认为没有做到利益他人就不符合菩提心的修持,甚至就是违背了菩提心,不是这样的。
修菩提心刚开始学的是什么?是要修造作的菩提心,能够刻意地去帮助他人,就已经很不错了。
重要的是观念上的转变,我们虽然做不到“自轻他重”的菩提心,也做不到“自他交换”,但是我们可以努力做到“自他平等”,或者至少建立起“自他平等”的观念,比如刚才我坐在这个地方很舒服,所以我让你们也上来舒服地坐在这儿,这就是自他平等。
而最后的自轻他重离我们还比较远,我们可以朝着这个方向努力,但是不要想一开始就做到。
千里之行,始于足下,学佛修行就是要脚踏实地、循序渐进。
就像鸟的成长一样,虽然飞翔是它最终的梦想,但还在蛋壳里面的时候,就急着想飞是不对的;即使从蛋壳里出来了,但翅膀上的羽毛还没有完全长好,这时就想起飞也是不对的。等到真正成熟了,长大了,翅膀硬了的时候,自然也就可以飞了。
我们凡夫的阶段就像是小鸟还在蛋壳里面一样,而自轻他重就像是真正的飞翔,对我们来说为时尚早。
佛法有很多层次、很多境界。如果不分次第,这个也学那个也学,却对自己的真实状况不加观察,那就很容易好高骛远、误入歧途。
比如关于自利利他的这个问题,我们一定要清楚,自己目前还处在一个纯粹利己的生命阶段,所以首先应该做好自己的事情,遵循世间做人的常识来照顾好自己,遵循佛法的教育来管理好自己的生活,利益他人的事情力所能及地去做就可以了。
与此同时,在内心也要造作地发愿有朝一日自己有能力做到完全地利益他人!这样,自利利他就不会矛盾,而是一致了。
頃刻경각이란 (44) | 2023.06.01 |
---|---|
충혼忠魂 (33) | 2023.05.31 |
수승화강(水升火降) (36) | 2023.05.27 |
적천리설(適千里說) (22) | 2023.05.26 |
고명(觚銘) (20) | 2023.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