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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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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에서 벗어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법적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적수(敵手)와 맞서 싸우는 방책(方策)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차별 공격하는 상대를 전승하는 전략(戰略)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위험에서 구출(救出)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역경(逆境)을 물리치는 지혜는 사물의 도리나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인간의 일반적인 지적 활동에서 지식(知識)은 인간적인 사상(思想)까지도 포함한 대상에 관한 지(知)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인간존재의 목적 그 자체에 관계되는 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와는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상 특히 인간적 사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참다운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지혜에 의하여 표시되는 구극(究極)의 목적에 대해서 수단으로서의 위치가 주어지지 않는 지식은 위험한 것입니다. 또 참된 지식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치사하고 비열한 인간들이 참 많습니다. 자기보다 힘없고 약한 사람을 왕따 주는 천추(千秋)에 용서 못할 만행에 대해 이제 더는 묵과(默過)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엄정한 법적 제재가 없다면 더욱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惹起)하게 됩니다. 

학급의 같은 또래에게서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한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대인관계를 기피(忌避)하는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직장 내 왕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폭력으로 시달리는 직장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은 회사 내 실적 효율성을 확연히 감소하게 합니다. 선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신입간호사들은 환자들을 돌보는 정상근무에 악영향을 초래합니다. 무례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육체적·정신적으로 피폐(疲弊)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악한들의 행동은 전염되기 쉽다고 합니다. 무뢰한들과 함께 일을 하게 되면 자신도 건달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사회를 살면서 고약한 상사, 야비한 동료들의 추악한 진상(眞相)들을 여러모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극악무도한 이런 악한들을 제압하는 방법이나 그들로 인한 모욕감으로부터 자존감을 회복하는 법적 조치가 미약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왕따 퇴치 기술 종합 매뉴얼’을 개발해서 위험에서 모면(謀免)하는 전술을 배워야 합니다. 즉 법적 힘을 빌려 자기와 사회를 해치는 유해한 자들을 강력히 제재(制裁)해야 합니다. 이러자면 악세력에 과감히 저항할 수 있는 법률지식을 알아둬야 합니다.

‘왕따’는 이제 새삼스러운 단어가 아닙니다. 사전에까지 올라 있으니 공식적인 말이 된 것입니다.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이른바 ‘집단 따돌림’ 현상이 너무나 심각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擡頭)되었기 때문입니다. ‘집단 따돌림’ 현상은 일본에서 인입된 잘못된 관행(慣行)입니다. 일본은 집단의식을 대대적으로 강조하는 사회입니다. 집단으로 모여 무슨 일을 도모해야 안심이 되고 직성이 풀리는 기질이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강박 관념(强迫觀念)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해당 집단에 반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집단이 나서서 대놓고 따돌리고 학대(虐待)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집단 따돌림’입니다.

‘집단 따돌림’가 1990년 후반 이후 먼저 한국의 학교에 들어와 확산되었습니다. ‘집단 따돌림’ 현상을 학생들은 재빠르게 ‘왕따’라는 은어를 만들어 표현했습니다. 이 말을 인천에 있는 모 여학교에서 최초로 만들어 썼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친구들끼리 대화하는 도중에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뒷북치는 어리벙벙한 친구의 애칭 정도로 썼다고 하나 확인(確認)할 길은 없습니다. 분명한 점은 ‘왕따’라는 말은 학생들이 만든 은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급속도로 퍼져서 은어 성격(隱語性格)에서 벗어나 유행어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일반 사회로까지 퍼져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먼저 ‘왕따’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말인가를 알아봅니다. 이 말은 ‘왕따돌림’이라는 말에서 ‘왕’과 ‘따’만 취한 어형(語形)입니다. ‘왕따돌림’에서 ‘왕’과 ‘따’만 취하여 한 단어를 만드는 것은 우리말의 조어법(造語法)상 부자연스럽습니다. 이러한 조어법은 은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따돌림’은 ‘왕’과 ‘따돌림’으로 분석(分析)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따돌림’에 접두사 ‘왕-’을 덧붙인 어형입니다. ‘왕-’은 ‘왕가뭄, 왕거미, 왕고집, 왕고참, 왕대포, 왕밤, 왕방울, 왕재수, 왕초보, 왕회장’ 등에서 보듯 접두사(接頭辭)로서의 결합력이 대단합니다. ‘왕따돌림’이라는 단어도 접두사 ‘왕-’의 강력한 조어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들 여러 예에서 보듯 접두사 ‘왕-’은 ‘매우 큰’, ‘최고’, ‘아주 심한’ 등의 의미를 보입니다. ‘왕따돌림’에 쓰인 ‘왕-’은 ‘왕가뭄, 왕고집’ 등의 ‘왕-’과 같이 ‘아주 심한’의 의미를 띱니다. 이에 따라 ‘왕따돌림’은 ‘아주 심한 따돌림’이라는 의미로 해석(解釋)됩니다. 아울러 ‘왕따돌림’에서 변형된 ‘왕따’도 본래 그와 같은 의미를 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왕따’는 ‘심한 따돌림’이 아니라 ‘집단 따돌림’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왕’이 ‘심한’이 아니라 ‘집단’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왕따’에 결부(結付)된 ‘집단’이라는 의미는 ‘집단 괴롭힘’을 뜻하는 ‘집단 따돌림’의 의미 간섭으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여러 학생들이 한 학생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그 현상을 일본어를 빌려 ‘이지메’라고 했는데, 이것이 일본어여서 거부감(拒否感)이 들자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왕따’라는 단어로 대체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지메’가 함축(含蓄)하는 ‘집단’이라는 의미가 ‘왕따’에 끼어들어 와 ‘집단 따돌림’이라는 의미로 굳어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왕따’가 ‘집단 따돌림’이라는 의미로 굳어지자 ‘왕따화, 왕따시키다, 왕따당하다’ 등과 같은 단어까지 만들어져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새말로 인정할 것인가는 더 두고 보아야 합니다. ‘왕따’ 자체도 우리말 조어법(措語法)을 어긴 비정상적인 단어인데, 이를 토대로 하여 이차적으로 만들어진 단어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심지어 ‘개따(개인적인 따돌림), 금따(금방 따돌림), 대따(대놓고 따돌림), 은따(은근히 따돌림), 전따(전체에게 따돌림), 집따(집단으로 따돌림)’ 등과 같은 ‘왕따’ 계열어(系列語)까지 등장하고 있어 ‘왕따’의 폐해는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언어생활에서도 자못 큽니다. ‘왕따’는 ‘집단 따돌림’이라는 현상적 의미로서 뿐만 아니라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대상적 의미로도 쓰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의미로 더 많이 쓰이는 경향(傾向)이 있습니다. “너도 왕따가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에 쓰인 ‘왕따’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왕따’는 우리말 조어법을 어긴 기형적(畸形的)인 단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은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통속적인 은어가 일상어 범주(範疇)로 들어와 쓰이게 되면 그만큼 우리의 언어생활은 저속(低俗)해지기 마련입니다. ‘왕따’를 대신하여 고유어 ‘가마리’를 쓰자는 주장이 나온 것도 언어생활의 저속화를 우려한 나머지 ‘왕따’라는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을 막아보자는 궁여지책(窮餘之策)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마리’가 ‘왕따’를 대신할 대체어(代替語)는 될 수 없습니다. ‘놀림가마리, 맷가마리, 욕가마리’ 등에서 보듯 ‘-가마리’는 일부 명사적인 어근에 붙어 ‘그 명사가 나타내는 성질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지시하는 접미사(接尾辭)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왕따’는 그것이 현상이면 ‘집단 따돌림’으로, 그것이 대상이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면 될 것입니다. 따돌림은 두 사람 이상이 집단을 이루어 특정인을 소외(疏外)시켜 반복적으로 인격적인 무시 또는 음해하는 언어적·신체적 일체의 행위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집단을 이루어 특정인을 소외시켜 반복적으로 인격적인 무시 또는 음해(陰害)하는 언어적·신체적 일체의 행위를 지칭합니다. 개인이 개인을 가해하는 행위와 집단이 개인을 가해하는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일본의 이지메는 가해자가 집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집단 따돌림의 특성은 첫째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비슷한 또래들로 구성(構成)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그 원인을 둔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가해자와 피해자의위치가 순환되면서 따돌림의 대상이 무차별화(無差別化)라는 점입니다. 집단 따돌림의 행위는 모함, 소외, 경멸, 폭력, 괴롭힘 등이 있습니다. 집단 따돌림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로는 가정 내 폭력, 등교거부, 자살, 정신장애(精神障礙), 비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집단 따돌림(bullying), 집단폭행 혹은 집단스토킹, 조직스토킹, 집단 괴롭힘은 집단에서 복수의 사람들이 한 명 또는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의도와 적극성을 가지고, 지속적이면서도 반복적으로 관계에서 소외시키거나 괴롭히는 현상을 말합니다. 따돌리는 일 혹은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왕따라고 합니다. 이를 줄여서 ‘따’라고도 합니다. 

한국 청소년 개발원에서는 학교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특정 학생을 대상으로 2주 이상의 기간에 걸쳐 심리적·언어적·신체적 폭력, 금품 갈취(金品喝取) 등을 행하는 것을 집단 따돌림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집단 따돌림은 소위 왕따라고 불리는 특정 학생이 주변의 힘센 다수의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상해를 당하는 병적 현상(病的現象)을 말합니다. 특정 집단 내에 존재하는 기준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하는 구성원을 벌주기 위한 의도적 행동, 특정인을 따돌리는 행동을 주도하는 구성원들의 압력에 동조(同調)하여 같이 괴롭히는 행동 등이 집단 따돌림의 행태입니다. 흔히 왕따, 줄여서 '따', '따를 당하다'라고도 불립니다. 학교 조직뿐 아니라 다른 사회 조직(社會組織)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왕따라는 단어는 1997년 탄생하여 언론에 소개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심리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심하면 육체적으로도 피해를 입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에 이르거나 묻지마 범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2003년의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10.7퍼센트, 중학생의 5.6퍼센트 그리고 고등학교의 3.3%의 학생들이 집단 따돌림을 경험(經驗)하였다고 합니다. 한국EAP(근로자 지원 프로그램)협회에 따르면 직장 왕따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꼽히는 개인의 정서·성격, 조직 내 갈등, 직무 스트레스 문제의 상담(相談)은 2011년 전체 상담 중 60.4%를 차지했습니다. 2012년 1월,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2975명을 설문한 결과 45%는 '직장에 왕따가 있다'라고 답했고 58.3%는 '왕따 문제로 퇴사한 직원이 있다'고 답해 직장 왕따가 학교폭력(學校暴力) 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초등학교시기에 교내 또는 또래 집단 내에 발생한 집단따돌림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집단 따돌림 피해를 경험한 청소년은 학교 적응을 어려워하고 낮은 자아 존중(自我尊重), 우울, 불안 및 외로움 등의 정서적 문제(情緖的問題)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학령기에 그치지 않고 성인기에까지 영향을 미쳐 우울, 불안, 사회적 위축(萎縮)과 같은 사회 심리적 부적응(不適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회사 외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90프로 속합니다. SNS나 여러 가지 이유 불문 정체(正體)도 모르는 사람이 간접적인 영향을 더 끼칠 경우도 있으며, 자살하게 만드는 경우도 대다수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 중에도 있습니다.

또한 부모 따돌림 증후군(Parental Alienation Syndrome, 父母-症候群)은 부모가 이혼하는 과정에서 자녀에 대한 양육권 분쟁(養育權紛爭)과 관련해서 보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부모가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의 결과로 이혼의 과정에 있다 하더라도 자녀에게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파괴적인 의사소통(意思疏通)을 하는 것은 자녀에게 복잡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느끼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혼위기에 있는 부부는 심화된 갈등(葛藤) 때문에 상대 배우자에 대한 문제나 약점, 혹은 분노를 여과 없이 자녀에게 노출하고, 이 과정에서 자녀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녀는 한쪽 부모에게는 반감(反感)을 갖게 되고, 다른 한쪽 부모는 불쌍히 여겨 한쪽 부모와 연합하여 반감을 느끼는 부모를 적대시하거나 반항적(反抗的)인 태도를 보이는 등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자녀의 이러한 변화는 실제 부모의 입장이나 상태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판단(判斷)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부부관계와 부모자녀관계 모두를 역기능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따라서 이혼과정이나 이혼 후, 혹은 부부갈등(夫婦葛藤)의 상황에서 부모는 상대 배우자에 대한 험담(險談)이나 욕설로 자녀가 상처받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일방적으로 주입(注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와르샤크(Warshak)는 자녀에게 부부관계의 갈등에 대해 말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지침(指針)을 확인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첫째, 이 정보를 자녀에게 밝히는 실제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숨겨진 악의는 없는지 점검(點檢)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 내가 비판하려는 전 배우자의 행동 때문에 자녀가 해를 입고 있는가? 전 배우자의 행동 때문에 자녀가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면 전 배우자의 대한 불만을 자녀와 공유(共有)할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 내가 하려는 말을 듣는 것이 자녀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녀가 다른 사고방식을 갖는 데 도움을 주고 건강한 대처방식(對處方式)을 찾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넷째, 자녀에게 사실을 밝혔을 때의 이익이 장차 초래(招來)될 수 있는 위험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배우자에 대한 비판을 자녀와 공유하고 싶다면 이익은 최대화하고 해는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選擇)해야 합니다. 다섯째, 어떤 것에 대해 자녀에게 이야기하고자 할 때 만약 배우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배우자와 자녀와의 관계를 지키고자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 봅니다. 즉, 부모에 대한 아이들의 일반적인 존경심을 훼손(毁損)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보았다면 이혼 후에도 이와 같은 사려 깊은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총에 맞은 상처는 치료할 수 있으나 구설수(口舌數)에 의한 상처는 끝끝내 치유되지 않는다’고. 사람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여러 가지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말(言)에 의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을 지배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던지는 무책임(無責任)한 말은 큰 악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한 점의 불꽃이 많은 목숨과 재산을 빼앗아 갑니다. 말도 불과 흡사합니다. 또한 말은 가끔 칼날이 되어 사람을 찌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은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오점을 남깁니다. 때로는 지옥의 불길과도 같은 인간 세상을 화염(火焰)으로 뒤덮어 버립니다. 

남이 악담을 한다고 해서 줏대 없이 그 사람과 동조(同調)해서 멋도 모르고 분개해선 안 됩니다. 또한 남이 아첨(阿諂)한대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교만(驕慢)해서도 안 됩니다. 남이 누구를 폄하할 때 그 이야기에 가담(加擔)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에는 ‘인간의 비행(非行)을 하나라도 알게 되면 자신의 몸에 바늘이 꽂힌 듯한 아픔처럼 느껴라. 그리고 인간의 착한 일을 들었을 때 그것을 꽃다발처럼 몸에 걸쳐라’는 성언(聖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논쟁(論爭)하는 곁에 있게 되더라도 그 무리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허튼 말 같이 생각되더라도 흥분하는 빛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격정이란 언제나 현명(賢明)한 행동이 아닙니다. 특히 정의에 대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격정과 충동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마음을 혼란(混亂)케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모든 지식을 통할(統轄)하고 있습니다. 숨 쉬는 것을 더 생동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구애(拘礙)받지 않는 뛰어난 의미로서의 감각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일정한 지식내용으로 고정되거나 전달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물을 식별하고 통합(統合)하는 마음의 작용과 지혜는 현실의 다양한 현상을 식별하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그것을 통합해서 이해하는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감각적 작용을 초월해서 전체를 파악(把握)하는 초월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위협을 느끼게 되면 최대한의 지혜를 동원(動員)하여 빈틈없이 대처해야 합니다. 혹시 자신 혼자서 당해낼 수 없는 악세력에 대해서는 법적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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