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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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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헤게모니에 점령된 한국, 볼리비아보다 못한 현실 살아간다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지음, 안태환 옮김) ⓒ갈무리
 
 
 
우석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프레시안 books]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
 

볼리비아에서 땡전 뉴스를 경험하다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은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가 2007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볼리비아에서 행한 여러 차례의 학술발표와 초청강연 등을 토대로 만든 책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저 지면으로 접했을 뿐인데도 행사들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점이었다. 가령, "그레고리아 아빠사" 여성 인권 증진 센터의 강연을 담은 4장 '사회운동을 위한 '대중대학'에 대한 토론'이 그렇다. 청중 중에는 운동가와 일반 시민이 있었는데, 이들은 포르투갈의 법사회학자로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인 소우자 산투스의 명성이나 학술적 권위에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들은 과감하게 질문을 던지고 고민을 토로하였다.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빈곤하고 무지하다는 조롱을 받던 볼리비아 같은 나라에서 소우자 산투스 같은 학자가 긴 일정을 소화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장삼이사들까지 국가의 운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치열하게 토론에 참가하는 풍경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 2003년 볼리비아 여행의 기억과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2003년 필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까지 육로로 여행했다. 국경을 넘기 전날 접한 볼리비아 뉴스는 걱정스러웠다. 시위대가 주요 도로를 차단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도로 인프라가 열악한 나라인지라 길에서 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 다행히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엘알토 시에서 수도 라파스로 진입하는 톨게이트를 목도하고 아연실색했다. 요금 징수 부스가 모두 박살나 직원들이 도로에 서서 통행료를 징수하고 있었다. 숙소를 정하고 뉴스를 틀어보고 나서야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통령궁 앞 광장의 도심 시위 때, 군이 주변 건물에 저격병들을 배치, 발포하여 30여 명이 사망한 것을 항의하는 시위였다. 

 

대명천지에 수도 한가운데에서 저격병들에 의한 학살극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너무 기가 막혀서 그날 계속 이 채널, 저 채널의 TV 뉴스를 챙겨보았다. 1980년대 우리나라의 땡전 뉴스가 절로 떠올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볼리비아 정계에서 당시 대통령보다 더 세다는 실력자의 발언으로 모든 뉴스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저격수 배치와 발포를 문제 삼지 않고 ‘강경’ 시위의 배후에 책임을 돌렸다. 비록 이름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지목한 배후인사는 노조 지도자였다가 대중의 지지를 업고 불과 8개월 전의 대선에서 급부상하면서 2위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바로 에보 모랄레스였다. 언론은 문제의 실력자 발언을 전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그를 좌파, 과격한 노조 지도자, 위험한 포퓰리스트, 무지한 선주민 등으로 몰아갔다.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에보 모랄레스가 그 학살극에서 사실상 국외자였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대통령 궁 시위를 에보 모랄레스가 주도했고, 이에 반응한 정부의 강경대응이 비극적인 학살극으로 치달은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학살극은 경찰과 정부, 경찰과 군 사이에 벌어진 충돌의 산물이었다. 세금 문제로 불만을 품은 경찰 일각에서 시위를 벌이자, 놀란 정부가 군을 동원하여 저격병 배치와 발포를 승인했다. 이에 경찰 일부도 무장투쟁으로 맞서면서 일이 커졌다. 에보 모랄레스가 한 일은 그저, 국가 기관들 사이의 무장충돌이라는 희대의 사건에 대한 정부 책임을 물으면서 대통령 사임을 요구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여권은 희대의 국정 혼란을 정적 제거의 기회로 이용해 언론의 땡전뉴스를 조장한 것이다.

 

남(南)의 인식론 

어째서 그들은 에보 모랄레스를 제거하려 했을까? 그의 출현과 존재감은 적어도 '잃어버린 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이해할 수 있다. '잃어버린 10년'은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회자된 표현이다. 원래 외채위기로 극심한 인플레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라틴아메리카의 1980년대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가 진보의 경제 '무능'을 꼬집는 프레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10년'은 사실 냉전, 발전주의, 군부독재, 석유위기, 미국의 정책 등의 산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남용된 표현인 셈이다. 냉전체제 하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고, 월트 휘트먼 로스토의 경제발전단계설이 설득력 있는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독재 정당화가 필요했던 라틴아메리카 군부정권들이 로스토의 '복음'에 고무되어 경제 발전을 위해 앞 다투어 외채를 구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군부정권들은 1970년대의 유가 급등으로 축적한 오일 머니 덕분에 순조롭게, 그러나 과도하게 외채를 조달했다. 그러나 디플레이션과 재정적자 타개를 위해 레이건 정부가 금리를 올리는 순간 외국인 투자자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라틴아메리카 경제가 난파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잃어버린 10년'의 가장 큰 책임은 군부정권과 이들이 신봉한 발전주의에 있다는 사실은, 그 시기에 각국의 군사독재가 속속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권력은 민선 정부로 넘어가지 않았다. '잃어버린 10년'의 여파가 너무도 커서 군부정권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혁명이나 급진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이들까지도 극단적인 이념 갈등의 또 다른 축으로, 그래서 라틴아메리카를 망친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는 그 이전까지 라틴아메리카를 설명해 온 상반된 두 패러다임이 일거에 폐기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군부정권들이 신봉한 발전주의와 이와 대립하는 시각으로 라틴아메리카 역사와 현실을 재단했던 종속이론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라틴아메리카를 황폐화한 것이다. 각국에 속속 들어선 민선정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권력 공백을 이용해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신자유주의였다. 대륙 전체가 신자유주의 실험장이 되었고, 시장이 국가 대신 권력을 장악했다. 

 

원래도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볼리비아는 이 국면에서 더 고통이 클 수밖에 없었다. '대안은 없다'를 천연덕스럽게 내세운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국가는 때로는 실종되고 때로는 야합했다. 가령, 1999년 코차밤바 시의 수도 민영화 조치로 요금이 단번에 200% 폭등했다. 빗물을 받아쓰거나 우물을 파는 데에도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 자본은 탐욕스러운 민낯을 보였다. '대안은 없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의 결과는 소우자 산투스도 지적하듯이 "폐허"(p. 7)였다. 

 

여기서 반전이 이루어졌다. 저항이 있었다. 소위 코차밤바 물 전쟁으로 비화한 저항의 결과 벡텔사(社)가 주축이 된 해외자본이 2006년에 두 손 들고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이 각성했다. 그들은 승리의 경험으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열망이 응집해 2006년 에보 모랄레스 정권을 낳았다. 소우자 산투스는 볼리비아의 이 과정이 '대안은 없다'를 부르짖으며 "역사주의와 미래주의를 동시에 근본적으로" 거부한 "현재주의"(presentism)에 대한 대단히 의미 있는 반격이라고 보았다(p. 6). 

 

소우자 산투스는 '남(南)의 인식론'이라 불리는 이론의 정립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그리고 볼리비아 사례는 그의 이론의 주요 토대의 하나였다. 사실 볼리비아를 주목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낯선 현상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은 지식의 장에서는 공허한 주장이었다. 서구 지식의 헤게모니 하에서 라틴아메리카 지식은 늘 주변부 지식에 불과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약소국인 볼리비아 지식은 더 소외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소우자 산투스가 주목한 볼리비아 지식은 보통은 정치적 주장이나 소외된 민중의 목소리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통상적으로는 지식의 장에서 논의될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소우자 산투스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북(北) 혹은 서구에서 생산된 지식은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이 국면에서처럼 "해방에 대한 정치이론 및 비판이론과 해방의 실천 사이에 커다란 괴리와 모순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p. 22)라고 단언할 정도이다. 그 이유는 북(北) 혹은 서구의 이론이 "새로운 행위자, 새로운 주체,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투쟁, 새로운 행동양식들"(p. 23)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사회변혁의 실천, 즉 사회 변화를 위한 지식의 이론적 실천이 불가능해졌다고 주장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서구 지식은 이제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공허한 것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소우자 산투스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남으로부터 배우는 ... 남의 인식론"(p. 23)을 오히려 서구에 권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라틴아메리카만큼 이론(혹은 지식)과 실천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한 지역은 없었다. 사파티스타 봉기(멕시코, 1994), 우고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천명(베네수엘라), 세계사회포럼 결성(브라질, 2001) 등이 그 사례이다. 비록 볼리비아가 전통적으로 이들 국가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지만, 소우자 산투스 입장에서 볼 때, 코차밤바 물 투쟁(1999-2000), 에보 모랄레스 집권(2006), 제헌의회 활동(2006-2007), 신헌법 발효(2009)로 이어지는 부단한 사회변혁 과정은 이론(혹은 지식)과 실천의 결합이 일구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제헌의회와 사회과학의 전환 

소우자 산투스가 볼리비아를 방문한 이유는 특히 제헌의회 실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우선 '제헌의회'라는 용어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독립한 지 거의 200년이 된 나라가 제헌의회를 만들다니 그동안 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제헌의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독립 이래의 헌법이 전혀 볼리비아 현실에 부합하지 않았다는 인식의 소산이었고, 이를 바로 잡을 원칙들을 국가의 근간인 헌법에서 적시하는 것이 사회변혁 및 이를 담보할 국가의 재발명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기존 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용어를 사용하다보니 반대자들의 공격이나 오해의 빌미가 되었다. 미국은 아예 에보 모랄레스를 '불량 좌파'라고 낙인찍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논조는 공격적이지는 않았지만, '선주민 볼리비아가 라틴 좌파에 합류하다'라는 기사를 통해 에보 모랄레스의 집권을 다수 선주민(볼리비아의 선주민 인구 비율은 오늘날에도 40퍼센트에 육박한다)들이 좌파 이념의 영향을 받아 달성한 사회주의 국가의 출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탈식민주의 주요 이론가의 한 사람인 월터 미뇰로는 에보 모랄레스의 집권은 좌파로의 전환이 아니라 탈식민적 전환이라는 반론을 펼친 바 있다. 소우자 산투스도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탈식민적인 것'이란 식민주의가 독립과 함께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p. 33)고 그는 말한다. 그의 이런 인식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뿌리를 둔 차별적 사회구조가 재생산되어 온 것이 볼리비아의 지난 역사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우자 산투스는 볼리비아 강연들을 통해 내내 탈식민성이라는 원칙을 신헌법에 담을 것을 주문한다.

 

탈식민성과 더불어 소우자 산투스가 강조한 것이 또 있다. 상호문화성이다. 이는 36개 민족과 종족으로 이루어진 볼리비아 현실 때문이다. 이때의 상호문화성은 "단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특성"(p. 246)의 천명이기도 하다. 현실에 맞지 않게 동질적인 하나의 국가를 지향할 것이 아니라, 36개 민족과 종족이 대등하게 공존하면서도 공통의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통합의 정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헌법에 담긴 복수국민국가가 바로 이 상호문화성의 필요성을 반영한 국체(國體)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볼리비아 제헌의회 실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와는 너무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한 국가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 먼저 상호문화성과 탈식민성의 강조가 근대를 향한 비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는 하나의 국민이 하나의 국가를 이룩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정치 이론의 시대였기 때문에 상호문화성에 입각한 복수국민국가라는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는 없었다. 또 근대가 내세운 해방의 약속들은 근대성이 성숙하면 자연스럽게 실현되리라는 낙관주의의 시대였기 때문에, 식민주의나 식민성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근대의 약속 자체가 애당초 전 세계에 적용할 만한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볼리비아 사례를 통해, 또 소우자 산투스를 통해 얻어야 할 시사점이 바로 이 점이다. 가령, 이 책의 3장인 '오늘날 사회과학의 도전'에서 소우자 산투스는 자신이 속한 학문 분야를 두고 통렬히 자아비판 한다.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이론, 개념, 범주들이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중반 사이에 약 4, 5개 나라(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이탈리아 등)에 기원을 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단일 문화적이고 서양 문화적인 학문이 되었고, 식민주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학문이 되었다(pp. 166-167). 

 

우리나라의 사회과학은 다를까? 아니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학문 전반에 걸쳐 동일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 박사가 아니면 교수로 임용되기도 힘든 분야가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소위 서구 지식 헤게모니에 따른 지식의 식민성 여부를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할 상황이다. 어쩌면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못하다는 볼리비아보다 못한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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