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한 페이지씩 넘어갑니다. 이즈음부터는 곤충들의 향기로운 밥상이 거두어지고 새들의 소담스러운 밥상이 차려집니다. 꽃 진 자리마다 열매가 마련되면서 곤충들의 활동은 줄어들고 새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때인 것입니다.
고목 위의 곤줄박이
새는 식물의 씨를 옮겨주는 유효한 전파자입니다. 특히 나무는 새에게 열매를 제공하는 전략을 많이 쓰므로 목본의 분포 변화에 새는 적잖은 영향을 끼칩니다. 새를 이용하는 방법을 포함해 식물이 씨를 전파하는 전략을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의 힘으로 튕겨 보내는 전략
(2) 바람이나 물 같은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전략
(3) 개미의 입맛을 이용하는 전략
(4) 동물의 몸에 무임 승차해서 이동하는 전략
(5) 동물의 먹이가 되어 배설물로 뿌려지는 전략
자력으로 튕겨 보내는 1번 전략은 다시 세 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①콩과 식물처럼 꼬투리가 비틀려 터지는 힘으로 씨를 날리는 방법 ②히어리, 풍년화, 상산처럼 열매 속에 든 발사 장치를 이용해 새총 쏘듯 씨를 날리는 방법 ③봉선화 종류, 괭이밥 종류, 눈괴불주머니처럼 건드리면 껍질이 폭발하듯 씨를 튕기는 방법이 그것입니다. 이 중 ③번 방법은 ①번 방법과 비슷하지만, 외부에서 약간의 힘이 작용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꼬투리가 비틀려 벌어진 살갈퀴의 열매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2번 전략은 대개의 국화과 식물이나 단풍나무과 목본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국화과 식물 중 민들레처럼 씨에 갓털이 붙어 달리는 종들은 바람에 씨를 훨훨 날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합니다. 사위질빵이나 할미밀망처럼 미나리아재비과의 몇몇 식물도 털 달린 씨를 날립니다. 박주가리과 식물이나 협죽도과의 식물 역시 긴 털이 달린 씨를 만들어 어미한테서 멀리멀리 떠나가게 합니다. 단풍나무과의 목본은 날개가 달린 시과(翅果)라는 열매를 맺는데, 프로펠러처럼 빙빙 돌면서 날아가는 열매입니다.
갓털이 달린 민들레의 씨
박주가리의 벌어진 열매
프로펠러 모양의 단풍나무 열매
물의 힘을 이용하는 건 대개 수생식물이 취하는 전략입니다. 그런데 부들 같은 경우는 수생식물이지만 고속도로휴게소에서 파는 옛날 핫도그처럼 생긴 열매를 만들어놓고 털 달린 작은 씨를 바람에 우수수 날려 보냅니다. 물론 물 위에 떨어진 것은 물길을 타고 흘러갈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단풍나무처럼 날개 달린 열매를 맺는 중국굴피나무는 하천 주변에 살면서 많은 씨를 물길에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하천 주변에 중국굴피나무가 들어와 번지기 시작하면 막기가 어렵습니다. 이들은 바람과 물을 모두 이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들의 부푼 열매도 바람에 씨를 날린다
중국굴피나무의 날개 달린 열매
개미의 입맛을 이용하는 3번 전략의 대표적인 예는 깽깽이풀입니다. 이 전략을 성공시키려면 얼라이오좀이라는 유인용 물질이 필요합니다. 얼라이오좀은 당분체, 방향체 또는 유체(油體)라고도 하는 맛난 물질로 씨에 붙여두면 개미가 통째로 집어 들고 자신의 굴로 가져갑니다. 지인의 실험에 따르면 얼라이오좀을 떼고 놓아두었더니 씨는 가져가지 않고 얼라이오좀만 가져가더랍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씨에서 얼라이오좀만 떼어가지 왜 무겁게 씨까지 다 가져가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아마도 씨 부분을 손잡이로 삼아 얼라이오좀을 안전하게 가져가려고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깽깽이풀 외에 산괴불주머니, 금낭화, 현호색 종류, 제비꽃 종류 등 의외로 많은 식물이 얼라이오좀을 이용해 개미를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전략을 씁니다.
깽깽이풀의 씨에 달린 하얀 얼라이오좀
동물의 몸에 무임 승차하는 4번 전략의 예로는 도둑놈의갈고리, 참반디, 도깨비바늘, 가막사리, 짚신나물, 파리풀, 담배풀, 진득찰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씨는 사람을 비롯한 동물의 몸에 잘 달라붙는 조직으로 되어 있어 일단 붙기만 하면 동물의 이동 경로를 따라 멀리 퍼져나갑니다. 잘 달라붙기 위해 갈고리 달린 가시를 만들기도 하고 진득찰이나 털진득찰처럼 끈적끈적한 물질을 분비하기도 합니다.
도깨비바늘의 열매
끈적끈적한 물질이 분비되는 털진득찰의 꽃
동물의 먹이가 되는 5번 전략은 새들한테 먹히는 방법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식물은 대개 열매를 붉은색으로 익힙니다. 백당나무, 가막살나무, 낙상홍, 괴불나무, 까마귀밥나무, 산수유 등이 그렇습니다. 새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붉은색은 열매가 알맞게 익었음을 알려주는 시각적 신호입니다.
붉게 익은 괴불나무의 열매
겨우살이는 열매가 붉은색은 아니지만 연한 노란색으로 익어 햇빛에 빛납니다. 그 열매를 따 먹은 새들은 다른 나뭇가지로 날아가 배설합니다. 새의 위장을 통과해 나온 겨우살이의 씨는 발아가 잘 된다고 합니다. 어디까지가 계산된 전략이고 어디까지가 우연한 결과인 건지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겨우살이는 빛나는 노란색 열매를 맺는다.
그밖에 검은색이나 보라색으로 익는 열매도 있습니다. 이런 열매는 대개 붉은색 열매가 다 먹힐 즈음에 뒤늦게 익어 먹이가 부족해지는 시기에 자신을 선택하게 하는 전략을 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람쥐나 청설모를 이용하는 전략도 있습니다. 잣나무나 참나무 종류가 대표적입니다. 이 경우에도 열매를 붉은색으로 익힐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를 숨겨놓는 습성을 가진 다람쥐나 청설모가 자신이 숨긴 장소를 까먹으면 그 자리에서 싹이 돋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청설모가 먹이를 숨기는 모습을 얼마 전에 실제로 보았습니다. 마치 축구공을 드리블하듯 잣송이를 이리저리 굴리고 다니며 잣을 빼내 이곳저곳에 숨겨놓는 모습이었습니다. 숨기는 데 정신이 팔렸을 때 잣송이를 살짝 빼앗아보았습니다. 도로 가져가려 하는 것을 막아서자 나무 위로 잽싸게 올라가 내려다보면서 "꾸루꾸룩! 꾸루꾸룩!" 하는데 어쩐지 욕처럼 들렸습니다.
잣송이를 물고 다니며 잣을 숨기는 청설모
이러저러한 전략으로 식물은 국경과 상관없이 여러 지역을 넘나듭니다. 아무도 없는 새 땅에 발 딛기도 하지만, 기존에 자리해 있던 식물과 경쟁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승자는 생존하고 패자는 소멸할 것이기에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고, 살아남은 자는 다시금 새로운 종에게 도전받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적응력을 시험받으며 강한 자로 남은 인간도 먼 미래에는 화석으로 남을지 모를 일입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동혁 칼럼니스트는 식물분야 재야 최고수로 꼽힌다. 국립수목원에서 현장전문가로 일한다. ‘혁이삼촌’이라는 필명을 쓴다. 글에 쓴 사진도 그가 직접 찍었다. ● IT조선 2020.11.14 이동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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