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丁奉, ? ~ 271년)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將帥)이며 자는 승연(承淵)이다. 양주 여강군(廬江郡) 안풍현(安豊縣) 사람이다.
생애
젊어서부터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나 자세한 활약(活躍)은 전하지 않는다. 손량(孫亮)이 즉위한 후 관동장군(冠東將軍)이 되었다.
정봉(丁奉)의 자는 승연(承淵)이고 여강(廬江)군 안풍(安豊)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용감하여 소장(小將)이 되어 감녕(甘寧), 육손(陸遜), 반장(潘璋) 등에게 속했다. 수차례 정벌에 따라가 싸움마다 항상 군대의 으뜸이 되었다. 매번 적 장수를 베고 적의 깃발을 뽑았고 자신도 상처(傷處)를 입었다. 점차 승진하여 편장군(偏將軍)이 되었다.
234년 제갈량(諸葛亮)이 마지막 북벌을 위해 출정(出征)하고 이에 오나라 또한 호응하여 동으로는 육손(陸遜)이, 서로는 주연(朱然)과 전종(全琮)이 지휘하여 북진하자 문빙(文聘)은 군사를 이끌고 요격(邀擊)하여 형주로 진격해온 전종을 패주시키나 곧이어 달려온 주연으로 인해 숫적 열세로 격파(擊破)하지는 못하고 수비 일관세로 돌아선다.
뒤이어 유소(劉劭)가 강하로 구원을 오고 전예(田豫)가 양양을 구원하러 오고 문빙의 역공을 받고 여거(呂據)가 격파되고 정봉(丁封)은 패하였으나 정봉(丁奉)은 매복을 하여 문빙을 크게 물리친다. 이 전투에서 정봉(丁奉)은 비수를 던져 문빙에게 부상을 입혔다. 문빙은 몇년 후 이 상처가 도져 병사(病死)했다.
젊어서부터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나 자세한 활약은 전하지 않는다. 손량(孫亮)이 즉위한 후 관동장군(冠東將軍)이 되었다.
252년 12월 위나라에서 대군을 일으켜 동흥(東興)을 공격해 오자 제갈각(諸葛恪)을 따라 참전(參戰)하여 위군 진영을 기습하러 나섰다. 위군은 잔치를 벌이면서 방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급습(急襲)에 성공하여 한종(韓綜)이 이끄는 선봉부대를 무찌르고 한종을 베는 공을 세웠다. 이 패배(敗北)로 기가 꺾인 위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後退)했다.
255년 관구검(毌丘儉)의 반란에 가담했던 문흠(文欽)이 위군에게 패하여 오나라로 쫓겨 오자 정봉(丁奉)을 호위(虎威)장군으로 삼고 손준(孫峻)을 따라 수춘(壽春)에 가 맞이하고 적의 추격군과 고정(高亭)에서 싸웠다. 정봉이 말을 타고 긴 창(矛)을 들고 적의 진중에 돌입(突入)하여 수백 명의 머리를 베고 군기(軍器)를 노획했다. 안풍후(安豊侯)에 봉해졌다. 257년 제갈탄(諸葛誕)이 수춘에서 반기를 들었을 때도 참전(參戰)하여 공을 세웠다.
오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손침(孫綝)은 총명한 자질을 지니고 있던 손량(孫亮)이 장성하면서 국사에 의욕(意欲)을 보이자 훗날을 두려워하여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손량 역시 손침을 눈엣가시로 보았기에 제거(除去)하려 했으나 계획이 새어나가 도리어 폐위당하고 회계왕(會稽王)으로 강등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추대된 손휴(孫休) 역시 손침을 제거하려 했는데 손휴와 함께 거사(巨事)를 모의하던 장포(張布)가 정봉을 추천하여 손침 제거에 가담하게 되었다. 손침이 제거된 후 대장군으로 승진(昇進)하였다.
263년 위군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촉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정봉(丁奉)은 명을 받고 촉한을 구원하기 위해 수춘부터 성도(成都)에 이르기까지 공격을 시작했으나 정봉의 부대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촉나라가 멸망(滅亡)한 후였기 때문에 정봉은 회군했다. 268년 11월에는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諸葛靚)과 함께 합비를 공격했으나 진나라의 여음왕(汝陰王) 사마준(司馬駿)에게 격파당했다. 269년에는 곡양(穀陽)을 270년 1월에는 와구(渦口)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정봉은 말년에 교만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정봉을 못마땅하게 본 손호(孫皓)는 그의 가족들을 임천(臨川)으로 이주시켰다. 271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관직은 대장군 서주목(徐州牧)이었다. 서전에서 위의 명장 장료를 물리쳤으며 눈(雪)중의 제갈탄(諸葛誕) 군사를 동흥에서 대파시켜 위(魏)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장포(張布)와 같이 행패를 부리는 대장군 손침(孫綝)을 제거하였고 대장군이 되었다. 오의 멸망전 촉으로 원군을 몰고 갔으나 때를 맞추지 못하였다.
손권 막하의 용장이며 여강 안풍(廬江安豊) 사람으로 자는 승연(承淵). 제갈양이 남병산(南屛山)에서 동남풍을 빌고 떠나는 실을 서성(徐盛)과 함쎄 추격한 때문에 적벽가(赤壁歌) 가운데 불러져 있어 우리 귀에도 익은 이름이다.
계략이 있어 능히 대사를 처단하고 전투에 가장 용감하여 사마사(司馬師)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불과 3쳔 명의 군대로 선봉 호준(胡遵)의 진을 습격하여 환가(桓嘉)·한종(韓綜)의 두 장수를 베고 무인지경(無人之境)같이 휩쓸었다.
뒤에 다시 동흥(東興)에서 제갈탄(諸葛誕)의 근대를 눈 가운데서 파해 위(魏)나라 사람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장포(張苞)와 함께 계략을 꾸며 손침(孫綝)을 죽이고 대장군이 되어 서주목(徐州牧)을 겸했는데 귀현해지자 교만한 태도가 드러나 손호(孫皓) 때 헐뜯는 이가 있어 임천으로 옮겨 가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용맹했으므로 젊은 시절부터 소부대를 맡는다. 감녕, 육손, 반장 등의 지휘 하에 들어가 종종 군공을 세워 편장군으로 된다. 손량이 즉위하자 관군장군(冠軍將軍)에 임명되고 위의 제갈탄(諸葛誕)과 호준 등이 오를 침공해오자 눈이 깊게 쌓이고 적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하여 대승하였다. 이 공로로 멸구장군(滅寇將軍)으로 승진한다.
257년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이 수춘성을 포위하자 돌격대장(突擊隊長)으로 군공을 세워 좌장군에 임명된다. 손휴가 즉위하자 손휴(孫休)는 권세를 휘두르는 손침을 주살하려고 계획한다. 장포 등과 모의해 손침을 참살(斬殺)한다. 263년 촉에 침공(侵攻)한 위를 수춘성에서 견제했으나 촉이 멸망했으므로 퇴각(退却)한다. 손휴가 죽은 후에는 복양흥 등과 짜고 손호를 즉위시킨다.
정봉(丁奉)은 지위가 올라감과 동시에 교만(驕慢)하게 되어 이 점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손호(孫皓)는 그가 죽은 후 옛날 죄를 추궁(追窮)해 유족을 임천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정봉
연의에서는 손권(孫權)이 손책(孫策)의 뒤를 이은 후 인재를 모을 때 등용(登用)된 것으로 나온다. 이후 적벽 대전(赤壁大戰), 합비 공격, 이릉 전투 등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조비(曹丕)가 공격해왔을 때 장료(張遼)를 화살로 쏴서 죽였다. 그 외에 동남풍을 부르던 제갈량(諸葛亮)이나 강동에서 형주로 빠져나가던 유비(劉備)를 뒤쫓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장료(張遼)는 정봉에게 사살된 것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으며 정봉(丁奉)이 촉한의 마지막 순간에 촉한을 도와주러 왔다가 촉한이 멸망(滅亡)해서 회군한 것을 나관중(羅貫中)이 높게 평가했으므로 나관중은 그 보상(報償)으로 삼국지연의에서 정봉이 장료를 사살한 것으로 묘사해줬다.
공명가(孔明歌)
내용은 “삼국지” 중 촉한(蜀漢)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원군을 얻기 위하여 오나라의 남병산(南屛山)에 제단을 쌓고 동남풍(東南風)이 불기를 기도하는 장면으로부터 공명을 잡으려고 추적하던 오나라의 서성(徐盛)과 정봉(丁奉)의 군대를 격퇴하고 조자룡(趙子龍)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목까지를 노래한 것이다. 가사는 “공명이 갈건야복(葛巾野服)으로 남병산 올라 단(壇) 높이 모으고 동남풍 빌제, 동에는 청룡기(靑龍旗)요, 북에는 현무기(玄武旗)요, 남에는 주작기(朱雀旗)요, 서에는 백기(白旗)로다.”로 시작된다. 장단은 3박을 기본으로 하여 노랫말의 길이에 따라 4박·5박·6박 등으로 변하여 불규칙(不規則)하다. 형식은 산문체의 노랫말이기 때문에 통절식(通節式)으로 되어 있고, 선율은 서도소리의 음계인 ‘수심가토리’로 되어 있는데, ‘레·미·솔·라·도’로 구성되어 있다. ‘초한가(楚漢歌)’와 함께 서사적인 서도창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정봉(丁奉)은 신분이 높고 공이 있어 점점 교만하고 자부(自負)하여 혹 비방(誹謗)하는 자가 있어서 손호는 전에 출병해 얻은 바가 없었던 일을 추궁(追窮)하여 정봉의 가족을 임천(臨川)으로 귀양 보냈다. 손호전 봉황 원년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江表傳)에 상호 보인다. 임천은 손량전 태평 2년에 보인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만욱, 유평(留平)과 정봉(丁奉)이 같이 모의했으나 정봉이 먼저 죽었기에 손호의 독주는 오직 정봉에게 먹이지 못했다. 그러나 정봉의 가족이 귀양감은 응당 이 때문으로 어떤 이의 비방(誹謗)은 아마도 그들의 밀담(密談)을 고한 것이다. 송서 오행지(五行志)에서 또한 그 일을 실으며 손호가 곡양을 토벌하던 일을 추궁(追窮)해 그의 자식 정온을 죽이고 가속은 모두 멀리 귀양 보냈다고 말했다. 이 전에서 자식 정온을 죽인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진씨(陳氏)가 빠뜨린 것이다. 또한 정봉과 육개, 정고(丁固)가 손호를 폐위(廢位)시키는 것을 도모함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기사가 개전(凱傳)에 보인다. 정봉(丁奉)의 동생은 정봉(丁封)으로 관직은 후장군後將軍에 이르렀고, 정봉보다 먼저 죽었다.
항세준(杭世駿)이 이르길 : 송서 왕승작전(王僧綽傳) : 애초에 태사(太社) 서쪽 공터 한 구역은 오 때 정봉(丁奉)의 집이었으나 손호가 그의 가족을 귀양 보냈다. 강좌(江左) 초, 주의(周顗), 소준(蘇峻)의 집이 됐었고 그 후 원열(袁悅)의 집이 됐었고 다시 장무왕(章武王) 사마수(司馬秀)의 집이 됐었으나 모두 흉종(凶終)하였다. 후에 장도(臧焘)에게 줬는데 또한 자못 재난을 만났기에 흉지(凶地)라고 칭했다. 왕승작(王僧綽)이 일찍이 정직하고 원대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땅에는 길흉(吉凶)이란 게 없다고 여겨 집으로 삼길 청했다. 비로소 지으나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피살(被殺)되는 화를 입었다.
평하길 : 무릇 이러한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강표(江表)의 용맹한 신하로 손씨가 후하게 대접하였다. 반장은 수양하지 않았으나 손권은 과실(過失)을 잊고 공을 기억할 수 있었으니 그가 동남쪽에서 보위하며 웅거(雄據)할 수 있었던 것도 마땅하도다. 진표(陳表)는 장수의 집안의 서자이나 주자(胄子)의 명인들과 날개를 나란히 하고 날며 가지런해 같은 무리에서 뛰어남이 두드러졌으니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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