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진(樂進, ? ~ 218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武將)으로 자(字)는 문겸(文謙)이며, 양평(陽平) 위국(衛國) 사람이다.
생애
조조(曺操)를 섬겼다. 담력(膽力)으로써 조조를 따라 장하리(帳下吏)가 되었다. 출신 군으로 보내져 천여 명을 모병(募兵)하여 돌아온 후 군가사마, 함진도위가 되었다. 조조가 여포(呂布), 장초(張超), 교유(橋蕤), 장수, 수고(眭固), 유비(劉備)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尉)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여포(呂布), 장초(張超), 교유(橋蕤), 장수, 휴고(眭固), 유비(劉備)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尉)에 임명되었다. 획가(獲嘉)를 공격했으며 돌아와 조조를 수행해 관도(官渡)에서 원소를 쳤을 때 순우경(淳于瓊)을 참했다. 또한 원담, 원상을 여양(黎陽)에서 공격할 때 그 대장인 엄경(嚴敬)을 참했고, 행(行, 대리의 의미)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고 206년(건안 11년)에는 절충(折衝)장군에 임명되었다.
고간(高幹), 관승(管承)을 토벌한 뒤 양적(陽翟)에 주둔했으며 형주를 점령한 후 양양(襄陽)에 주둔했다. 212년,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으며, 임저장(臨沮長) 두보(杜普), 정양장(旌陽長) 양대(梁大)를 모두 격파(擊破)했다. 그 뒤 합비에서 손권을 정벌했고 가절(假節)이 수여되었다. 이때 악진은 손권을 구출하려는 능통과 겨뤄 능통(淩統)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감녕의 공격을 받고 퇴각했다. 그 후 악진은 우장군(右將軍)으로 관위가 올랐다.
200년 관도전투(官渡戰鬪)에서는 우금과 함께 황하(黃河)를 건너 획가(獲嘉)에 있는 원소진영을 공격했으며 돌아와 조조를 수행해 오소를 수비하던 순우경(淳于瓊)을 참했다. 원담, 원상을 여양(黎陽)에서 공격할 때 그 대장인 엄경(嚴敬)을 참했고, 행(行, 대리의 의미)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고 또한 장료와 함께 음안(陰安)을 낙성시켜 주민을 하남(河南)으로 이동시켰다. 그 후는 업성(鄴城) 포위전에 참가하였고 업성이 함락되자 남피의 원담(袁譚)을 공격하여 동문으로 제일 먼저 도착하여 돌입하였고 원담의 패배 후에는 별동대를 인솔하여 옹노(雍奴)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206년(건안 11년)에는 절충(折衝)장군에 임명되었다.
위(魏)의 장군(將軍). 일찌기 조조(曹操)를 따라다니며 싸움터에서 공이 컸다. 절충장군을 배수 받았으며 시호는 위후다. 장료(張遼), 우금(于禁), 서황(徐晃), 장합(張郃)과 함께 위의 명장으로 찬사(讚辭)를 받았고 오대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온갖 고초(苦楚)를 겪고 성공한 인물이다.
악진(樂進)은 조조 수하의 장수이며 양평 위국(楊平衛國) 사람으로 자는 문겸(文謙)이다. 처음 그가 진류(진류)에서 의거(義擧)하였을 때 맨 먼저 참여하였다. 적벽대전후 동오(東吳)와 대결하게 되자 대장으로 출전(出戰)하여 단기로 손권에게 달려들어 송겸(孫權) 가화(賈華)가 가로 막는 창을 단칼에 베어 떨구고 덤벼 용명(勇名)을 떨쳤다. 몸집은 작었으나 담력이 있어 그후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늙어서 죽었다.
처음에는 조조(曹操)의 장하의 관리(記錄計)였는데 체구는 작아도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복양의 여포, 옹구의 장초, 고(苦)의 교유와의 전투에서는 선두에서 전공을 세워 광창정후广昌亭侯로 발탁된다. 그후로도 안중의 강수, 사견의 휴고, 패의 유비(劉備)를 모두 격파하였다. 관도 전투(官渡戰鬪)에서는 원소의 부하 순우경을 쳐부수고, 여양의 원담, 원상과의 전투에서는 대장 엄경(嚴敬)을 토벌하는 등 맹활약해 행유격장군으로 승진(昇進)한다.
이후 고간 정벌, 형주 공략에도 참가해 양양에 주둔(駐屯)한다. 관우, 소비 등을 격파해 패주(敗走)시켰기 때문에 남군의 산간에 있었던 만민(蠻民)들도 악진 밑으로 귀순한다. 또한 유비의 부하이자 임저의 우두머리인 두보, 정양의 수령 양대까지 완전히 격멸(擊滅)한다. 이윽고 장료, 이전과 함께 합비에 주둔했을 때, 절(節)을 받고 손권과의 전투에서도 활약(活躍)한다. 영읍은 1,200호가 되고, 너무 많은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5백 호를 한 단위로 분할(分轄)해 제후를 세우고 자신은 우장군으로 승진(昇進)할 정도였다. 218년에 사망하고 위후라는 시호(諡號)를 받는다.
건안11년 206년 조조(曹操)가 헌제에게 표를 올려 악진과, 우금, 장료를 칭찬(稱讚)하고 말하길 “악진, 우금, 장료 이들은 무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계략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품성(品性)에 있어서는 충성심이 한결같아 절의(節義)를 지킵니다.”
“악진(樂進)은 선봉대장으로써 활약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나아가 싸워 적장을 베는 장수(將帥)이고 우금은 지모를 겸비(兼備)해 군을 잘 통솔하고 신속하게 적을 무찌르는 장수이고 장료는 문무(文武)를 겸비해 나아가서 싸우면 이기는 장수입니다”
“이 세 명은 지휘관(指揮官)으로 군사들을 이끌어 강고한 적을 돌파하고 어떤 견고한 적이라도 함락(陷落)시키지 못하는 법이 없고 지칠 줄 몰랐습니다.”
“병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화합(和合)하고 영을 받드는데 있어 이를 거스른 일이 없었으며 적을 대적할 때는 과당성(過當性)이 있게 행동하고 어떠한 실수도 없었습니다. 이들을 각각 현총으로 임명하셔야합니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우금을 호위장군, 악진을 절충 장군, 장료를 탕군장군으로 임명했다.
오환정벌(烏桓征伐) 중에 반역한 고간(高幹)을 별동대를 이끌고 우회해서 배후에서 공략 격퇴(擊退)시켰고 호관으로 물러나 견수(堅守)하던 고간을 조조가 직접 공격하여 함락(陷落)시켰다. 이전과 함께 청주 북해의 해적 관승(管承)을 토벌한 뒤 양책(陽翟)에 주둔하여 형주에 대비했으며 형주를 점령한 후 양양(襄陽)에 주둔했다.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출전했을 때 조조는 손유동맹군에게 패하고 후퇴하고 있었는데 이를 관우(關羽)가 추격하자 악진은 혼자 뛰어들어 관우를 쓰러뜨렸다. 관우는 홀로 나온 악진(樂進)에게 패하고 후퇴했다. 212년,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으며 임저장(臨沮長) 두보(杜普), 정양장(旌陽長) 양대(梁大)를 모두 격파했다. 그 뒤 청니에 주둔했는데 관우가 군을 이끌고 공격했지만 또다시 악진에게 대패(大敗)하여 후퇴하였고 이때 관우는 팔에 화살을 맞았다. 그 뒤 합비에서 손권을 정벌했고 가절(假節)이 수여되었다. 218년(건안 23년)에 죽었으며 시호를 위후(威侯)라 했다.
평가
악진은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수들 못지않은 용맹(勇猛)을 과시하여 서황, 장합, 우금(于禁), 장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장(名將)으로 인정받았다. 진수(陳壽)가 서술한 ”삼국지“에서는 이 다섯 사람을 묶어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으로 분류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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