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실제 역사서(歷史書)와 비교해 봤을 때 촉한(蜀漢)의 인물들에게 많은 비중을 할애(割愛)하고 있으며 이들의 행동을 미화(美化)하거나 업적을 날조(捏造) 부풀리는 대목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교의 기준을 정사에 맞춘다면 연의는 다분히 촉빠적인 성향(性向)을 띠고 있으며 이 사실은 반박(反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을 원대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創作物), 단적으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 비교한다면 연의는 상당히 발전한 점이 많은 작품으로서 상대적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세 세력을 균형(均衡)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연의는 단순히 유, 관, 장(劉關張) 중심의 통속적인 영웅인물이던 삼국지평화 수준(三國志平話水準)을 뛰어넘어 군상극적(群像劇的)인 특성을 가진 복합적이고 비극적 요소를 갖춘 '군웅물(群雄物)'로써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錯覺)하는 거지만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란 작품은 본래 나관중이 그런 내용으로 써서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된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에 나관중(羅貫中)이 그런 내용으로 쓴 작품이다. 흔히 보이는 촉까들이나 '촉빠 나관중의 고의 왜곡(歪曲)' 같은 거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종종 잊고 있거나 혹은 아예 모르는 것이다. 누가 왜곡을 해서가 아니라 애당초 그 작품이 태어난 땅에서는 민심 자체가 늘 촉한 쪽에 기울어 있었다는 이야기로서 당장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의 묘사를 보면 연의는 그 시대 작품치고 다른 세력을 굉장히 우대(優待)한 작품이다. 나관중(羅貫中)의 "분위기 따라가면서도 제 나름대론 균형(均衡) 맞추려 신경 썼다고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이전과는 달리 조조(曹操)를 "단순하기 짝이 없는 평면적인 악당(惡黨)"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연의의 조조는 군사적(軍事的)인 재능과 뛰어난 지략(智略)을 갖춘 영웅으로서의 외관을 갖추고 있으되 내면적으론 형식적인 충심(忠心)을 지녔으나 그 밑으로 끝없는 야망을 품고 있다. 의외로 인정 많은 면을 지녔으되 자신을 위해 타인을 서슴없이 희생시키는 잔혹(殘酷)함을 동시에 갖춘 대단히 이중적(二重的)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반론(反論)이 있다. 물론 조조는 이미 예전부터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정사(政事) 등에 표현된 그의 장점도 버리지 않고 표현했다. 조조가 죽는 장면을 보면 그의 과거의 악행의 응보(應報)를 받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조조 본인은 죽을 것 같으니 신하들이 하늘에 제(祭)를 올려보자고 하자 "하늘이 정한 천명이니 제를 올려도 소용없다"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처첩들에게 스스로 살림을 해서 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조조가 죽고 난 뒤 삽입(揷入)된 업중가(業中歌)에선 "지략(智略)도 뛰어나고 문장(文章)도 잘 짓고 부하들과도 사이가 좋고, 이만 한 사람이 그냥 신하로만 있겠냐"고 얘기하고 무정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표현(表現)했다. 또 업중가의 마지막 구절은 죽은 사람 가지고 평하기 좋아하는 서생(書生)들을 무덤 속에선 비웃는다고 얘기하며 끝난다. 단순 악역(惡役)이라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보통 외면의 재능(才能)이 있으면 내면으로도 좋은 품성을 가지고 외면이 찌질하면 내면도 찌질하기 마련인 고대 소설(古代小說)에서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물론 당시에는 "겉과 속이 다른 간웅(奸雄)"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컸겠지만 이런 묘사는 "유교적 도덕성"에 둔감(鈍感)해진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조조의 평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에서는 같은 장면이라도 조조(曹操)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게 한두 장면이 아니다. 일례로 관우(關羽)가 유비(劉備)를 찾아 떠나려고 하자 조조는 관우를 계략(計略)을 써서 잡으려고 하고 헌제(獻帝)의 아들을 길가에서 참수(斬首)시키는 등 완전한 악역으로 등장했다.
또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關聯作)에서는 조조를 제외한 위나라 인물은 지극히 비중이 적었다. 심지어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에서는 조조가 "나에게는 모사가 없다"라고 한탄하는 장면까지 있다. 사실상 창작물(創作物)의 세계에서 위나라의 신하들은 거의 존재감(存在感)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왠지 장료(張遼)가 모사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서 연의에서는 순욱(荀彧), 곽가곽가 (郭嘉) 등의 위나라 측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존재감을 주고 있다.
오의 경우도 이전의 삼국지 관련작(關聯作)에서는 단순히 손견(孫堅)이 잠시 출연하거나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이름을 올리거나 관우(關羽)의 죽음이나 이릉 전투에서 약간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연의에서는 오나라의 성립이나 멸망까지 잘 묘사하고 있다. 단, 손권(孫權) 말년의 후계자를 둘러싼 삽질과 황실 내부의 암투(暗鬪)가 빠져버리고 마지막 황제 손호(孫皓)의 막장 행각도 대충 넘어가 실제역사보다 나아 보이게 되었다. 아마도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명대(明代)에 쓰여진 소설이라 같은 강남 기반의 오를 까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삼국지는 군담소설(軍談小說)이다보니 대놓고 전쟁을 하거나 메인 플롯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는 만큼 굳이 다뤄야 할 필요를 못 느낀 나관중(羅貫中)이 그냥 빼놓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보면 위나 오의 인물들이 명백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짤막하게나마 많다. 조조(曹操)가 여포(呂布), 원소(袁紹) 등과 싸우는 부분이나 손책(孫策)이 강동(江東)을 정벌하는 부분이나, 혹은 합비공방전(合肥攻防戰) 등이 그러하다. 이런 부분에서 위나 오의 인물들은 각자 용기와 지혜(智慧)를 통해 사태를 해결하는 부분을 보여주고 있어 그 전의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조와 원씨 집안을 꺾고 하북(河北)을 재패하는 과정은 뒤로 갈수록 유비 3형제가 거의 개입(介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삼국지연의를 각색한 많은 작품들이 짧게 줄이거나 통으로 생략(省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이 싸움을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면서 조조와 그 모사들의 지략과 휘하 맹장(猛將)들의 활약에 상당한 묘사를 할애(割愛)하고 있다. 오나라가 멸망할 때 오의 승상 장제(張悌)는 “지금 만약 임금과 신하들이 전부 항복(降伏)하고 국난에 죽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 역시 욕된 일이 아니겠소?”라고 하며 비장(悲壯)한 모습을 보인다. 즉, 주인공은 촉이되 다른 세력(勢力)도 최소한 자신들의 에피소드 만큼은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있다.
유비(劉備)의 경우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正史三國志)에서는 조조(曹操)에 버금가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군략(軍略)에도 뒤지지 않는 효웅(梟雄)으로 평가받는 데 반하여 연의에서는 전장에서의 활약은 전부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이 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전략적인 면은 죄다 제갈량(諸葛亮)의 뛰어난 지혜덕인 것으로 바꿔 놓아 아무 활약(活躍)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는 제갈량이 기용(起用)되기 전의 승리조차 제갈량 기용 후로 슬그머니 옮겨 가며 공로를 빼앗겼다. 게다가 툭하면 울거나 신세한탄이나 늘어놓아 현대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찌질이로 보일 지경이다. 거기다가 정사에서는 유비군도 적벽대전(赤壁大戰)에 참전했고 연합군 병력도 유비군 2만, 손권군 3만으로 별로 밀리지도 않는다. 주유의 남군 공략도 도와줬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에선 적벽대전은 강 건너 불구경하다 퇴각하는 조조군 뒷치기나 하고 남군은 주유(周瑜)가 부상 입으면서 필사적으로 싸워 조인(曹仁)을 몰아내자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성만 냉큼 먹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손권(孫權)이 계속 형주(荊州) 돌려달라고 하는 게 정사보다 연의가 더 정당성 있어 보일 지경이다. 다만 작품 초반에는 유비가 지혜로운 모습을 보이는 부분이 꽤 많다. 황건적과 싸울 적에는 유비가 작전을 짜는 부분도 있으며 서주 시절 조조(曹操)의 견제(牽制)를 받아 이호경식(二虎競食)이나 구호탄랑(驅虎呑狼) 등의 계략에 당할 때도 오히려 유비는 조조와 순욱(荀彧)의 꾀를 꿰뚫어본다. 결국 계략에 빠진 것도 조조가 황명(皇命)을 이용하자 어쩔 수 없이 원술(袁術)과 싸웠다가 여포의 뒷치기에 당한 것이며 논영회 때 조조의 눈을 속이기 위해 겁쟁이인 척하는 임기응변(臨機應變)도 있다. 그러나 원소에게 의탁하고 여남에서 박살나 제갈량(諸葛亮)을 얻으면서 상대적으로 전과 같은 머리 쓰는 장면이 적다. 사실 적벽 전후로 서서(徐庶), 제갈량이나 방통(龐統), 법정(法正) 등 양적, 질적으로 우수한 참모진(參謀陣)들이 나타나 굳이 유비가 직접 전처럼 계략을 짜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참모진의 의견을 따르고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모범적인 군주상(君主像)으로 탈바꿈한다. 결국엔 제갈량이(諸葛亮)란 캐릭터의 필요성과 카타르시스를 위해 변모한 바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관중(羅貫中)이 유교와 수호지의 영향을 받아, 유비를 무보다는 문에 치중하는 유학의 이상적인 군주상(君主像)으로 잡혔다. 하여 '스스로 나서기 보다는 호걸(豪傑)들을 조정하는 역'인 수호지(水滸志)의 송강(宋江)과 비슷한 인물상으로 그리려 하다 보니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 찌질하게 보이게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이렇게 인덕을 강조(强調)하기 위해서 유비(劉備)의 묘사는 팔이 길고 귓볼이 두툼한 등 부처의 81상과 닮은 모습을 제법 보인다.
그러나 인덕(人德)이 강조되었다고 하지만 근대 이후 유비(劉備)는 중국인들에게조차 무능하지만 음흉(陰凶)한 인물로 여겨지니 이렇듯 유비의 묘사는 소설을 위해서 많이 달라진 감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정리하면 유불도 삼교(儒佛道三敎)의 조화를 중심으로 한 중국 정서에서 보자면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군주는 요, 순 임금이다. 즉 '무위의 치' 군주는 자비로움과 포용(包容)의 태도로 모두를 감싸 안을 뿐 마구잡이로 군림(君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의 유비(劉備)는 능력과 결단성(決斷性)도 뛰어난 편이나 이러한 면들이 연의에서는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전대의 한고제(漢高帝) 유방(劉邦)과도 상당히 비슷한 경우, 유방 역시 정치적인 능력, 식견, 인용술(引用術), 야심, 군사적인 능력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초한지(楚漢志) 등 창작물에서는 군림하지 않으며 한 발짝 뒤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들을 쓰는 모습만 강조(强調)되며 무능력하고 음흉해 보이는 것과 같은 경우다.
약간만 더 부연(敷衍)해 보자면 유비의 이런 캐릭터 정립은 시대가 지나면서 강고해진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이 유학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유비일당과 제갈량이 맨주먹으로 시작해 명분과 실리(實利)를 다 쟁취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줄타기하고 싸운 면모는 슬쩍 묻히고 유능한 선비 출신 신하(諸葛亮)와 인덕 있는 군주 유비라는 이상적인 군신관계(君臣關係) 위주로 부각되어 가면서 생긴 일이기도 하다. 제갈량은 당대 이후로 최고의 재상이자 선비로서 치국의 근본을 안 인물이라며 사후에도 자국이나 적국에서나 칭송(稱頌)받은 인물이다. 당장 삼국을 통일한 서진의 초대군주 사마염(司馬炎)부터가 '야, 제갈량만 한 신하 어디 없냐?'라고 했을 정도에 제갈량이 남긴 팔진도(八陣圖)를 장수들에게 학습시키는 면모를 보였고 서진시기부터 시작해 많은 선비들이 그를 흠모(欽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데다가 제갈량(諸葛亮)이 애당초 출사한 과정이라는 거 자체가 재야에 묻혀있던 '선비'가 '이상적인 군주'의 인정을 받아 등용(登用)되어 여차하면 니가 왕 하란 식으로 '전적인 신임'을 받고 마음껏 원 없이 자신의 이상과 능력을 펼치며 후대에도 명성(名聲)을 날린다는 이상적인 얘기고 여기에 그렇잖아도 북벌(北伐)을 하고 싶어 안달하던 송나라 이후 한족의 분위기까지(한국으로 따지면 병자호란 이후 사회분위기) 영합(迎合)하게 되면 선비들한텐 제갈량이야말로 꿈의 화신(化身) 같은 게 된다.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같은 소설은 당대 관직진출이 좌절(挫折)된 선비들이 주로 쓰던 것이었고 때문에 더 나아가 제갈량은 선비의 사표(師表) 중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그를 등용한 군주의 캐릭터 해석도 유가적(儒家的)인 이상의 극치인 군주 중의 군주다운 뭔가가 필요해지는 것으로 유비(劉備)의 캐릭터 정립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관우(關羽) 신앙까지 겹쳐져서 '그 관우'가 섬겼던 유비라는 군주 자체가 더욱 이상화(理想化)되는 과정은 덤이다.
단, 나관중(羅貫中)의 원작에 모종강(毛宗崗) 부자가 주석(註釋)을 달면서 점차 친촉(親蜀), 반위적(反魏的)인 내용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관중의 관심이 "영웅 쟁패(英雄爭霸)"였다면, 모종강 부자의 그것은 "권선징악(勸善懲惡)"에 가까웠다. 또한 루쉰(魯迅)이 정리한 차이점에 따르면 나관중 본은 촉에 불리하거나 덜 멋진 부분이 많다. 오랜 떡밥이던 "안량(顔良)이 유비(劉備)에게 관우(關羽)에 대한 얘기를 듣고 말을 걸려다가 살해당한다"는 것은 가정본(嘉靖本) 중 마이너한 버전에서만 나오며 모종강본(毛宗崗本)은 삭제되어있다. 또한 손부인이 유비의 패배 소식을 듣고 자살(自殺)하는 것은 모종강 본에서 추가된 것이며 심지어 나관중 본은 제갈첨(諸葛瞻)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할까 망설이는 부분까지 있다. 한마디로 나관중은 촉의 인물들도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약한 모습 등을 묘사(描寫)했지만 모종강 본에 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촉이 되는 것이다. 모종강의 인지도(認知度)가 나관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나관중이 자신과 관계없는 부분까지 욕먹는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의 북벌도 촉이 크게 패한 건 1차 북벌 한 번밖에 없고 나머지 북벌에서 일어난 전투는 거의 다 이기거나 큰 피해 없이 후퇴했는데 연의에선 진창에서 학소(郝昭)가 제갈량을 완벽히 발라버리고 사마의(司馬懿)도 위수에서 한 번 제갈량의 작전을 간파(看破)해 큰 피해를 입히는 걸로 바뀌었다. 정작 정사에서 진창 전투(陳倉戰鬪)는 좀 찔러보다가 안 되니까 그냥 물러난 것에 가깝고 사마의는 전투로는 제갈량을 한 번도 못 이겼다. 실제 제갈량과 사마의는 군대를 신중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다지 드라마틱한 전투 장면이 연출되지 않아서, 연의에선 흥미(興味)를 유발하기 위해 양측의 전공을 서로 부풀려준 것이다. 또 연의에서 제갈량을 굉장히 천재적(天才的)인 전술가로 묘사해왔음에도 실제 제갈량의 북벌 전과(北伐戰果)가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사마의나 학소 등 위나라의 방어 사령관(防禦司令官)들도 만만치 않았다고 띄워주는 묘사를 넣어서 독자들을 납득(納得)시키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나관중(羅貫中) 이전의 삼국지인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같은 경우는 역사왜곡(歷史歪曲)을 하면서까지 결국엔 촉한의 후예(後裔)가 승리한다고 억지 해피엔딩을 만들었다.
끝으로 정사를 참고하면서도 진나라 사관이었던 진수(陳壽)가 차마 건들 수 없었던 사마씨(司馬氏)의 찬탈이나 기전체 사료의 특성인 뒤죽박죽이 된 부분들, 예컨대 합비전투(合肥戰鬪)를 나름대로 매끄럽게 정리함으로서 정사(正史)보다도 서술이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들도 없진 않다. 당대에 이런 민담 수준(民譚水準)을 뛰어넘는 고퀄리티의 역사 소설을 남길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지경이다.
작가 나관중(羅貫中)은 "민담(民譚)"을 많이 인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그 이전 시대의 삼국지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의외로 민담의 비중은 적고 많은 부분이 역사적 기록(歷史的記錄)에 근거한 창작 과정을 거쳐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본(底本)이 되는 삼국지평화의 내용 자체가 삼국지연의의 총량 중 10% 수준이다. 마개조라는 말로도 부족하고 사실상 재창작(再創作)이다.
실제로 가정본(嘉靖本; 1522년의 판본)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의 서문을 써준 장대기는 나관중(羅貫中)이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연의를 편차(編次)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정사 삼국지를 직접 참조하였다기보다는 자치통감의 축약본(縮約本)을 직접적인 자료로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사 삼국지는 기전체(紀傳體)라서 구조가 복잡하여 자료로 쓰기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편년체(編年體) 형식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이야기를 만드는 자료로서는 더 나았을 것이다. 물론 정사 자료를 참고를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정사 혹은 정사에서 인용(引用)된 사서에만 나오고 자치통감에는 언급이 없는 일화(逸話)들도 많을 뿐 아니라 정사의 본문을 잘못 읽거나 혹은 필사본(筆寫本)의 제작이 잘못되었을 때만 있을 수 있는 오류(誤謬)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난 원나라 시대에는 민간에 전해지는 역사를 바탕으로 평화를 만들어 이야기꾼에게 구연(口演)하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오류가 많고 너무나 저속하여 교양 있는 사군자(士君子)들이 대부분 싫어했다. 그래서 동원 땅 출신의 나관중(羅貫中)이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신중하게 취사선택하여 편찬(編纂)하고 삼국지통속연의라 이름 했다. 그 문장은 심오(深奧)하지 않고 말투는 그다지 속되지 않으며 사실을 기록하여 역사 본연(歷史本然)의 모습에 접근했다. 독자 모두가 쉽게 이해(理解)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오히려 삼국지연의 이후 시대에 발생하는 민담(民譚)이나 파생 작품(派生作品)들은 대부분 삼국지연의에 기초하여 연의를 일부 변형(變形)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연의에 대해 논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판본이 바로 모종강본(毛宗崗本)이다. 청나라 강희 연간에 모종강 부자(毛宗崗父子)가 엮은 판본으로 현재 한중일(韓中日)에서 가장 잘 알려진 판본(板本)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고전소설(古典小說)의 특성상 모종강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삭제(削除)되거나 추가되거나 개편된 장면도 많다. 때문에 나관중본(羅貫中本)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하는 판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동혁(李東爀) 역시 모종강본을 비판한다.
전 버전에서는 황석영(黃晳暎) 삼국지가 나관중본(羅貫中本), 즉 가정본(嘉靖本)을 저본 삼아 번역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가정본이 아닌 1, 2권까지는 모종강본 계열(系列)로 추정되는 현토 삼국지를 참조했다고 머리말에서 밝혔고 3권 이후부터는 인민문학출판사본(이하 人文本)을 참조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로 3권에서 조조(曹操)가 오환 정벌을 할 때 그 우두머리가 ‘묵돌’이 아닌 ‘답돈’이라고 수정된 것과 4권에서 인문본 이전에 회계의 ‘능통’이라고 한 것을 ‘낙통’이라고 고친 부분과, 오찬(吾粲)의 이름이 ‘吳粲’에서 ‘吾粲’으로 바르게 수정된 것 등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종강본이 삼국지연의의 품질을 떨어트린 저열한 판본인가 하면 그렇게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엔 여러모로 난점이 많다. 모종강본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소설로서의 매력이다. 나관중본(羅貫中本)에서 관우의 최후 장면은 싸우다말고 승천하는 것으로 처리되는 등 구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모종강본(毛宗崗本)에서는 이를 소설에 맞게 각색했다. 특히 소설로서의 재미는 그 이동혁(李東爀)도 인정했다. 모종강본이 나온 다음 소설로서의 질이 훨씬 올라갔으니 말인데, 나관중본(羅貫中本)은 사실 소설로서는 어수선한 데가 많았다. 품격으로 보아 나관중본은 아직 구전 이야기의 냄새가 짙다면 모종강본(毛宗崗本)은 글을 아는 사람들도 볼 만 했다.
무려 20여 가지나 난립(亂立)하던 삼국지연의의 판본들이 나중에는 모종강본 기준(毛宗崗本基準))으로 교통정리가 된 것만 보더라도 이 판본의 위력을 알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청대 이후 한자문화권에서 사랑받은 삼국지연의란 대체로 모종강본(毛宗崗本)을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동혁(李東爀)의 모종강 비판에 대해 삼국지연의 전문가인 정원기(鄭元麒)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가정본(嘉靖本)을 나관중(원)본이라 호칭할 뿐만 아니라 가정본이 모종강본(毛宗崗本)보다 우수하다는 표현을 수차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편향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모종강본 출현 이후 3백 년 동안 가정본은 어디 가고 모종강본이 독서계의 주도권(主導權)을 잡았단 말인가. 가정본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종강본이 유일한 통행본(通行本)이 되었다면 모종강본의 우수성이 입증(立證)된 것이다.
다만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모종강본(毛宗崗本)에서 호오가 갈리는 것은, 소설의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나관중본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관중본(羅貫中本)은 '통속연의'라는 말 그대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통속적인 이야기에 가까웠다. 즉 인물 개개인의 '멋짐'이라는 통속적(通俗的)인 면을 보여주던 소설이었다. 그런데 모종강은 여기서 강한 주제 의식(主題意識)을 넣기 위해 촉한에는 버프를, 위에는 너프를 가한 것이다. 때문에 나관중본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구시대적이고 케케묵은 가치관(價値觀)이 책에 배여버렸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모종강본을 좋아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이런 강력한 주제의식을 더 선호(選好)하기도 한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황실과 같은 유씨(劉氏)라는 이유로 한의 적통을 자처하는 유비(劉備)가 어딜 봐서 선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 공화주의(共和主義)가 보급된 것도 아니기에 너무 가혹한 잣대일 순 있다. 그리고 위선적(僞善的)이라고 비판도 많이 받지만 작중에서 그나마 주인공이라고 현대가치관(現代價値觀)으로도 긍정적인 인덕을 내세우는 군주는 유비 정도고 조조(曹操)라고 딱히 민중을 위하는 혁명가(革命家)도 아니다. 또 위에서도 나온 얘기인데 이러니 저러느니 해도 한때 엄청 격하된 조조에 대한 재평가의 시작은 이 삼국지연의이고, 모종강본(毛宗崗本)이라고 이걸 아예 죽여 놓지는 않았다. 당장 조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유명한 여백사 에피소드가 나오는 4화에서 모종강의 서시평(序詩評)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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