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남편과의 사이에 중학생 아들을 둔 40대 여성입니다. 아들은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착하고 섬세한 아이인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평범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제 탓이라는 생각에 괴롭습니다.
저에겐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습니다. 실수를 지적받는 걸 견디지 못해요. 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비난처럼 느껴집니다. 칭찬을 들어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 탓부터 하고 죄책감에 괴로워합니다. 그룹 안에서 헌신하는 제 노력을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삐칩니다.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제 안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누가 저를 가르치려고 하면 화가 나서 거칠게 굴기도 합니다.
초등학생 때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중학생 땐 친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기도 했고요. 왕따 경험 이후 친구를 사귀는 게 두렵습니다. 저를 왕따시킨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또 외롭게 보내야 할 것 같아서 관계를 끊지 못하고 지냈어요. 그 아이는 제게 '죽으라'는 쪽지를 보내기도 했죠. 누군가 저를 가르치려고 하거나 뭔가를 하라고 시키면 화가 나는 게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뚝뚝한 아버지와 엄격한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맏이의 도리와 역할을 자주 말씀하셨어요. 공부를 못하면 중학교만 마치고 공장에서 일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중학생 때 아버지에 대한 욕을 쪽지에 적었는데, 그걸 어머니가 발견해서 아버지에게 알렸고 아버지는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셨어요. 어머니에겐 자주 체벌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그런 교육 방식이 너무나도 싫었는데 제 아들을 낳고 나선 저 역시 그렇게 되더군요.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때렸고, 아이가 나를 힘들게 하면 ‘널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때 저보다 열 살 어린 동생을 가르치겠다며 매를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커져서 못되게 대했어요. 그럴 때마다 '나중에 얼마나 죄송스러울까' 하는 후회가 들곤 했습니다. 부모님께 화를 냈다가 죄송해하기를 반복했어요. 부모님과 보낸 좋은 시간도 많았을 텐데, 왜 속상하고 아팠던 기억이 더 많이 나는 걸까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늘 애써왔는데 제 모든 것이 거짓이고 가짜 같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곪아 터진 부모님과의 관계가 이제 좀 나아지는 듯했는데 아들이 우울증을 앓으니 저 자신이 밉고 부모님까지 미워집니다. 제가 부모님을 미워했던 것처럼 아이가 커서 저를 미워하게 될까 봐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 남편에게 좋은 아내이고 싶어요. 아이가 나중에 저를 미워하지 않는 것과 저 스스로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 두 가지를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허지희(가명∙44∙프리랜서)
지희씨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듯한 감정에 눌려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사연을 읽으며 ‘K장녀’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K장녀'라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은 책임감만 떠안고 충분한 지지와 공감을 받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지요. 속으로 문제가 쌓여 가다 곪아 터지고 나서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고 괴로워하고요. 지희씨도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지희씨는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험을 반복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에게 이상적인 겉모습을 기대하게 된 거죠. 하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으니 실망하고 또 아들의 우울증을 계기로 현재의 상황을 더욱 괴롭게 느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때 당한 억압은 성장 과정에서 안전한 경험이 쌓여가며 완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감정과 의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되기도 하죠. 지희씨는 그런 내적 경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모님에게 부정적 감정을 품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희씨는 성장하면서 그런 감정을 가지면 안 된다는 기준을 갖게 된 듯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는 것만으로 좋은 사람이 되진 않습니다. 억압된 감정이 쌓였다가 터지면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어요.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완벽을 추구하게 되는 식의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완벽주의는 감정을 억압하는 수단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어요. 완벽하지 않기에 좌절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기도 하죠. ‘사람은 완벽할 수 없어’라고 최면을 거는 것만으로 완벽주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무의식에 억압돼 있던 감정이 다시 완벽함을 추구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싫어했던 경험을 자녀가 또다시 겪게 하는 건 부모로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지희씨도 그래서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 인식하고 있는 것 자체가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어렵더라도 지희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살펴본다면, 삶을 더 나은 쪽으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로 사는 것을 위기이자 기회라고 하지요.
지희씨는 여러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억누르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감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마저 논리와 이성으로 따지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 하는 것만으로 감정을 해결할 순 없습니다. 지희씨에겐 두렵더라도 날것 그대로의 감정과 마주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요. 감정을 무시한 채 좋은 사람이 되고픈 욕망에 몰두하기보다는 타인에게 지지받고 인정받지 못한 아픈 감정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감정을 억압하고 부정하면 자녀와 진솔한 정서적 상호작용을 할 수 없어요. 감정이란 좋은 것만 선택해서 상대방에게 전달할 순 없는 겁니다.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전달되지요. 부모로서 나쁜 감정을 가려내려 하다 보면 아이와 거리감만 커지고 자녀는 자기 마음이 공감받지 못한다고 여길 수 있어요. 자녀에게 이상적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닙니다. 부모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 아니라 '교감'입니다. 교감의 핵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자기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받아들이기 어려우니까요.
지희씨 체벌 때문에 아이에게 우울증이 생겼다고 자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울증이 발생하는 원인은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진솔한 감정적 상호작용이 우울증 회복과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기억하세요. 체벌을 두둔하는 건 아닙니다. 체벌은 장기적인 효과가 없고 부작용이 더 큽니다. 공포와 고통을 느껴서 감정을 억압하는 패턴을 만듭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에게 더 진솔한 사람'이 되려고 해보세요. 지희씨는 “거짓이고 가짜 같다”고 느낀다고 했지요. 그건 스스로에게 진솔하지 못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껴서일 겁니다. 사람은 별로 대단하지 않은 존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래요. 자꾸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부모가 되려고 무리하게 애를 쓸수록 스스로를 억압하게 되어 더 나쁜 결과를 만날 수 있어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표현하고 지지를 받는 경험이 지희씨에게 필요합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감정일기를 써서 마음을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쪽지를 들킨 경험 때문에 감정일기를 쓰는 게 두렵다면 일대일 상담을 받아보시는 것도 고려해 보셨으면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자신만 탓하는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감정을 억압하는 가장 쉬운 방식일 뿐이에요. '나 때문에 부모와 관계가 나빠졌다'고 믿으면 부모에 대한 원망은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바람직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자기를 탓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억압의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이제 와서 부모님을 원망한다고 뭐가 바뀌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건 '원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과 그걸 표현하는 건 별개라는 것도 알려드리고 싶어요. 지희씨의 감정을 부모님이 이해하도록 애쓰기보다 지희씨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직면하는 일은 쉽지 않아요. 직면하는 시도를 한다고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않은 구간을 지나는 것도 피할 수 없고요. 지희씨가 이런 점을 유념한 채로 감정에 진솔하게 다가가 보시기를 응원합니다. 자녀분께도 그런 감정 수용의 태도가 전해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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