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만의 이유(理由)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글쓰기를 자신에 대한 자아성찰(自我省察)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정복하기 위한 수단(征服手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글을 남에게 보여줌으로써 거기서 자아만족을 얻기 위한 성취감이라고 강조(强調)합니다. 여기서 자아성찰은 현실생활을 도피(逃避)하는 패배자의 반성이 아닙니다. 또 정복은 어떤 분야에서 유명세를 탄 승리자의 도취도 아닙니다. 그리고 자아만족은 권위와 명예를 위한 성취감의 발로(發露)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성찰도 아니고 정복도 아니고 성취감도 아닙니다. 제가 글 쓰는 목적은 오로지 자기안의 자신과 결사적인 도전(挑戰)을 의미합니다.
글의 배경에는 한사람의 견해(見解)가 깊숙이 박혀있고 주관적인 선택이 두텁게 깔려 있습니다. 그 선택을 속박하는 인간의 지각에는 신생사물을 발견하는 존재 의식(意識)이 수반됩니다. 즉 인간의 존재가 사물을 나타나는 수단(手段)이라는 의식이 따릅니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많은 관계를 맺는 것이 인간들 자신이고 자연과 우주 사이에 연관된 것도 인간 자신입니다.
사물을 통하여 예술을 창조하는 인간의 주요한 동기(動機)의 딱 하나입니다. 이 세계에 있어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는 안 될 발견자라고 간주(看做)하는 커다란 욕구가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서 다양한 모습과 숨길 수 없는 그 어떤 얼굴 표정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것을 상상 속에 또는 글 가운데 고정시켜서 그 관계를 파악(把握)하려고 합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종의 질서를 도입하여 정신의 전일성(全一性)을 사물의 다양성에 나타내고자 합니다.
나는 이것들을 글로 만들어낸다는 자의식(自意識)을 갖게 됩니다. 나는 자신을 창조의 본질적인 존재로서 느낍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창조된 대상이 나한테서 떠나버립니다. 나는 동시에 발견한 그 즉시로 창작(創作)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된 것은 창조적인 활동에 대하여 비본질적인 것이 됩니다. 우선 타인의 눈에는 결정적으로 보이더라도 창조된 대상은 나에게는 언제나 유예(猶豫)의 상태로 보입니다.
나는 언제나 이러저러한 선(線)이나 색채나 말을 변경(變更)할 수 있습니다. 창조된 대상이 나에게 자기를 억지로 내세워 달라고 청탁한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말인즉 글이란 쓰기를 마감할 때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글을 남의 눈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창조한 것을 다시 발견해야만 합니다. 나는 자기가 창조한 그것을 재창조할 때 그것에 기울인 활동을 의식할 만큼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기(陶器)나 목각(木刻)의 경우처럼 사용하는 방법이 일정한 도구를 쓰고 전통적인 기준에 의해 만들 수 있는 경우에는 우리 손을 움직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결과는 나 자신에게 낯선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객관적으로 눈에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제작한 규칙(規則)이나, 척도(尺度)나, 기준(基準) 같은 것을 만들 창조적인 비약(飛躍)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는 작품 속에 나 자신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는 작품을 판단(判斷)할 경우에 나 자신이 만든 규칙에 의거(依據)해야 하며 내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역사나 인간의 사랑이나 기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글에 손을 대지 않고 다만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때에는 나는 글에서 그 기쁨이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글에 내가 지닐 수 있는 감정을 다 담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내가 글로 쓴 종이에서 얻은 결과는 결코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글의 효과가 어떻게 해서 비롯된 것인지 그 과정(過程)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나 자신의 주관(主觀)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요, 나의 영감(靈感)이요, 나의 전부입니다.
나는 글을 지각(知覺)하려고 노력할 때 그것을 한 번 더 창조(創造)하여 그것을 만들어낸 과정을 마음속에 되풀이해 보는데 그 과정의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결과처럼 보입니다. 지각(知覺)에 있어서는 대상이 본질적인 것이며 주체는 비본질적(非本質的)인 것입니다. 주체가 창조 속에 본질(本質)을 구하여 그것을 획득(獲得)할 경우에는 대상이 비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변증법(辨證法)이 글을 쓸 때처럼 분명히 나타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글의 대상은 기묘한 독주(獨奏)와 같은 것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독서라는 구체적인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만 독서가 계속되는 동안만 계속되는 것으로 다른 때에는 다만 종이 위에 검은 흔적(痕迹)이 남아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가 쓴 것을 읽을 흥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화공(靴工)은 치수가 맞으면 자기가 만든 구두를 신을 수 있고, 건축가는 스스로 지은 집에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무한한 자신감(自信感)을 느낍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미래를 예견(豫見)하고 기대합니다. 어구(語句)의 끈이나 거기 계속되는 구절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페이지의 내용이 예견됩니다. 이와 같은 구절이나 페이지의 예견을 확인하거나 말소(抹消)하는 것이 기대됩니다. 독서는 많은 가설(假說)과 꿈과 거기 잇닿은 각성(覺醒) 그리고 희망과 실망의 집합(集合)으로 섞여 있습니다.
독서하는 사람은 언제나 미래 속에서 발생하는 현재를 읽고 그 구절에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 미래는 단지 확실한 것 같다고 생각될 뿐입니다. 글을 읽어 나갈수록 일부는 붕괴(崩壞)되고 일부는 확인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페이지에서 페이지로 넘어감에 따라 미래가 창작적 대상이 되어 움직이는 지평선(地平線)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쓴다는 것은 암암리에 독서와 유사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참된 독서(讀書)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글이 펜 아래서 탄생될 때 말을 눈으로 읽을 테지만 쓰기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는 나는 방문자들처럼 읽게는 되지 않습니다.
나는 시선의 기능은 읽히기를 기다리면서 잠들어 있는 말을 눈뜨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의 설계도(設計圖)를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순수한 조절의 사명을 갖고 있으므로 그 경우에는 읽음으로써 손의 작은 과오(過誤)밖에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나는 예견하지 않고 추리하지 않습니다. 나는 시도(試圖)합니다. 때로는 기대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른바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번득이는 착상(着想)이나 자극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기대하는 것은 타인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더라도 미래가 아직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내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아직 그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 대하여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 경우에 미래는 공백의 페이지로 남아 있으나 방문자에게는 미래가 그를 결말에서 동떨어져 있는 말로 가득 찬 페이지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곳곳에서 봉착하는 것은 나의 지식이고 나의 의지이며 요컨대 나 자신입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주관성(主觀性)에만 접하게 되며 스스로 창조해 내는 대상에 접하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것을 창조해 내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읽어 보더라도 이미 그것은 때가 늦어 내가 쓴 문구가 나의 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관성(主觀性)의 한계까지 들어가도 그 한계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어느 하나의 필치나 격언(格言)이나 잘 배치된 형용사의 효과를 평가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미치는 효과입니다. 나는 그 효과를 측정(測定)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미치는 효과입니다. 나는 그 효과를 측정하지만 느끼는 일은 없습니다. 나는 결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책에 손을 대기 전부터 그렇게 할 것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작품이 훗일에 나에게도 그 어떤 객관성(客觀性)을 띤 것으로 보인다면 세월이 지나 내가 그 작품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작품 속에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벌써 그것을 쓸 수도 없게 된 때일 것입니다. 생애가 끝날 무렵에 ‘사회인식설(社會認識說)’을 다시 느끼는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실패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종이 위에 자기의 감동을 투영(投影)하며 그것을 확대시키는 지루한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창조한다는 행위 자체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불완전하고도 추상적(抽象的)인 하나의 동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내가 한 사람밖에 없다면 나는 원하는 대로 쓸 수 있을 테지만 대상으로서의 글은 결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결국 펜을 놓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일에서 당연히 그 변증법적(辯證法的)인 관련자로서 읽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관련된 두 행위를 위해서는 색다른 두 동인(動因)이 필요하게 됩니다. 정신의 소산(所産)으로서의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상상의 대상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나와 방문자와의 공통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타인을 위한 글과 타인에 의한 글 이외의 글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독서는 실제로 지각(知覺)과 창조의 종합성처럼 보입니다. 거기서는 주체(主體)와 대상(客體)이 동시에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대상이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것이며 그 본래의 됨됨을 방문자에게 강요(强要)합니다. 방문자는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본질적인 것은 그것이 단지 대상을 발견하기 위해 즉 대상으로 하여금 거기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필요할 뿐더러 또한 그 대상이 절대적인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즉 그것을 창조해 내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방문자는 동시에 발견하고 창조하는 의식(意識)을 갖게 되며 창조함으로써 발견하고, 발견함으로써 창조하는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서가 기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방문자가 피로하여 사리(事理)를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여러 가지 관계의 대부분을 간과(看過)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불이 붙는다거나 붙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대상에 불을 붙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어둠 속에서 약간의 구절(句節)이 차츰 머릿속에 떠오를 것입니다.
만일 방문자가 그 최상의 상태에 있다면 그는 말의 저쪽에 종합적인 하나의 형태가 투영(投影)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각각의 구절이 제멋대로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논제나 주제(主題)나 의미가 나타납니다. 의미는 처음부터 말 속에 포함돼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전체의 의미가 각각의 말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글의 대상은 말을 통하여 실현되지만 결코 말 속에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상의 본래의 성질은 침묵이며 말의 대립물(對立物)입니다. 지금 한권의 책속에 들어 있는 몇 십만의 말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도 작품의 의미는 반드시 거기에 나타나게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미는 말의 합계가 아니라 말이 만드는 유기적(有機的)인 전체입니다. 거의 무엇에 의해서도 이끌리지 않는 방문자가 그것을 발견하여 말이나 구절을 제자리로 두고 간수하여 눈뜨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은 조작(操作)은 차라리 재발명이나 또는 발견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합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와 같은 재발명이 처음의 발명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독창적(獨創的)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대상이 미리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재발명하거나 발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침묵은 내가 의도(意圖)하는 목적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미리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의 침묵은 주관적 것으로 말에 선행합니다. 그것은 말의 결여이며 말이 특수화하기 이전의 미분화(未分化)의 침묵이며 내가 영감(靈感)에 의해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방문자의 침묵은 하나의 대상(對象)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의 내부에도 다시 몇몇 침묵(沈默) 즉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특수한 의도에서 오는 결과이지만 그와 같은 의도는 방문자가 지어내는 대상을 제외하고는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상에 이상한 모습을 부여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의도(意圖)입니다. 그것은 표현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도가 작품의 어떤 특정한 장소에 나타나는 일을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습니다. 전설과 신화(神話)의 현실성(現實性)과 진실의 이 모든 것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방문자 자신이 씌어진 것을 무한히 초월하여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독서는 방향(方向)을 찾은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글의 대상은 방문자의 주관 이외에 아무런 실질(實質)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방문자의 기대(期待)는 바로 내 기대이기도 합니다. 방문자의 초조감이 없으면 거기에는 권태(倦怠)로운 상징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악에 대한 증오는 상징에 의해 촉진된 나의 증오입니다. 내가 그 악에서 느끼는 증오가 없다면 글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글에 생기(生氣)를 주는 것은 나의 증오입니다. 그러나 한편 말은 나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 인물을 나 자신에게 반영시키기 위한 함정의 구실도 합니다. 각각의 말은 초월(超越)의 과정이며 나의 감정을 형성하고 그것을 명명(命名)하며 그것을 상상의 인물과 결부시킵니다. 그 인물은 나를 위해 나의 감정을 살리는 것을 일삼고 나에게서 빌어간 정념(情念) 외에는 아무런 실체(實體)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말은 그와 같은 정념에 대상(對象)과 배경과 지평선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문자로서는 모든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일거리가 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이미 주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글은 방문자의 능력의 수준에 정확하게 적응(適應)하는 것입니다. 읽으면서 일종의 창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방문자는 언제나 더욱 멀리까지 도달(到達)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더욱 깊이 창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글은 무한한 깊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물처럼 불투명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글의 이와 같은 성격은 나의 주관에서 흘러나오게 되면 눈 밑에 동결(凍結)되어 침투(浸透)할 수 없는 객관성으로 변합니다. 나는 그와 같은 성질의 절대적인 창조(讀書)를 신성한 이성(理性)에만 있고 또 이성적 직관(理性的 直觀)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는 독서에 의해서만 완성됩니다. 나는 자기가 시작한 일을 완성시키려는 생각을 타인에게 맡겨야 하며 방문자의 의식(意識)을 통해서만 자기를 작품에 본질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글은 하나의 호소입니다. 쓴다는 것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내가 시도(試圖)한 발견을 객관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처럼 방문자에게 호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호소가 방문자의 무엇에 대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책 속에는 미적(美的) 대상이 나타나게 할 수는 없으며 다만 그것이 나타나도록 촉구(促求)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미적인 대상이 나타나게 하는 것은 나의 정신 속에도 없습니다. 나는 그 주관성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주관성(主觀性)은 객관성에 옮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글의 출현은 그 출현 이전에 주어진 조건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건입니다. 이 방향이 정해진 창조는 새로 시작된 것이므로 가장 순수(純粹)한 상태의 방문자의 자유에 맡겨져 있습니다. 즉 나는 방문자의 자유에 호소하여 그 자유가 나의 작품의 제작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글이 가능한 행위의 수단이며 나의 자유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글이 별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도구가 어느 하나의 조작이 동결된 초고(草稿)라는 것도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적 명령(假定的命令)에 그치는 것입니다. 나는 망치로 나무상자에 못을 박을 수도 있지만 망치질을 잘못하여 손을 다칠 수도 있습니다. 망치를 그 자체로서 생각하는 한 그것은 나의 자유에의 호소는 아니며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유에 봉사(奉仕)할 것을 목적삼고 있으며 수단의 자유로운 발명 대신에 규칙적으로 열거된 전통적인 행위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은 자유에 봉사하지 않고 자유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속이나 미혹이나 탄원(歎願)에 비해 타인의 자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거기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만 하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선 그것을 인식(認識)하고 다음에 그것을 신뢰하며 끝으로 상대의 자유에서 자유 자체의 이름으로 즉 상대의 자유에 대한 신뢰(信賴)의 이름으로 범위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책은 하나의 도구처럼 어떤 하나의 목적에서 본 수단이 아니라 방문자의 자유에 대하여 그 자신을 목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는 목적성(目的性)이라는 표현이 나에게는 글을 나타내는 데 부적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미적(美的) 대상이 단지 합목적성(合目的性)의 외관을 나타내는 데 지나지 않으며 실은 상상력의 자유롭고 규칙적인 유희를 촉구하는 데 불과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관객(觀客)의 상상력이 단지 조절적(調節的)인 기능을 갖고 있을 뿐 구성적(構成的)인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상력은 유희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가 남긴 궤적(軌跡)을 넘어서 아름다운 대상을 재구성(再構成)하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정신의 다른 기능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를 즐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외부에 있으며 항시 무엇인가 기도(企圖)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 매우 규칙적인 질서를 보여 주고 이로 말미암아 설사 특정한 목적을 그 대상에 배치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合目的性)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미(美)를 정의하면 그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처럼 글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꽃은 많은 좌우 상칭(相稱)과 조화 있는 색채와 규칙적인 곡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성질의 모든 것이 곧 목적론적으로 설명되어 어느 미지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간주(看做)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며 자연의 아름다움에는 예술의 아름다움과 견줄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글은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이 견해(見解)를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글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사람이 그것을 볼 때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순수한 호소(號召)가 충족되어야 하는 일거리로서 나타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상명령(至上命令)의 수준에 있게 됩니다. 이 글을 보지 않으려고 컴퓨터를 끄거나 머물지 않는 것은 방문자의 자유이지만 한 번 그것을 켜면 방문자는 그 책임을 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극단적인 기능(機能)이나 멋대로의 유희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명령에 의해 요구되는 창조적인 행위 속에서 느껴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대적인 목적은 이 초월적(超越的)이기는 하지만 동의(同意)한 명령을 내린 것은 자유 자체이며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치(價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글은 사명이므로 또한 하나의 가치입니다.
만일 내가 방문자들에게 호소하여 내가 시작한 시도(試圖)에 유종의 미(有終之美)를 거둘 것을 요구 한다면 나는 방문자를 순순한 자유, 순순한 창조력, 무조건적(無條件的)인 적극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방문자의 수동성(受動性)에 호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즉 방문자를 감동시켜 대뜸 공포나 욕망이나 분노의 감동을 전하려고 시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도 있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동은 예견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은 그런 감정을 분명히 환기(喚起)하는 수단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나는 정념(情念) 속에서는 자유를 소홀히 합니다. 닥치는 대로 부분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절대적인 목적을 내세우는 일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책이 증오(憎惡)나 욕망을 기르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감격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것을 바란다면 나는 자기 자신과의 모순(矛盾)에 빠집니다.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으면 완성해야 할 일을 제출(提出)하여 오직 그 일의 완성을 방문자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글에 대해 본질적이라고 생각되는 순수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나는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문자에 대한 나의 예절이라고 부른 것은 정당합니다. 다만 그것은 내가 어떤 추상적(抽象的)이고 개념적으로 호소하는 그런 종류의 자유는 아닙니다. 인간이 미적인 대상을 창조하려면 물론 감정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감동적이면 그것은 우리의 눈물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며 그것이 희극적이면 그것은 웃음을 통하여 인정될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감정은 특수한 종류의 것으로 그 근원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감정은 빌려온 것입니다. 자유로이 서술한 이야기가 아니면 그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관념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수난(受難)입니다. 자유는 자진해서 수동적(受動的)인 입장에 서며 그 희생에 의해 일종의 초월적인 효과를 얻게 됩니다. 방문자는 믿기 쉬우며 그런 상태 속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꿈결처럼 방문자를 에워싸지만, 방문자 자신이 자유라는 의식은 언제나 잃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작가를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二律背反)에 몰아넣으려고 합니다. ’당신의 말을 믿자니 납득이 가지 않고, 당신의 말을 믿지 않자니 우습다‘고. 그러나 이와 같은 의론(議論)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적인 의식에 고유한 성질은, 속박(束縛)이나, 혹은 서약에 의해 믿게 된다는 데 있고, 작자 자신과 작가에 대하여 충실(忠實)하기 위해 믿는다는 점에 있으며, 또 방문자 자신이 끊임없이 믿는 쪽을 택한다는 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내가 왜 블로그에 왜 글을 쓰는지, 방문자에게 할 말은 뭔지가 모호(模糊)하고 조잡(粗雜)할 수 있습니다. 내 글이지만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部分)이 많습니다. 그러나 방문자가 이 글을 읽어달라고 부탁(付託)하지 않습니다. 또 이해하라고 청탁(請託)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고 하고 싶은 말을 했기 때문에 이글에 대해 왈가불가 해명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더 보완(補完)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다시 이 글에 대해서 더 보충(補充)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글은 내가 쓴 것이고 읽는 것은 방문자의 몫입니다. 오늘도 감사하게 글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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