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 속에서 펼쳐진 여섯 가지의 클럽 여행기.
예술가의 팬이 되면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궁금해지고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팬덤’이 형성된다. 골프에도 이런 월드 클래스 예술가들이 있다. 미국의 피트 다이 Pete Dye(2020년 1월 작고), 톰 도크 Tom Doak, 벤 크렌쇼와 빌 쿠어 Ben Crenshaw & Bill Coore, 길핸스GillHanse 등 세계 100대 코스에 3개 이상의 작품을 올린 설계자들이다. 이들이 지구상 어딘가에 새로운 골프장을 만들기 시작하면 그 소문은 전 세계 골프 마니아들 사이에 퍼지고, 그들은 개장하자마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거장의 작품을 경험하러 날아간다. 나는 금년 봄 뉴질랜드로 향했다. 개장한 지 4개월 된 벤크렌쇼와 빌 쿠어의 신작, 테 아라이 링크스 Te Arai Links 남코스를 경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개장 전부터 전 세계 골프 마니아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곳은 바다에 접한 다이내믹한 해안 사구 위에 만든 홀에서 멋진 경관을 즐길 수 있다. 페어웨이와 그린의 굴곡은 때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예측 불가성이 링크스 코스의 묘미다. 뉴질랜드 북섬, 망가화이 Mangawhei 해변의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하며 라운드를 즐기고 있을 무렵, 함께 페어웨이를 걷던 캐디가 살짝 흥분한 표정으로 바다를 가리킨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멀리 에메랄드빛 수면 위로 범고래의 날렵한 검은 지느러미가 떠올랐다. 엄마의 뒤를 따라 헤엄치고 있는 아기 범고래 눈가의 하얀 반점도 선명했다. 문득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2박 3일간 테 아라이 리조트에 머문 후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케리케리 Kerikeri 로 향했다. 17년 만에 다시 찾은 카우리 클리프스 Kauri Cliffs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리조트의 설립자 줄리안 로버트슨은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방문한 뉴질랜드 북섬에서 보석과 같은 땅을 찾아냈고, 남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해안 절벽 위에 카우리 클리프스 골프 코스를 만들었다. 섬들의 만 Bay of Islands의 해안선, 절벽 위에 조각된 코스의 클라이맥스는 7번 홀이다. 바다 절경에 취한 정신을 가다듬고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넘겨 샷을 하려면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고려해서 클럽을 선택하고 샷을 보낼 방향을 정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홀이다. 사우스 햄튼 스타일의 로지에서 편안한 밤을 보낸 후 출발을 앞둔 아침. 일행 중 한 명이 전날의 감동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고 하여, 예정에 없던 라운드를 하러 아침 일찍 첫 팀으로 코스에 나갔다. 다시 마주한 7번 홀에서 무심하게 휘두른 5번 아이언.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절벽을 넘어 깃대 왼쪽에 떨어졌고, 경사를 타고 구르는가 싶더니 홀컵 주변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동하는 카트 안에서 설마설마했는데 그린 위에 내 공이 없었다. 홀컵 안에 다소곳하게 놓여 있던 하얀 공. 내 첫 홀인원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이상한 이름이 골프장에 붙었다. ‘케이프 키드내퍼스 Cape Kidnappers’라는 이름의 기원은 2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69년 영국의 쿡 선장이 뉴질랜드를 발견했을 때, 현지 마오리족들이 선원 중 한 명인 타히티 소년을 납치하려했던 사건에서 이름을 따 이 지역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코스를 설계한 톰 도크는 21세기 골프 코스 설계에 미니멀리즘을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고, 지형의 형태를 골프에 최대한 도입한 방식은 골프라는 스포츠가 시작된 스코틀랜드의 링크스 코스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케이프 키드내퍼스를 처음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절벽 위,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손가락과 같은 대지는 양떼가 풀을 뜯어 이미 페어웨이로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설계 도면 위에 그려 넣은 18개 홀 중 15개 홀에서 공사를 시작도 하기도 전에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플레이할 수 있었다.” 대지가 갖고 있는 형태를 훼손하지 않고, 골프를 통해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는 세계적인 설계자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며 플레이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골퍼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일 것이다.
뉴사우스웨일스 골프 클럽 New South Wales Golf Club은 시드니 근교의 유서 깊은 회원제 코스로 1926년 영국의 알리스터 매켄지 박사가 설계한 세계적인 명문이다. 세계적인 코스는 기억에 남는 최고의 홀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라운드를 마친 후 18개 홀 중 가장 실망스러운 홀은 어디였는지를 복기하면서 평가할 수 있다. 열등한 홀의 수준을 우수한 홀들과 비교하면서 총체적인 코스의 균형감을 판단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18과목 모두 80점 이상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는 시험과 같다. 세계적인 수준의 코스가 되기 위해서는 18개 홀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유지해야 한다. 미국의 <골프매거진> 선정 세계 100대 코스 랭킹 47위인 뉴사우스웨일스는 18개 홀 모두가 개성 넘치면서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난이도를 지니고 있다. 100년 전, 매켄지 박사가 강조한 설계 철학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었다. 코스의 클라이맥스는 5번 홀과 6번 홀. 바다에 가장 근접한 멋진 파노라마 경관을 보여주는 홀들이다. 해안선을 따라 파도가 빚어놓은 지형 위에 그린을 앉히고 바다를 건너칠 수 있는 티잉 그라운드를 만들었다. 이런 100점 만점의 홀들을 갖고 있는 클럽이 최근 영국의 톰 매켄지와 마틴 이버트에게 코스 전체를 업그레이드하는 임무를 맡겼다. 2024년 공사가 시작되면 전 세계의 골프 마니아들은 새롭게 탄생할 뉴사우스웨일스의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명문 골프장이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해나가야 한다는 원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뉴사우스웨일스 골프 클럽이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자연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물론 이런 당연한 얘기가 골프장에도 적용된다. 자연 깊숙이 자리 잡은 골프장의 모습이 주변 환경과 하나되어 어디까지가 골프장이고 어디서부터 원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지 구별이 힘들수록, 땅을 잘 골랐고 자연 친화적으로 잘 만든 골프장이라고 말한다. 나는 금년 2월, 세상의 끝단에 위치한 골프장에 다녀왔다. 조종사까지 4명이 탑승한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멜버른 샌드벨트 Sandbelt 지역에 위치한 무라빈 Moorabbin 공항에 도착하니 짐을 가득 실은 작은 비행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하늘로 솟구친 비행기가 짙은 구름과 기류를 뚫고 호주 남단 킹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작은 로컬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케이프 위컴 골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반. 해는 아직도 중천에 걸려있었고 일몰까지는 4시간 도 더 남았다. 직원 둘이 지키고 있는 자그마한 클럽하우스에 들어가 밖을 내다보니 멀리 160년을 견뎌온 하얀 등대가 보이고 그 앞에는 거대한 스케일의 페어웨이가 펼쳐져 있었다. ‘명불허전’이라 했던가? 케이프 위컴 Cape Wickham Golf Links은 세계 70위의 위상에 걸맞은 광활한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흩날리는 붉은 깃발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의 가슴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골프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혼자 골프를 해본 사람만이 아는 마음의 평화가 있다. 이는 다른 곳에서 얻는 평화로움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대자연 속 페어웨이를 따라 하얀 공 하나를 쫓아가는 여정은 산티아고 성지순례길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늦은 오후의 태양빛이 페어웨이와 그린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동안 라운드를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 어땠냐는 직원의 질문에 대답은 간단했다. “Beautiful!”
여행 가이드북에서 소개하는 맛집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종종 지나치게 늘어선 줄에 기겁할 때가 있다. 한정된 시간과 끝없이 타협해야 하는 여행객에게 장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사치다. 이럴 때는 비록 무모한 도전으로 끝날 지라도 용기를 내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 탐험을 시작하자. 마치 일드 <고독한 미식가>의 이노카시라 고로 씨처럼 말이다. 골프에도 세계적인 코스로 가는 길목에 로컬 골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숨겨진 보석같은 코스가 있다. 케이프 위컴이라는 골프 맛집에 가기 위해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내게 나타난 숨은 맛집은 킹 아일랜드의 오션 듄스 Ocean Dunes Golf Course였다. 케이프 위컴에서 1박 2일 일정을 마무리한 나는 섬을 떠나기 전 오션 듄스에 들렀다. 멜버른으로 돌아갈 비행기 탑승 시간에 맞추려면 지체없이 라운드를 해야 했다. 바퀴 2개 달린 수동 카트에 골프백을 싣고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니 페어웨이 우측 러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왈라비 Wallaby들이 보였다. 티샷을 마친 후 카트를 끌고 나타난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언덕 위로 도망치는 왈라비 중 한 마리가 멈춰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국에서 온 방랑 골퍼를 쳐다봤다. 갑자기 이 야생동물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작대기를 손에 들고 하얀 공 하나를 쫓아 하루 종일 풀밭을 헤매고 다니는 인간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큰 기대없이 라운드를 시작한 내게오션 듄스는 화장기없는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오션 듄스에서는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나 북아일랜드의 링크스 코스에서 경험할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꾸밈없는 골프를 즐길 수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자신만의 골프에 취해보고 싶은 열혈 골퍼라면 태즈메이니아의 킹 아일랜드로 날아가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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