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비평]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1913.11.7 ~ 1960.1.4)]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여 칭송을 받으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 희곡 《칼리굴라》 등을 통해 부조리한 인간과 사상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소설 《페스트》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50년대 초에 나는 프랑스에 도착했다. 당시 나는 바르샤바 정권과 갈라서고 프랑스로 와 망명생활을 했다. 나는, 사르트르가 중심인 <현대>지의 정신이 승리하고 나를 사회주의의 반역자로 배척하던 당시의 파리 지식인들에 대해 민감해져 있었다. 그것은 집단광기와도 같았다. 이러한 악의적이고 적대적인 분위기 저편에 알베르 카뮈가 있었다. 카뮈는 당시의 파리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친절했다....." - 체슈아프 미우오슈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
카뮈는 왜 왕따를 당해야만 했나?
1952년 <현대(Les temps modernes)>지(紙) 5월호에, 사르트르의 제자로 일컬어지는 철학자 프랑시스 장송은 '알베르 카뮈 혹은 반항의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알베르 카뮈의 <반항적 인간(L'homme révolté)>에 대한 서평을 쓰게 된다. 그에 따르면,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시즘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는 카뮈는 틀렸다. 장송이 보기에 스탈린주의는 스탈린의 체제이지 마르크시즘의 체제는 아니었다. 알베르 카뮈는 <현대>지 8월호에 이에 대한 답글을 싣는데, 이 글의 수신인은 프랑시스 장송이 아닌 장 폴 사르트르로 되어있었다. 카뮈는 '존경하는 편집장 귀하...'로 글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사르트르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카뮈는 <반항적 인간>이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책이 아니라 역사를 '절대'로 만들려는 태도를 부정하는 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르트르는 이에 '친애하는 카뮈에게'라는 인사말을 붙임으로써 카뮈의 무례를 나무랐다. 사르트르는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원전도 읽지 않고 빈약한 지식을 토대로 쓴 조잡한 에세이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고는, 더 이상의 논쟁은 사양하겠노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좌파의 수장으로써 카뮈를 프랑스 지식인계에서 파문시켰다. 이로써 사르트르와 카뮈의 인연은 완전히 끝이 났다. 그렇다면, 왜 카뮈와 사르트르는 이렇게 갑자기 반목하게 되었을까?
<반항적 인간>을 쓰기 전까지 카뮈는 사르트르처럼 정치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이슈를 자주 다루었다. 카뮈는 원래 기자였다. 알제리에서는 <알제 레퓌블리캥>의 기자로, 파리로 이주해 온 뒤로는 <파리 수아르(Paris Soir)>의 취재기자로, 전시에는 <콩바(Combat)>의 편집진으로 활동했다. 그는 알제리 빈민가의 비참함을 취재해 <알제리 연대기>로 만들었고, 2차대전의 경험을 토대로 르포문학인 <페스트(La Peste)>를 썼다. 무엇보다 그는 레지스탕스였다. 카뮈는 나치의 추적을 피해 가명을 사용해가면서 '파리의 모든 총알들이 밤하늘을 수놓는다'로 시작되는 지하신문 <콩바>의 불법기사를 작성했다. 그가 쓴 감동적인 사설들을 읽고 힘을 얻었던 프랑스 국민들은, 전쟁이 끝나자 도대체 이 감동적인 글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내려 했다. 결국 이 사설들의 작성자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뫼르소의 창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카뮈는 1947년 <페스트>의 출간과 더불어 거의 '무신론적 성자'로 추앙되기에 이른다.
카뮈 v. 사르트르, 또는 카뮈 v. 프랑스 좌파
카뮈 자신은 레지스탕스 시절에 대해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독협력자 처단 문제에 있어서는 레지스탕스 경험이 없던 사르트르가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사형 폐지론자 카뮈에게 처형이란 살인에 대한 집단적 보복일 뿐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폭력 그 자체를 위한 폭력을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전후의 프랑스 사회 분위기는 카뮈의 중용노선을 답답해했다. 기독교계의 <악시옹(Action)>지가 '카프카를 불태워버려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불태워버리자는 대답이 비오듯 쏟아졌다. 공산당 기관지 <위마니떼(L'Humanite)>는 카프카를 부패를 조장하는 작가, 니체는 쾌락주의자, 하이데거는 허풍선이로 단정했다. 마르크스와 기독교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실존주의자들은 불안을 조장하는 작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흑백논리가 전후의 시대정신이었다.
이런 시국에 <반항적 인간>이 출간되었다. 카뮈는 <반항적 인간>을 통해 '혁명'과 '반항'을 구분한다. 그 자신, 누구보다 더 반항의 선두에 서서 파시즘과 싸웠던 카뮈인지라, 반항은 온전히 카뮈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카뮈는 '혁명'이라는 단어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과는 다른 개념을 불어넣는다. 그것은 오직 사르트르와 전후의 마르크시스트들이 외치던 폭력 혁명으로써의 혁명이다. 카뮈는 무엇보다 폭력을 증오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카뮈는 사형폐지론자였다. 그래서 <반항적 인간>은 '살인'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시작된다. <시지프의 신화>가 우리 삶의 가치를 건져내고 자살을 못하게 했듯이, <반항적 인간>은 나의 목숨이 중요하듯 타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는 원초적 진리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살인'을 거부한다. 그는 이 논리를 통해 폭력 혁명을 거부한다. 그에게 반항이란 어디까지나 '한계를 지키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애매성이 사르트르와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게오르크 글라저는 회고한다: "좋은 좌익 진영도 없고, 나쁜 우익 진영도 없다. 그저 진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싸움이 났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해서는 안된다고.....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이지 스탈린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카뮈가, 그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약 모든 진영이 좌익이라면 자신은 우익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카뮈의 모든 걸 공격했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들의 흑백논리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던 것은 스탈린 치하의 강제수용소 문제였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거의 모두가 곧 마르크시스트나 다름없었고, 그들은 지구상 최초로 혁명을 성공시켰던 공산주의 국가 소비에트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1930년대에 앙드레 지드는 지식인들의 대표로 소련을 순방하고 돌아와, <소련기행>을 통해 소련의 현실은 프랑스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밝혔다. 지식인들은 즉각 지드를 공격했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대신 '자신들이 믿고 싶은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 프랑스 사회에 공산주의 대국의 집권자가 된 스탈린이 강제수용소를 만들고 있다는 뉴스가 공개된 것이다. 지식인들은 당황했지만, 곧 멋들어진 이론으로 이를 합리화시켰다.
헤겔과 마르크스로 무장한 메를로퐁티는 '진보적 폭력'이란 이론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는 폭력 그 자체를 없애기 위한 폭력은 정당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이론의 필터를 거친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체제의 폭력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결국 메를로퐁티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마르크시즘 노선에서 돌아서게 되지만). 사르트르를 비롯한 그의 일당들 역시 소련은 자신들이 원하는 변화를 계속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 발생한 강제수용소를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시즘의 귀결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카뮈가 보기에는 마르크시즘의 방향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실존주의가 정말 휴머니즘인가?
카뮈는 집단수용소가 일종의 전술이었다 해도,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 카뮈는 그의 <작가수첩(Carnets)>에 그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적고 있다: "역사를 생각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육체로 역사를 직접 체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역사를 관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소외된 카뮈는 곧 알제리 독립문제로 눈을 돌리지만, 여기서도 역시 그의 애매한 태도를 증오한 과격파로부터 피살위협까지 받게 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카뮈도 이제 앙가주망(Engagement, 사회참여)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확신했지만, 카뮈는 너무 절망한 나머지 정치문제에서 손을 떼고 한동안 일체의 공식적인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헝가리 민중 폭동 때는 이렇게 썼다: "진보적 지식인들. 그들은 변증법을 가지고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그들은 드러난 진실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진 사념의 그물코를 뜨고 있다."(<작가수첩>) 이런 이념의 차이로 인해 카뮈가 받은 상처는 컸지만, 카뮈가 왕따를 당하게 된 것은 단지 정치적 태도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레이몽 아롱이라는 사상가가 있었는데, 이 사상가는 좌파 일변도인 지식인 사회 속에서 이례적으로 미국식 자본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책을 써서 맹목적으로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었던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을 고발했다. 정치적 태도만으로 보자면, 아롱이 더 왕따를 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롱은 사르트르와 고등사범학교 동기였고, 메를로퐁티는 그 후배였다. 카뮈야 알제리의 알제 대학에서 장 그르니에 교수를 사사하던, 시체말로 촌구석에서 파리로 상경해온 작가였을 뿐이다. 그러니 카뮈가 고등사범학교 출신 지식인들과 인맥이 닿아있을리 만무하다.
프랑스 좌파의 맹목적인 유토피아에의 믿음
그렇지만 문제는 무엇보다 카뮈 자신의 견해 차이에 있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날카롭게 인식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카뮈나 실존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뮈는 역사가 지속되는 한 그 부조리는 영속할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흘러간다면, 그 변증의 연쇄고리를 이끌어가는 모순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카뮈는 인간의 목만을 지켜내기 위한 반항, 이를테면 부조리를 뿌리뽑기 위한 폭력 혁명이 아닌, 인간의 목숨과 건강을 되찾기 위한 반항만을 허용하려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와 프랑스 마르크시스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장한 폭력 혁명은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혁명에 이미 성공한 공산 국가가 소비에트 공화국이며, 현재 소련이 겪고 있는 문제들은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변화의 도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광장>에서 최인훈이 파악했듯이, 마르크스는 스승 헤겔이 만들어놓은 나신(裸身)의 조각상에다 유물론의 옷을 입혀놓았다. 또한, 헤겔의 변증법은 히브리식 메시아 신앙의 형이상학적 수용일 뿐이다. 유태신학에서 메시아의 도래는 다가올 천년왕국의 서곡이다. 공산주의 혁명이란 반드시 올 유토피아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제시하고 예언한 일종의 가짜-메시아(Pseudo-messiah)이다. 그러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발터 벤야민이 유태신학과 마르크시즘을 결합하려 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카뮈가 공격받았던 것은 이런 유토피아의 도래를 믿지 않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지중해 인간, 즉 헬레니즘을 믿었다. 그는 인간의 분수에 맞는 철학만을 요구했다. 그에게 있어 유토피아를 앞당기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분수에 넘어서는 일이었고, 관념의 실현을 위해 누군가의 피를 흘리는 일이었다. 콩케스트의 추산에 따르면, 1936년부터 1950년까지 소련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3천만명에 이른다. 카뮈에게 이런 강제수용소와 아우슈비츠는 동일한 집단적 폭력일 뿐이었다. 즉, 카뮈에게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마르크시즘)는 파쇼의 두 가지 얼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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