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하나를 만들 때도 다양한 레시피가 있습니다. 하물며 복잡다단한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요. 생채기가 생긴 내 마음을 돌보며 살아가고 싶은 분들께 다채로운 치유·회복 비법을 소개합니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 산으로 들로, 다른 나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닌, 마음에 진정한 쉼을 주는 휴가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 디지털 도파민 때문에 지친 뇌에 잠시 쉼을 주고, 삶의 의미와 깊이를 찾고, 번아웃으로부터 회복되고 싶은 이들을 위한 다채로운 '휴가 레시피'를 소개한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현실에 집중하다 보니 정신이 선명해지는 것 같다." (첫째 날)
"이렇게 스마트폰 없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집중해서 책에만 빠져들었다." (둘째 날)
"이곳에서 선명하고 안온한 감각을 경험했다." (셋째 날)
이고은(33)씨가 쓴 '스마트폰 해방일지'의 한 대목이다. '스마트폰 해방촌'(이하 '해방촌')에서 쓴 것이다. 10년 차 언어재활사인 이씨는 지난 4월 친구 두 명과 해방촌의 문을 두드렸다. 짧은 휴가 동안 도파민에 찌든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싶어서였다. 해방촌은 디지털 디톡스 마을이다. 충남 공주의 2층짜리 단독주택을 개조해 숙소를 만들었다. 디지털 디톡스 프로그램은 2박 3일짜리. 스마트폰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고 싶은 직장인들이 짧은 휴가를 이용해 찾기 좋은 기간이다.
해방촌에 도착하자, 이씨 앞에 놓인 건 '스마트폰 의존도' 자가 진단 테스트. 15개 문항으로 구성돼있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10% 이하가 되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스마트폰을 왜 켰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10분 이상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스마트폰을 자주 확인한다 등이다. 의존도가 높게 나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결과는 놀랄 정도. 15개 문항 중 10개나 해당됐다.
스마트폰 이용 시간이나 습관도 확인한다. 스마트폰에 있는 기본 설정 메뉴를 이용하면 알 수 있다. 안드로이드폰은 '디지털 웰빙', 아이폰은 '스크린 타임'으로 들어가면 이용 시간이 나온다. 아이폰은 여기에 더해 스마트폰 화면을 얼마나 깨우는지도 표시된다. 이씨가 확인한 자신의 하루 평균 스크린 타임은 9시간 41분, 화면 깨우기 횟수는 169회에 달했다. 이씨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나 터치 횟수를 숫자로 확인하니 너무 지각없이 폰을 이용하는 듯해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자가 테스트를 마치자, 해방촌 운영자들은 철창이 달린 상자를 내밀었다. 이곳에선 '금욕상자'라고 부르는 스마트폰 보관함이다. 여기에 스마트폰을 넣고 자물쇠로 잠근 뒤 2박 3일을 보내야 한다. 물론 이메일 확인이나 교통편 예약처럼 업무나 일상에 필수적인 일을 처리해야 할 때는 일시적으로 꺼내 쓸 수 있지만.
금욕상자에 스마트폰을 넣고 나면 본격적인 해방 생활이 시작된다. 해방촌에서 지내는 동안 마을에 입주한 이들은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른다. 같은 달 해방촌을 찾은 14년 차 회사원 최모(39)씨도 "휴대폰을 '금욕상자'에 넣고 나자 '내가 진짜 휴대폰 없이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고 했다.
해방촌 운영자들은 입주민들을 모아 마을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소개한다. 근처 식당이나 카페를 비롯해 여유 시간을 보낼 만한 곳들이다. 스마트폰이 있다면 '구글 맵'이나 포털 사이트의 '길찾기'로 해결했을 테다. 최씨는 "길을 몰라도 누군가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지도 앱을 쓸 수도 없으니 살기 위해 길을 익혀야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해방촌에선 매일 아침 리코더가 입주민들을 깨운다. 최씨는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깨는 평소와 달리 리코더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니, 평소 내가 얼마나 스마트폰에 의존하며 살았는지 한 번 더 되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늘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다가 시계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입주민 몇몇은 급히 인근 가게에서 시계를 사기도 했다.
해방촌에선 스마트폰 없이 시간을 보내는 법을 익히게 한다. 그래서 준비한 게 명상과 '벽돌책 읽기'다. 명상은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한다. 입주자들은 15분 동안 눈을 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음악도 없다. 이씨는 "평소에는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 화면을 켜니 주의가 분산됐는데 처음으로 머릿속이 비워진 느낌을 받았다"며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도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벽돌책 읽기'는 벽돌처럼 두꺼운 책을 읽는 시간. 책보다는 영상을, 긴 영상보다는 30초짜리 '쇼츠'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뇌를 깨우려는 프로그램이다. 벽돌책을 2시간가량 읽고 입주민들과 소감을 공유한다. 최씨는 "한자리에서 집중해서 책 한 권에 몰입한 게 얼마만의 경험인지 매우 새로웠다"며 "이 경험이 좋아 서울에 돌아온 이후에 '스마트폰 없이 독서하기' 모임에 또 참여했다"고 말했다.
자유 시간엔 해방촌이 있는 공주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입주민들 손에는 종이 지도가 쥐어진다. 이고은씨는 "난생처음 종이 지도를 보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며 "지도 앱을 쓰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셀카'나 음식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것도 입주민에겐 새롭게 다가왔다. 입주민들은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맛집을 검색해서 가고 음식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느라 손이 바빴을 텐데 폰이 없으니 오히려 고민이 줄고 마음이 편안했다"고 입을 모은다.
입주민들은 해방촌에 머무는 동안 '스마트폰 해방일지'를 쓴다. 스마트폰 없이 보내는 일상의 소감을 기록하는 것이다. 해방촌에 입주했던 5년 차 직장인인 최소연(30)씨는 "스마트폰이 곁에 있었을 땐 화면 속 재미에 빠져 고민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해방촌에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모처럼 사색을 할 수 있었다"며 "개인 일기장을 가져갔는데 갈수록 내용이 풍부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스마트폰 없이 밥을 먹고 카페에 갔던 시간을 돌이키며 "진정한 '해방'을 느낀 시간"이라고 기억하기도 했다.
2박 3일 일정의 마지막 날, 해방촌은 '해방식'으로 입주민들이 보낸 해방의 시간을 기념한다. 해방식에선 '해방 회고록'을 적고 다함께 소감을 나눈다.
"스마트폰이 주는 도파민 없이도 (심리적) 보상이 가능하다는 걸 경험했다."(이고은씨)
"스마트폰 없는 세상의 도파민이 더 강력하다는 걸 경험했다."(최소연씨)
해방촌에서 나온 지 두 달, 이씨의 하루 평균 스크린 타임은 2시간 정도 줄었다. 자기 전엔 늘 쇼트폼을 봤지만, 이제는 일기를 쓴다. 그는 "정보 검색이나 연락 등 스마트폰이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최대한 눈앞에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해방촌을 기획한 이지선 노마드맵 대표는 "디지털 기기가 업무에 폭넓게 적용되면서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 노마드'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지만, 이와 함께 디지털 피로도도 커졌다"며 "가장 많이 쓰는 디지털 기기인 스마트폰부터 적당한 거리두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해방촌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짜리 프로그램을 만든 이유도 직장인의 편의를 고려해서다. 금요일에 반차를 내고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촌은 한 달에 한 번 손님을 받는다. 한 번에 8명까지 입주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이후 50여 명이 다녀갔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사찰이나 순례길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도 있다. 특히 템플스테이는 MZ세대(1980~2000년도 출생자) 사이에서 이미 인기다.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 따르면, 템플스테이 참여자 수는 2021년 25만8,000명, 2022년 42만9,000명, 2023년 54만6,000명으로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이 중 2030대의 비율은 50% 안팎에 달한다.
참여자 대부분은 마음 돌봄을 위해 절을 찾는다. 지난해 템플스테이를 찾았던 이들 중 58%는 '휴식 또는 일상의 재충전'을 위해, 25%는 '자아 성찰이나 심신 안정'을 위해 참가했다고 답했다. '불교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고 응답한 이들은 5%에 불과했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는 제준(24)씨는 2월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 두 달간 머물렀다. 청소 및 세탁 등으로 봉사를 하는 대신 숙식이 무료로 제공됐다. 스님들과 함께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예불과 참선을 한다.
제씨는 "믿는 종교는 없지만 우연히 친구들과 사찰에 하루 놀러 갔다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아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자아를 돌아보는 계기도 됐다. 그는 "불교 철학의 핵심 중 하나는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라며 "템플스테이 때 접한 이후 삶의 모토가 됐다"고 덧붙였다.
휴가 때마다 사찰에 머무는 이들도 있다. 초등학교 교사 손둘이(37)씨는 방학 때 템플스테이를 종종 찾는다. 그는 "도시를 떠나고 싶을 때면 절 특유의 평온함과 고요함을 느끼러 템플스테이에 간다"며 "포교 활동이 없어 부담이 적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총 820㎞에 달하는 스페인 산티아고 성지순례길도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를 불문하고 인기다. 순례길을 걸으며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싶은 이들이 그만큼 많아서다.
한승윤(30)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을 믿진 않지만 2016년엔 프랑스를 출발점으로, 지난해엔 포르투갈을 출발점으로 각각 800㎞, 280㎞를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출발지에 따라 거리가 달라진다. 한씨는 "직장 4년 차였던 지난해 무료한 일상의 매너리즘을 깨고자 3주간 휴가를 내고 산티아고로 떠났다"며 "아침에 숙소를 나올 때 목표했던 거리를 다 걸으면 소소한 성취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하루 루틴도 걷기, 식사, 쉼으로 단순해지니 '나와의 대화'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지금 어디가 아픈지, 목이 마르거나 배고프지는 않은지, 오늘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등 내 상태에 대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잘 알아차리게 됐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니 여행상품도 생겼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순례길 상품은 10년 전쯤부터 나왔는데, 수요가 꾸준하다"이며 "9월에 예정된 40일짜리 완주 코스와 17일짜리 250㎞ 코스 상품 모두 1차 예약 마감됐다"고 설명했다.
'번아웃' 조짐이 보이는 직장인들에겐 휴가가 타 버린 마음에 에너지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휴가를 이용해 번아웃 증후군을 예방할 심리적 '백신'을 맞는 것이다. 한창수 고대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휴가는 자신의 마음을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라며 "수면, 산책, 대화, 운동 등 스트레스 상태를 전환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꼭 멀리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한 교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좋은 휴가"라며 "일상에 복귀해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에너지를 충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상에서 리트릿(휴식)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도 있다. 오래된 한옥을 목조 주택으로 개조한 서울 성북구의 '이너시티'가 그렇다. '쇼펜하우어 책 읽고 토론하기', 북한산 하이킹, 캠프파이어 등으로 짜인 2박 3일짜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저스트비 선원'은 서울 도심에서 템플스테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숙박과 함께 명상, 태극권, 승가 체험을 할 수 있다.
'번아웃 백신 휴가'의 핵심은 '심리적 거리두기'다. 한 교수는 "휴가 동안 스마트폰과 IT 기기는 멀리 하고 일 거리는 가져가지 않는 게 좋다"며 "휴가란 결국 먹고, 자고, 몸과 마음을 쉬도록 하는 시간이라는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 '치유 레시피' 시리즈는 전문가 자문을 거친 자가 진단 또는 회복의 방법을 디지털인터랙티브 콘텐츠로 제공합니다. 링크를 누르면 스마트폰 과의존 상태를 자가 진단할 수 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링크가 열리지 않는다면, 주소(https://touchyou.hankookilbo.com/v/2024070501/)를 포털 주소창에 복사해 넣으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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