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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風光在險峰

모든 일에 대한 槪念을 정확히 알고 살면 좋다. 개념은 세상만사 기본이고 핵심이며 생각과 사고와 사유 기준이다. 개념은 추상성과 상징성, 다의성과 위계성, 객관성과 일반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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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지도자(指導者)와 독재자(獨裁者) 사이에서

체제 유지에 실패한 연개소문

 

: 박하늘

고구려사(高句麗史)에 있어서 평가가 갈리는 인물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는 인물은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이 평가도 시대별로 가지각색으로 나타나게 된다. 고려 시대에는 당시에 역사상 신라를 중시하였던 김부식(金富軾)이 자신의 저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연개소문을 험상궂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던 반면에, 일제강점기시기에는 신채호(申采浩)는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한국사(韓國史) 내의 영웅적 인물을 만들려는 과정에서 연개소문을 구국의 영웅으로 서술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옴에 따라서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었던 당나라와 전쟁을 펼쳤던 시기에 최고 집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한 평가가 다시금 높아지게 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최근의 평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는 인물이 분명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사실이고, 현재상황과 맞물려 다시금 객관적인 부분은 놓치며, 그를 무조건적으로 고평가하는 모습은 옳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연개소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개혁정치

연개소문이 우리가 아는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영류왕(榮留王)과 온건파를 처단하는 정변에서 시작되었다. 이 연개소문의 정변은 교과서를 통해 단순히 영류왕의 저자세적 대당 외교로만 알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변을 다르게 바라보면 대표적인 평양계 신진 귀족세력의 하나인 연씨가문과, 대당 온건책을 표방하며 왕권강화정책을 추진하려 했던 영류왕(榮留王)과 국내()계 귀족세력과의 대립의 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이 결과적으로 대당정책을 둘러싼 강경파(强硬派)와 온건파(穩健派)의 대립의 부산물로 파악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러한 갈등은 단순히 대외정책상의 노선의 차이만은 아니다. 귀족연립정권하에서 각 귀족집단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반영되어있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국내성계와 평양계(平壤界) 귀족세력간의 대립구조 속 갈등이 정변이 일어나는 도화선(導火線)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덧붙여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는 모의에 영류왕(榮留王)이 직접 개입하는 모습을 보면, 영류왕을 위시한 왕권파의 세력들은 추락한 왕권의 재확립을 위해 적극적 대당외교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려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종래의 귀족연립체제 속에서 막리지의 권한을 세습해온 가문 대대로의 특권을 유지하고자하는 생각과는 마찰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결국 정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642년 정변을 토해 영류왕과 100여명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등장은 대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귀족연립체제(貴族聯立體制)로 유지되어있던 고구려 국정운영에 큰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독단적인 정치로 분열 초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집권한 이후 대내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고구려의 기존 귀족연립체제를 무너뜨리고 연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사족정치(士族政治)를 시행하고, 자신의 막강한 힘을 통해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세력에 대해서도 장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러한 자신의 지지기반의 확보를 위해 자신과 대척점에 있던 불교계(佛敎界)를 탄압하고 도교를 후원하면서 사상적으로도 고구려를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정책은 그 속을 보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이었지, 결국 풍전등화의 상황의 고구려(高句麗)를 구하기 위한 성격의 정책들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연씨 정권은 분열된 귀족세력(貴族勢力)간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행적인 집권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의 지배층의 분열과 이탈을 초래하여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대외정책은 당과의 관계에서는 강경론의 입장을 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초기에는 무조건적인 강경론적 입장은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대외강경론은 어찌 보면 민심을 집결하고 권력의 안정화(安定化)를 위해 인접국과의 긴장을 조성하려는 정략적인 판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당에게 조공을 바치는 등의 형태를 통해 사전에 그것을 차단하려하는 시도도 보였지만, 결국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집권 자체로 인하여 당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와 맞물려 신라와의 외교에서도 자신의 위세를 앞세워 그들을 굴복시키려는 고자세의 형태를 보임으로써, 신라와의 평화도 깨지게 되어 앞뒤로 공격을 받는 형태로 고구려(高句麗)를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만들었다.

 

즉 자신의 권력을 수호하려고 당에 강경하게 맞서 싸웠지만, 자신의 권력을 위해 자극하지 말아야할 신라(新羅)라는 세력을 자극하였고, 이로 인해 고구려(高句麗)는 외교적 고립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참된 리더쉽이란

이러한 모든 결과가 연개소문(淵蓋蘇文) 개인의 잘못이라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개소문에게 고구려 멸망의 책임이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키웠던 사족들의 다툼이 결국은 고구려(高句麗) 내부의 귀족 다툼으로 번져 결국 당의 침략에 하나로 힘을 모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신라(新羅)라는 적을 둠으로써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결정적 요인을 제공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는 무모한 대외강경론자(對外講經論者)의 모습도 보였고, 억압적인 독재자의 모습도 보였던 인물이다. 지금은 세상을 하직하신 하용조 목사님의 참된 리더쉽을 위한 십계명에 혼자할 수 있는 일들도 함께하며, 문제 있는 사람과도 함께 일하라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비추어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바라본다면, 연개소문을 막연히 카리스마적인 리더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반대였던 국내계를 제거했고 자신만이 권력의 최정점에 위치하여 사족 정치(士族政治)를 펼쳤던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이 그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가 권력을 장악해 고구려(高句麗)를 휘어잡고 당시 강대국(强大國)이었던 당에 절대 밀리지 않는 모습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쉽은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고 막연히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이민족에게서 민족을 지키려했던 민족 영웅으로 미화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 참된 역사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생각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국가를 위한 다는 명목으로 권력의 일원화(一元化)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의 주장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한 가지 좋은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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